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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 유연성' 논쟁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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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전략적 유연성' 논쟁은 계속되어야 한다

[기고]아직도 불신의 원인을 모르겠다는 이종석 前 장관

이종석 전 통일부장관이 신문 칼럼을 통해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불신'을 탓했다(한겨레 1월 11일, "전략적 유연성의 진실과 불신의 벽"(칼럼보기).

이 글에서 이 전 장관은 "정말 당혹스러웠던 것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보여준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이었다"고 했다.

지난해 12월 15일 필자는 "'전략적 유연성'이 '주한미군 철수'다"는 제목의 프레시안 기고문을 통해 참여정부의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한미 간 합의를 재론한 바 있다. (기고보기).

이 전 장관의 생각에 반하는 문제제기였다.

지난 10월에는 한미 SCM이, 11월에는 한미정상회담이 있었다. 각기 그 직후부터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마크 멀린 합참의장, 월터 샤프 주한미군사령관 등은 '주한미군의 이라크 차출 가능성'을 언급했다. 보수언론들이 화들짝 놀랐다. 2006년 1월, 한미 간 전략적 유연성 합의가 다시 쟁점이 됐다. 이런 사연이길래 이 전 장관의 칼럼이 남의 일 같지 않다. 그래서 굳이 설정하자면 이 글은 '재반론'인 셈이다.

이 전 장관은 칼럼에서 한미 간 전략적 유연성 합의는 '제한적'이라고 정리했다. "미국이 자국의 필요에 의해 주한미군을 다른 지역으로 차출하려 할 때, 한국 정부는 이를 수용하되, 동북아 지역으로의 차출이나 전개 등은 한국 정부의 동의 없이는 안 된다"는 수준의 합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 장관이 지적한 "불신의 벽"이 왜 생겨났을까. 이 전 장관은 여전히 그 원인을 모르는 것 같다.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논의는 더 계속되어야 하고, 더 설명되어져야 한다. '자기성찰'없는 '자폐적' 자기확신이야말로 위험하다.

대통령, 외교부장관, 이 전 장관의 말이 각기 다른 이유는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한미 간 합의는 2006년 1월 19일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장관과 라이스 미 국무장관 사이의 제1차 '한미 전략대화' 공동선언 형식이었다. 외교부장관급 전략대화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오로지 전략적 유연성만을 위한 전략대화였음은 나중에야 확인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6년 8월 27일 '노사모' 회원들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이 자리에서 전략적 유연성이 언급됐다.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것은 한반도의 미군을 함부로 빼서 아무데나 이동하고 작전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아니냐. 이름은 전략적 유연성으로 하고 있지만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은 현재 없습니다.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허용하지 않았는데 일부 언론이나 또 일부 사람들은 제가 전략적 유연성을 허용한 것으로 계속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 저는 우리의 실질적인 합의는 한국정부가 동의하지 않는 한 움직이지 못한다,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미묘한 발언이다. 원칙적으로 전략적 유연성 합의를 부정했다. 다만 '제한적 수용'의 의미를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합의했다'가 아니라, '이해하고 있다'라는 표현이 특별하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그해 9월 1일, 합의의 주역이던 반기문 외교통상부장관이 관훈클럽 토론회에 섰다.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놀랍게도 반 전 장관의 발언은 대통령의 발언을 일거에 뒤집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나 국민이 원하지 않는 지역 분쟁에 '한국군'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에 합의했다."

노 전 대통령은 '한국정부가 동의하지 않는 한 주한미군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반면, 반 전 장관은 '한국정부가 동의하지 않는 한 한국군은 함부로 따라가지 않는다'라고 합의했음을 분명히 해버린 것이다.

당시 필자가 문제를 제기했다. 그해 9월 5일 외교부는 반박 보도자료를 냈다. 내용은 이렇다.
"우리 정부는 전략적 유연성과 관련하여 '한국이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지속적으로 설명해 왔음."

지극히 외교부다운 보도자료다. 왜 당시 보도자료가 이 전 장관의 '현재'의 발언 수준을 담보해내지 못했던 것일까. 하다못해 대통령의 '8월 27일자' 발언 수준이라도 담보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주한미군'과 '한국군'은 하늘과 땅 차이다. 이 전 장관은 반 장관의 발언이 틀렸음을 보증할 필요가 있다. 불신은 문제를 제기한 사람의 몫이 아니라, 문제를 야기한 사람의 몫이다. 당시 참여정부 관계자들의 몫이다.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탓할 게 아니라, '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탓해야 한다. 이 전 장관은 당시 NSC의 실질적 책임자였다. 그리고 필자는 2006년 1월 당시부터 전략적 유연성의 최종단계는 '한미연합전력의 해외 투사'라고 일관되게 얘기해 왔음을 지적해 둘 필요를 느낀다.

