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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지향하는 역동성이 깨달음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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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지향하는 역동성이 깨달음의 세계"

[화제의 책] 현응 스님의 <깨달음과 역사>

1. 한국불교의 사유화, 세속화, 이원화

한국 불교의 깨달음은 사유화(私有化)되고 신비주의화된 지 오래다. 그 높고 깊은 경지를 이해할 수도, 모국어지만 알아들을 수도 없다. 선문답은 더 이상 대화가 아니다. 부처님 말씀도, 예수님 말씀도, 소크라테스의 대화도, 공자의 논어도 말이었다. 주고받는 얘기였다.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비유와 설명이었다. 그런데 한국 불교의 깨달음, 깨달음을 주고받는 문답은 난해한 문제풀이다. '유식론(唯識論)의 번쇄한 언어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했던 선종이 다시 언어의 감옥에 갇혔다.

한국 불교의 깨달음은 세속화다. 18세기를 살다간 역관 출신 문인 이언진이 읊었다. "한 구절 두 구절 설명한 게 '역(易)'이건만 / 복희(伏犧)씨는 점괘로 돈벌이하고, / 천 소리 만 소리 염송한 게 불경인데 / 석가는 재(齋) 빙자해 시주를 받네

(이언진 시집 <골목길 나의 집>, 돌베개)."

한국 불교는 분단 상태다. 이원화다. 이판과 사판이 그렇다. 깨달음과 실천이 전혀 별개의 바퀴다. 산중불교와 시중불교로 나뉜다. 승과 속은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강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한국 불교의 위기를 얘기한다. 불교의 위기고, 종교의 위기다. 물론 한국 기독교조차도 위기를 이야기하고, 종교의 위기를 얘기한다. 신정국가의 전통이 사라진 이래 종교의 위기는 계속돼 왔다.

다들 나서 해법을 거론한다. 깨달음을 재해석하고 전통을 창신한다. 청년 부처를 말하고, 근본 불교를 찾아나선다. 새로운 결사운동을 제안하고, 종교개혁을 얘기한다. 불교의 깨달음에 근거한 독자 종교모델을 일신하지 못하고, 근본주의에 경사된 한국 기독교의 성장주의를 곁눈질한다. 성(聖)이 속(俗)의 길을 좇아 '사찰 경영'을 무심결에 입에 올린다. 기독교적 기준을 종교의 글로벌 스탠다드로 착각한다. 여전히 한국 불교는 위기다.
그래서 현응 스님이 <깨달음과 역사>를 얘기하고 나섰다.

2. '깨달음의 역사화', '역사의 깨달음화'

서양에서 불교를 비판할 때면, 줄곧 불교의 '부정'을 거론한다. '생명에 대한 부정'과 같이, 생기에 차 있는, 살아있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종교로 간주한다. 이런 입장은 공(空)을 아무것도 없음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낮은 차원에서의 '존재의 부정'이다. 그렇다. 불교는 부정의 종교다. 부정을 방편으로 삼는다. 그래서 특별하다. 하지만 결코 부정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인식이나 욕망에 대한, 나아가 현세에 대한 전부부정을 통해 대긍정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어느 일본의 종교학자는 '불교란 부정을 원동력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운동'이라고까지 했다.

현응 스님이 깨달음을 말했다. 스님이 말하는 깨달음이란 "변화와 관계성의 법칙을 깨닫는 것"이다. "삼라만상이 서로 연기적(緣起的)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깨닫는 일"이다. 깨달음은 결코 부정이나 허무가 아니라는 것이다. "절대적인 가치체계에 종속되지 않는, 열려진 적극성이며 변화를 지향하는 역동성이 바로 깨달음의 세계"라고 했다.

깨달은 사람은 깨달음의 영역에 자족하지 않고 역사의 길에 나선다. "존재에 대한 사랑(慈)과 연민(悲) 때문이다. 자비야말로 역사적 행위의 원동력으로서 깨달음과 역사를 묶어 내는 고리이다." 그리하여 '깨달음'과 '역사'는 이원화의 틀을 벗어나 불이문(不二門)에 들어선다.

