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이 바뀐 뒤, 마침내 기회가 왔다.
이병규씨는 2006년부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위)에 ‘납북귀환어부 간첩조작 의혹사건’(직바-10868-1)에 대해 재심을 신청했다.
2006년 시작된 진실위의 재심사건은 4년의 세월을 지나 마침내 재심을 결정했다. 다음은 진실위의 이병규씨 사건에 대한 설명.
<진실위는 남북귀환어부 간첩조작 의혹과 관련한 7건의 신청사건에 대한 진실규명결정을 내렸다.(2006. 12.5. 태영호 납북사건, 2007. 6. 19. 강대광 간첩조작 의혹사건, 2008. 6. 3. 백남욱 간첩조작 의혹사건 등) 진실위는 2009년 3월 26일부터 동년 7월 20일까지 4개월간 국가기록원으로부터 입수한 수산업법 및 반공법 위반 판결문 상의 납북귀환어부 1028명에 대해 기본법에 근거한 진실규명 공동수행사업(지방자치단체 위탁사업)으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및 납북귀환어부 피해사실 관련 2009년, 기초조사를 실시했다.’
이중 총 415명에 대한 면담을 통해 확인된 납북귀환어부 간첩사건 관련자는 103명으로 압축했고 이들에 대한 인적사항 확인과 함께 판결문을 국가기록원으로 부터 입수해 기초사실조사를 진행했다.
진실위는 이 중 수사기관의 장기간 불법구금과 고문, 가혹행위 및 범죄사실 조작에 대한 구체적인 주장이 있는 29건의 납북귀환어부 간첩조작사건들에 대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기본법)에 의한 재심사유를 확인하기 위해 2009년 9월 8일 사전조사를 의결하고, 조사를 진행했다.
사전조사 결과 전체 29건 가운데 불법 구금 사실 및 가혹행위 개연성 등 재심사유가 확인된 납북귀환 어부 이병규에 대한 간첩조작 의혹사건 등 7건의 사건에 대해 2010년 5월 11일 직권 조사개시를 의결하고 각 개별 사건별로 사건을 분리해 조사결과를 처리키로 했다.>
진실위는 납북귀환어부 간첩조작 의혹사건 관련자 1028명 가운데 415명의 면담을 통해 103명이 간첩사건 관련자로 인정했다.
또 진실위는 이들 103명의 간첩사건 피해자 가운데 다시 47건의 판결문을 세심하게 심의한 뒤 29건의 간첩조작의혹사건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47건 가운데 일관되게 간첩혐의를 부인하고 전향을 하지 않은 사실이 명백하게 입증되는 등 간첩누명을 쓰고 살아온 이병규씨 등 최종 7건만 재심이 결정된 것이다.
이씨의 회고.
“납북귀환어부 간첩조작의혹 사건 가운데 재판 과정에서 간첩 협의를 일관되게 부인하고 이후 전향서 제출여부, 증인의 위증 여부, 수사기관 관련자의 진술, 수감생활과 사회생활에서 간첩혐의를 단 한 번이라도 인정했을 경우에는 재심에서 모두 탈락됐다. 나는 마지막 재심기회에서 이 모든 과정을 무사히 통과해 재심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진실위는 진실규명을 위해 다양한 자료와 관련자 진술을 확보했다.
이를 위해 진실위는 춘천지방검찰청 강릉지청 존안수사 및 공판기록, 국가기록원 존안 판결문, 국가기록원 존안 수용자 신분장 등의 자료를 조사했다.
또 참고인으로 법정에서 이병규씨의 간첩혐의에 대해 진술한 김흔동, 임종철, 김병기, 박수경, 정연백, 엄경식, 윤석도, 김헌기 등은 물론 보안사 당시 수사계장을 했던 서나쁜(가명) 준위까지 조사했다.
그러나 함께 수사에 참여했던 이용수, 김두수 수사관 등은 관계기관 비협조로 조사하지 못했다.
진실위 조사결과 1985년 이병규씨를 체포, 연행, 구금 당시 보안사 행위는 모두 불법이었고 심지어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과 국가보안법 위반이나 형법상 간첩혐의에 대한 수사권도 보안사는 갖고 있지 않은 점을 밝혀냈다.
이 때문에 보안사는 이병규씨와 참고인들을 연행, 조사한 후 각 조서와 송치의견서 등의 명의는 안기부 수사관 서재봉의 이름으로 작성했던 사실까지 확인했다.
<수사기록에 편철된 ‘인지 동행 보고’ 및 구속영장, 항소이유서, 고등법원의 판결문과 이병규 본인의 진술이 일치하고 있는 바,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보안사가 수사권을 위법하게 남용해 진실규명대상자 이병규를 1985년 5월 17일부터 6월 22일 영장이 발부되기 까지 37일간 영장 없이 제107보안부대에 구금되었음이 인정된다.