'제한적 수용'의 합의가 공개되지 않는 이유는?

2009년 6월 16일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미동맹을 위한 공동비전'이 발표됐다. 이로써 한미동맹은 전략동맹으로 승격됐다. 전략적 유연성이 재확인됐다.

"… 동맹재조정을 위한 양측의 계획을 진행해 나감에 있어, 대한민국은 동맹에 입각한 한국방위에 있어 주된 역할을 담당하고, 미국은 한반도와 역내 및 그 외 지역에 주둔하는 지속적이고 역량을 갖춘 군사력으로 이를 지원하게 될 것이다.… "

당시 언론들은 대충 넘어갔다.
같은 해 10월 22일 제41차 한미SCM이 있었고, 공동성명에서 전략적 유연성이 다시 한 번 확인됐다.
"게이츠 장관은 한반도에 배치된 전력을 통해서 뿐 아니라, 위기시 세계 전역에서 가용한 미군 병력 및 능력을 한미연합방위를 위해 전략적으로 유연하게 증강 배치해 대한민국을 방위한다는 미국의 단호하고 확고한 공약을 재강조했다." (전략적 유연성은 전입과 전출 모두를 포함한다. 들어올 수 있으면 나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주한미군의 전출 가능성이 아닌, 전입만을 명시한 이유는 참여정부 관계자가 거론했듯, 보수진영에 대한 설득용 표현이다.)

'공동비전'과 '공동선언', 어느 곳에도 이 전 장관이 얘기하는 '제한적 수용'의 의미가 보이지 않는다. 2006년 한미 간 합의 이후, 2009년 공동비전과 성명은 발전 혹은 진화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에도, '제한적 수용'에 대한 구체적 절차가 없다. 물론 '내부적' 혹은 '실질적' 합의가 있을 수는 있다. 만일 그렇다면, 공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한미 SCM이후 '주한미군의 이라크 차출 가능성' 등이 미국 언론에 의해 공개적으로 보도되면서, 우리 언론들도 비로소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대표적 반응을 예로 들었다.
"미국이 원하면 언제든지 주한미군을 차출해 다른 지역으로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중앙일보 10월 27일자 사설 '주한미군 중동 차출' 대비책 서둘러야)."

"주한미군의 해외파병은 이미 2006년 한·미 간 '전략적 유연성' 개념에 합의함으로써 그 문이 열려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는 파장을 우려한 미 정부가 실제 적용에 신중한 태도를 취해 왔다. 그러나 최근 미 고위 당국자들의 계속되는 발언은 미 정부의 입장이 바뀌었음을 알게 한다. 6·25전쟁 이후 한반도 방위에만 전념해온 주한미군이 머지않아 오키나와 주둔 미군처럼 해외발진기지가 된다는 뜻이다(중앙일보 12월 16일자 사설 '주한미군 해외발진기지 변신 대책 급하다')."

어느 언론도 '제한적 수용'이라는 원칙, '주한미군의 동북아 지역분쟁 개입 시 한국민의 동의'라는 제한이 존재함을 거론하지 않았다. 합의가 있었음에도 왜 언론은 외면하고 있는 걸까. 왜 언론은 주한미군의 운용이 온전히 미국의 '독자적' 판단에 달려 있음을 당연시하고 있는 걸까. 언론의 문제일까, 아니면 참여정부의 문제였을까. 이것을 불신이라 부를 수 있다면, 불신이 계속되고 있음은 사실이다. 제거의 책임은 칼럼 정도로는 부족하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의 개정이 필요했다

불신의 근본적 원인은 합의 그 자체에서 비롯되겠지만, 합의에 앞서 국내 절차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탓 또한 근본 문제다.

지난 2006년 2월 '용산기지이전협정 위헌확인소송(2005헌마268사건)'이 계류 중이었다. 법무부가 정부의 대표로 헌법재판소에 의견서를 제출했다.

당시 법무부는 의견서에서 "용산기지이전협정 제2조 제9항 이 협정의 목적상 임무와 기능이라 함은 한미상호방위조약상의 공약을 달성하기 위한 합중국 군대의 임무와 기능을 말한다. 여기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정해진 임무와 기능이라 함은 타국이 대한민국의 행정지배 하에 있는 영토를 공격할 경우 미합중국은 자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아 이에 대응하여 무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주한미군의 이른바 전략적 유연성 개념에 따라 아시아 태평양 지역군으로 기능하는 것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 개정되지 않는 한 허용될 수 없다"고 했다.