그렇다면 깨달음과 역사는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보디사트바(보살)란 '깨달음(보디 bodhi)'과 '역사(사트바 sattva)'의 합성어가 되는 것입니다. 통속적인 표현으로 '깨달음의 역사화', '역사의 깨달음화'라고 하고 싶습니다만, 이 보살의 삶에 있어서는 그의 깨달음에 기초하는 역사로부터의 자유로움만 만끽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와 교섭하도록 적극 참여하여 그 자신을 투사시킨다고나 할까요. 표현은 뭐 합니다만, 저는 이것을 '역사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being and history)'와 '역사에로의 자유(freedom to being and history)'를 겸한 삶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이렇게 해서 깨달음이 곧 역사요, 역사는 곧 깨달음이다. '깨달음'과 '역사'의 조화로운 삶의 모습이야말로 '열린 보살의 역사적인 삶'이다. 그것은 환상적인 삶(보살)이 환상적인 노력(如幻慈悲)으로 환상적인 세계(淨土, 중생계)를 구현해 나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보살의 이러한 역사적 실천이야말로 환상으로의 중생 세계를 성취하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일러 "불국토 청정"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시 스님은 말한다. "중요한 것은, 무심하게 '아미타불'을 반복하여 외우는 것보다 '아미타불'의 뜻이 '한없는 생명(無量壽)'과 '한없는 광명(無量光)'임을 알아야 하듯이, 그 드넓은 '시간과 공간의 역사' 속에 우리의 역사적 의지를 담아내는 일입니다. 그래서 '정토구현'이라는 명제 아래 우리는 이 중생계가 단순히 소승의 적멸주의나 수수방관하는 기계론적 인과론에 빠지지 않도록 고달픈 중생의 삶을 희망찬 내용으로 채워야 합니다."

불교는 더 이상 허무가 아니다. 희망이다. 더 이상 무심한 종교가 아니다. 자비의 종교다. 따뜻한 종교다. 불교와 사회는 더 이상 둘이 아니다. 하나다. "둘은 하나의 영역이며, 하나의 영역에 대한 지향이요, 그에 대한 실천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지를 옛 스님의 말씀으로 대신했다.
"실제(實際)의 이지(理地)에서는 한 티끌도 용납하지 않지만
만행문(萬行門)에서는 한 법도 버리지 않는다."

3. 20년 전 이 책의 문제의식이 여전한 이유

원래 이 책의 문제의식은 80년대 중후반이다. 그때는 한국불교가 얼치기 '호국불교'를 자임하던 시절이다. 세속권력과 종교권력을 착각하던 때다. 세상의 민주화바람 못지않게 종교의 민주화, 불교의 사회화 열기가 봇물처럼 넘쳐나던 시대이기도 했다. 현응스님은 당시 '젊은' 스님이었다. 스님은 그 시대를 살았던 불교도의 한 사람으로서, "불교를 구체적인 현실과 역사에 접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 책의 초판은 1990년 해인사출판부에서였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형식은 개정증보판이다. 대부분의 원고는 그대로이다. 그렇다면 문제의식 또한 그대로인 셈이다. 1990년 당시 스님이 제기했던 '깨달음의 역사화' '역사의 깨달음화'는 2010년 현재 어디까지 가 있는가. 과거형인가, 아니면 미래형인가, 아니면 현재진행형인가. 왜 다시 이 책이 활자와 판형을 달리해서 재출간 될 수밖에 없었을까. 한국 불교는 도대체 어디에 머무르고 있기에 '깨달음의 역사화' '역사의 깨달음화'가 여전히 불교계와 사회의 화두가 되어야 하는가.

4. 스님은 그동안 조계종단개혁에 헌신했고, 해인사 주지를 역임했다. 현재는 조계종 교육원장으로 선출되어 승려 교육에 나섰다. '깨달음의 역사화' '역사의 깨달음화'를 실천할 수 있는 근본운동에 뛰어든 셈이다. 조계종의 새로운 바람이 한국 불교, 한국 종교의 새로운 바람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편안한 주말 마지막으로 어느 선사의 노래를 공양드리고 싶다[<소동파 선을 말하다(스야후이 지음)>에서 재인용]. 험한 세상 잠시라도 청안(淸安)하시길.

"봄에는 온갖 꽃이 피고 가을에는 달이 뜨며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고
겨울에는 눈이 온다.
한가일 일마저 마음에 걸리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인간의 좋은 시절이니라."
(春有百花秋有月
夏有凉風冬有雪
若無閑事掛心頭
便是人間好時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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