제107보안대가 이병규를 37일간 불법 구금한 상태에서 조사한 것은 형법 제124조 불법 체포감금죄에 해당하고,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7호, 제422호 소송의 재심사유에 해당한다.>
이병규씨는 진실위 조사당시 1985년 5월 17일부터 재판진행과정까지 보안사 수사관들의 구체적인 불법행위에 대해 치를 떨며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진술하거나 재현했다.
“1985년 5월 보안사에 연행된 이후 수사관들은 나의 간첩활동 사항들이라고 쓴 뒤 시인하라고 강요했다. 내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자, 수사관은 ‘이 새끼, 아직 맛을 못 봐서 그런가 본데, 엎드려뻗쳐!’라고 하더니 군용 곡괭이 자루를 가지고 와서 내 엉덩이를 때렸다.
살이 찢기고 피가 흥건하게 나자 그때서야 곡괭이 매질을 멈추더니 ‘너 하나 죽이는 일은 아무 것도 아니다. 네 놈을 죽인 뒤 군용 더블 빽(가방)에 넣고 바다에 던져 고기밥이 되어도 쥐도 새도 모른다.’, ‘너 하나 죽여 봤자 검찰이 우리를 수사할 수도 없다. 우리는 각하의 지시만 받지 그 외에는 신경도 안 쓴다’라고 말하였다.”
“몽둥이 구타뿐 아니라 고춧가루 물을 들이 붓는 물고문도 했다. 의자에 앉힌 채로 머리채를 잡아 뒤로 접히고 수건으로 얼굴을 덮고는 고춧가루 물을 코와 입에 천천히 들이 부었다. 숨을 참다 참다 숨이 막혀 푹하고 숨을 쉬면 매운 고춧가루가 물과 함께 코와 입을 통해 기관지를 타고 식도로 들어가면 정신이 혼미해지며 쓰러지게 된다.
그렇게 고문을 당하다 나는 이제 꼼짝없이 간첩으로 몰리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싶어 수사관이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 쏜살같이 의자에서 일어나 콘크리트 벽에 강하게 머리를 박았다. 그러자 머리에서 피가 흥건히 흘러나왔고, 기절하였다.
그리고 혀를 깨물어 자살을 시도하자 수사관이 달려들어 입에 재갈을 물리며 ‘이 독한 놈, 끝까지 불지 않는지 한 번 해보자. 확실히 쓴 맛을 보여 주겠다’면서 다시 고춧가루 물을 들이 붓는 등의 고문이 이어졌다.”
진실위는 이병규씨 사건에 대한 조사를 마친 뒤 2010년 6월 30일 제139회 진실위를 열어 진실규명을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이 사건은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던 보안사가 직권을 남용해 위법하게 진실규명대상자 이병규를 영장 없이 연행하여 구금하고, 이병규에게 고문, 가혹행위를 가하여 간첩혐의 등을 조작한 후 기소와 판결을 통해 처벌받게 한 사건이다.
조사결과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보안사 수사관들이 수사권을 위법하게 남용하여 안기부 명의로 서류를 작성하고 진실규명대상자 이병규를 1985.5.17.부터 6.22. 영장이 발부되기까지 37일간 영장 없이 보안부대에 구금하였음이 인정된다.
또 수사과정에서 진실규명대상자 이병규에게 구타, 고문 등 가혹행위를 가하여 허위진술을 강요한 사실도 인정된다.
보안사 수사관들이 이병규를 장기간 불법 구금한 상태에서 가혹행위를 가하며 허위자백을 강요하고 일부 참고인들에게도 허위 진술을 받은 사실이 확인되는 바, 이병규에 대한 판결문 상의 범죄사실 가운데 군사기밀 탐지, 일부 북한 찬양고무와 지령 수행 소요, 선동 등 범죄 사실은 조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상과 같이 진실규명 되었으므로 기본법 제4장에 따라 국가가 행할 조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국가는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국군보안사령부가 수사권을 남용하여 이병규를 위법하게 수사한 점, 수사과정에서 진실규명 대상자 이병규를 불법 구금하고 가혹행위를 가해 범죄사실을 조작하여 처벌받게 한 점 등에 대하여 진실규명대상자 이병규에게 사과하고, 진실규명자 이병규 및 그 가족의 피해와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재심 등의 화해를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진실위에서 이병규씨의 손을 들어 줬지만 형사보상금과 민사보상금 청구는 변호사를 다시 선임해 보안사 수사관들의 불법행위와 피해액수를 산정해 청구해야 했다.
형사사건 피해사건 소송을 제기한 이후 이씨가 수령한 액수는 4억300만 원에 불과했다.
이 가운데 변호사 비용으로 30%를 지급했다.
이어 진행된 민사소송은 부인 임순성씨와 3남매, 어머니, 친족, 형제자매, 함께 연행돼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한 김흔동과 임종철 등 모두 18명에 달했다.