2006년 협상 당시 미국은 '주한미군의 역외전개를 금지할 만한 조항이 없다'는 이유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개정은 불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당시 미측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제4조를 근거 삼았다.(제4조 '상호적 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 영토 내와 그 인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여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 주한미군에 대한 배치여부를 미국의 수락(accepts) 여부에 중점을 둔 일방적, 배타적 권리로 이해한 것이다. 이 전 장관은 부정하지만, 앞서 본 중앙일보 사설과 같은 해석이다.

이런 때는 이웃 '미일안보조약'이 참고가 된다. 미일안보조약 제6조는 '극동지역 유사시'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한미상호방위조약 제3조는 '태평양 지역 내 한국 또는 미국의 영토'라는 제한적 문구로 지역적 범위를 한정한다. 그래서 논란이 된다. '대북억지력'과 전세계를 향한 '신속기동군'은 다르다. '붙박이 군사기지'와 '발진기지' 또한 다르다. 그렇다면 전략적 유연성의 인정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개정을 통해야했다. 물론 참여정부는 법률적으로 볼때, 한미동맹 '목표의 변경'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법무부의 입장조차도 거스른 일방통행이 또 다른 불신의 시작이었음을 이해해야 한다.

문민통제의 대표적 실패사례

재론되어야 될 이유는 또 있다. 문민통제의 대표적 실패사례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선 이미 이 전 장관이 NSC 사무처장으로 일할 당시 NSC 사무처 행정관으로 일했고, 이후 대통령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으로 근무했던 박선원의 제법 솔직한 글이 있다(박선원, '미래지향적 동맹을 향한 긴장과 협력: 노무현-부시 정부의 관계', 역사비평 2009 봄호 참조).

첫째는 개념계획5029 논란에 대한 부분이다. "셋째, NSC는 2004년 초부터 작전계획화가 진행되어온 사실을 모르다가 2004년 말에야 사실을 인지하고 2005년 1월 작계화 중단지시를 내렸다. 이는 의사소통 부족이거나 문민통제가 유명무실함을 드러낸다. 넷째, NSC의 작계화 중단 초기에 미 국방부와 주한미군 수뇌부가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한 박선원의 논문은 한 월간지를 각주로 삼았다. 하지만 전체적 맥락에서 문제점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하다.

둘째가 전략적 유연성 협상에 대한 부분이다.
"주한미군이 필요시 외부로 나갈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되자 한국 국방부는 더 이상 논의하려 하지 않았다. 외교부가 대신 협의에 임했다." 역시나 논문은 '2009년 2월 미 국방부 복수의 전직 고위관리들과 인터뷰'라고 각주를 달았다. 이해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박선원과 이 전 장관은 당시 NSC 핵심 라인에 있었다. 굳이 월간지와 미국 국방부 전직 고위관리의 인터뷰를 근거 삼지 않아도 충분할만한 위치였다. 도리어 월간지 보도의 신빙성을, 전직 고위관리의 발언을 부정하는 쪽이 더 편했을 것이다. 때로는 역설이 진실을 말해주는 법이다. 문민통제의 실패가 곧 참여정부의 무능이다. 왜 국방부가 더 이상 논의하려 하지 않았을까. 제41차 한미 SCM의 합의대로라면 '주한미군의 증강배치'를 의미하는 전략적 유연성을 왜 거부했을까. 역시나 불신의 대상은 다른 곳에 있다.

한미동맹에 대한 비전과 가치가 결여됐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한미동맹에 대한 그의 기여는 (친미 대통령이었던) 전두환·노태우 이상이다. 그가 퇴임하는 2008년2월 현재 한미 동맹은 훨씬 강하고 좋아졌다…

노대통령은 미국·영국 다음 가는 대규모 이라크 파병에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체결, 주한미군 용산기지 이전 등정책적으로 한미동맹에 크나큰 기여를 했다. 그 기여도는 전두환·노태우 정부 못지 않다. 어떤 의미에선 그들 이상이라 생각한다(중앙일보 2008년 2월 13일자)."
마이클 그린 전 미 NSC 선임보좌관의 인터뷰 내용이다.