다음은 2012년 9월 11일 이병규씨와 가족 및 피해 관련자들이 법무법인 아성을 의뢰인으로 해서 민사소송을 제기한 소장에서 밝힌 주요 내용 가운데 일부를 소개한다.
<원고 이병규 손해내역.
보안사 수사관들은 납북귀환어부라는 약점을 이용하여 원고 이병규를 간첩으로 날조함으로써 실적을 올리고 상금을 받고 진급을 하였다. 돈을 벌어 가족들을 건사하고, 자식들을 교육시켜 배우지 못한 한을 풀어 보려고 했던 이병규의 꿈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불법 구금과 고문, 장기간 수감생활을 거치며 몸도 마음도 망가졌다. 석방된 다음에도 간첩의 너울을 쓴 채, 보안관찰과 경찰의 감시, 사회의 따돌림에 시달리며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고 가족관계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국가인권위는 2011년 3월부터 10월까지 7개월간 고문피해자 기초 현황과 피해실태 파악을 위해 인권의학연구소에 의뢰해 ‘고문피해자 인권상황 실태조사’를 실시했다. 조사는 시국사건 163명, 조작간첩사건 43명, 비시국사건 7명을 대상으로 했다. 조사결과 고문피해자들이 만성적인 복합성 외상후 증후군을 높은 비율로 호소한다는 점이 밝혀졌다.
특히 간첩조작사건과 관련된 피해자들의 경우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의 증상이 보다 높다는 점이 나타났다. 주변사람들과 친인척의 외면과 배척, 국가나 사회의 지원 부재, 사회적지지 부재,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상황에서 전혀 예상하거나 대비하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고통을 경험했기에 상대적으로 보다 강도 높은 고통의 고문유형을 겪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됐다.
원고 이병규는 군사정권 시절, 공포의 대상이었던 보안대에 갖혀서,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가운데 간첩활동을 했다는 허위자백을 강요당하며 온갖 고문을 당하며 느낀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절망감은 인간의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보안사 수사관들에게 불법 연행된 1985년 5월 17일부터 구속영장이 발부된 1985년 6월 22일까지 37일 동안 불법 구금상태에서 고문을 당하고 간첩이라고 허위자백을 하고 그 내용을 직접 손으로 써야만 했던, 그 기간의 고통에 대한 위자료는 적어도 1000만 원씩 합계 3억 7000만 원은 되어야 한다.
또한 검찰에 송치된 후 공정한 수사가 진행될 것이라는 믿음은 산산이 부서지고 보안사에서 원고 이병규를 고문했던 수사관들이 참여한 가운데 검찰조사를 받아야만 했고, 칠흑같이 어두운 탄광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동료이자 친구들이 위증된 법정증언 등의 재판을 받고 14년 징역형을 선고 받은 후 항소심 재판부까지 갈 때까지 6개월 동안 혁수정을 차고 교도소에서 생활했으며, 대법원 확정판결 이후 가석방으로 출소할 때까지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처벌받아 마땅한 범죄자에게도 감옥생활은 고통스러운 것인데, 간첩으로 날조되어 감옥에 갇힌 원고 이병규가 받은 충격은 정말 엄청난 것이었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과 좌절감에 하루에도 몇 번씩 죽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악화된 건강상태는 원고 이병규를 더욱 괴롭혔다.
간첩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감옥생활을 하는 것은 더욱 힘들었다. 군사정권은 간첩으로 규정된 공안사범들에게는 폭력과 고문으로 전향을 강요하고, 운동을 금지하고, 심지어 식사까지 줄여 굶주리게 하는 등 제도적으로, 사실적으로 가혹한 차별과 불이익을 주었기 때문에 원고는 일반 제소자들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더욱 더 고통스럽게 지내야만 했다.
석방된 이후에도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고문과 장기간 수감생활의 후유증에 시달리며 감옥을 나온 원고 이병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꿈에도 그리던 단란한 가족관계와 사회생활의 복원이 아니었다.
계속되는 경찰의 감시와 보안관찰은 원고 이병규로 하여금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있음을 실감하게 했다. 막노동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간첩의 낙인으로 대한민국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하늘에 묻고 싶었다.
인생의 길이 뒤틀려버린 자녀들과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 했다. 도움을 받을 곳이 그 어디에도 없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상전벽해처럼 바뀐 세상에 물리적으로 적응하는 것도 어려웠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는 것, 신호등에 따라 길을 걷는 것도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은행 거래를 하는 것도 어려웠다.
원고 이병규는 석방된 후 재심에서 무죄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여전히 간첩누명을 쓴 채, 보안관찰과 경찰의 감시로 법적으로나 사실적으로 불이익을 받으며 살았다. 가족관계는 파괴되었고 정상적인 사회생활과 경제활동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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