사실이 이러했음에도 왜 참여정부는 '반미자주'라고 비난받았어야만 했을까. 한미동맹의 가치와 비전이 결여됐기 때문이다. 어설픈 동북아균형자논쟁, 사실은 하나임에도 각기 따로 따로 진행된 용산미군기지 이전협정, LPP협정, 방위비 분담협정, 전시작전권 환수협정, 환경오염 문제, 개념계획5029 등이 이를 잘 보여준다.

주한미군이 대북억지를 위한 붙박이 군이 아니라 전세계를 향해 투사하는, 특히 동북아신속기동군이라면, 그리하여 평택기지가 세계전략차원의 미국의 발진기지라면 용산기지 이전비용은 어떻게 분담되는 게 정상적일까. 방위비 분담금 또한 어떻게 산정되는 게 정상적일까. 용산미군기지 이전협정의 미국측협상대표는 협상 타결일, 기자의 질문에 '용산미군기지 이전은 서로 다른 이유와 서로 다른 동기가 있다'고 있다. 이에 반해 우리측은 일관되게 '우리가 요구한 것이기 때문에 원인자 부담, 수익자 부담의 원칙에 따라 우리가 이전 비용을 부담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동북아균형자론은 우리가 먼저 제기했다. 개념계획5029를 작전계획5029로 격상하는 문제는 미국이 먼저 제기했다. 전략적 유연성 문제도 2005년 2월 SPI에서 미국측이 먼저 의제로 올렸다. 용산기지이전 문제도 사실은 미국측이 먼저 제기했다. 2001년 미국의 4개년 국방계획(QDR)에 따른 당연한 후속조치였다. 전략적 유연성이 몰고다니는 한미동맹의 미래, 각종 각론 정책과의 관련성 등이 충분히 확인됐어야 했다. 결국 당시 참여정부 외교안보팀들은 '포괄적, 역동적, 호혜자적 동반자관계'를 얘기하면서도 한미동맹의 미래에 대한 가치와 비전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각론은 있되, 총론이 없었다. 동북아 정세를 체스판처럼 놓고 이를 조율해 낼만한 경험과 능력이 부족했다. 불신의 씨앗을 바로 그때 싹트기 시작했다. 남 탓할 일이 아니다.

평화협정과의 관련성

마지막으로 2010년 한반도 현안인 평화협정의 문제를 거론해야겠다. 이 또한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상관이 있다.

1953년 체결된 정전협정 4조 60항은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정전협정 조인과 효력 발생이후 3개월 내에 한국으로부터의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및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문제들을 협의할 것을 이에 건의한다"고 규정했다.

그래서 보수적 입장에 선 이들은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 요구가 주한미군의 철수를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거절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돼 왔다. 평화협정 체결요구는 주한미군 철수를 노리는 정치적 공세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해온 것이다. 이런 논리는 남측에서도 마찬가지로 유지돼 왔다.

남북기본합의서, 9.19 공동성명, 10.4 남북선언 등은 '정전협정을 뛰어넘는 평화협정'을 거론한다. 스티븐 보즈워스 미 대북정책 특별대표도 지난달 평양에서 돌아온 뒤 "6자회담이 재개되면 비핵화, 새 평화체제·평화협정, 에너지·경제 지원, 관계 정상화, 동북아 안보질서 구축 등을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임동원 전 통일부장관이 지적해왔듯, 전략적 유연성의 인정이 주한미군의 성격변화를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남북 간 평화협정 체결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보수 일각에서 염려하는 주한미군의 철수를 전제하지 않고도, 주한미군의 성격변화를 바탕으로 협상을 견인해 낼 수 있는 유력한 동인이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점은 긍정적이다. 전략적 유연성 문제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자는 것만이 아니다. 이런 긍정적인 측면은 재론하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토론이 필요하고 공론이 필요하다. 불필요한 오해는 불식시키고 긍정적 측면은 강조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렇듯 전략적 유연성은 간단치 않다. 그래서 공론이 필요하다. 외교안보 핵심 관계자들이 그저 다 알아서 할 일이 아니었다. 시민의 동의를 구하고, 토론을 거쳐, 시민이 스스로 결정을 내릴 문제였다. 그런데 현실은 반대였다. 밀실외교였다.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은 비밀로 묻었다. 불신의 원인의 대한 자기성찰이 전제됐으면 좋겠다. 그 전제를 바탕으로 그 불신을 해소시킬 의무가 어느 영역에 존재한지를 다시한번 돌이켰으면 좋겠다.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토론은 좀 더 계속될 필요가 있고, 이를 통해 시민들은 좀 더 자세히 알 권리가 있다. 외교도, 한미동맹도, 시민주권을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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