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운전자 없이 달리는 자동차, 주인의 요구에 맞춰 곡예 비행까지 할 수 있는 자동차의 모습은 미래사회를 그린 영화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소품들이다. '무인 자동차’에 대한 꿈은 자동차의 개발과 함께 시작된 것이나 다름 없어서, 1920년대에도 실험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의 기술로 구현되고, 도로 위에서 실제 주행테스트가 이루어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2015년에는 미국의 5개 주 정부가 공용 도로에서의 무인 자동차 테스트를 승인했다. 미래가 성큼 다가선 느낌이다.
한국도 이러한 세계적 흐름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노력 중이다. 자율주행자동차 개발은 9대 국가 전략 프로젝트 중 하나로 선정되었고 (☞관련 자료: 미래창조과학부 보도자료 "정부, 대한민국 미래 책임질 9대 국가전략 프로젝트 선정"), 국토교통부의 경제 활성화를 위한 7대 신산업 육성 목록에도 이름을 올렸다. (☞관련 자료: 국토교통부 7대 신산업 육성) 국토교통부는 미래 성장동력 확충을 위한 투자 확대를 명목으로 자율주행자동차 예산을 2016년 195억 원에서 2017년 279억 원으로 증가시켰다.
한국에서 자율주행자동차는 미래의 먹거리를 가져다 줄 올 경제적, 기술적 측면에만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자율주행자동차가 환영 받는 것에는 경제적 측면 이외에 '안전'을 개선시킬 것이라는 기대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교통 사고는 인간의 과실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인공지능에 의한 자율주행자동차는 교통사고를 크게 줄일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에서는 자율주행자동차의 도입으로 매년 2만9000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전 세계적으로는 10년마다 1000만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정도면 21세기 가장 중요한 공중보건의 혁신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율주행자동차의 '선도 주자'인 미국 사회는 '공중보건'과 '윤리적' 측면에서 자율주행자동차의 문제를 고민 중이다. 이번에 소개할 <공중보건, 윤리 그리고 자율주행자동차>라는 제목의 논문도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미국 드렉셀 대학의 재닛 플릿우드 박사(Janet Fleetwood)는 자율주행자동차가 공중보건 이슈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공중보건의 고유한 기술과 지식, 가치, 관점들이 자율주행자동차 논의에 반영될 수 있도록 공중보건 전문가들은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관련 자료: Public Health, Ethics, and Autonomous Vehicles)
저자는 특히 '강제선택(forced choice)' 상황에서의 알고리즘에 주목했다. 예컨대 자율주행자동차가 빙판길에서 미끄러지는 등 충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주차된 차와 충돌할 것인가 혹은 보행자를 칠 것인가 하는 윤리적 선택의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가 운전을 하다 보면, 종종 복잡하면서도 즉각적 윤리적 판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들에 마주친다. 자율주행자동차도 인간 운전자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치들이 충돌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자율주행자동차가 안전성, 기동성, 합법성이 균형을 이루는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되어야 한다.
철학자 필리파 푸트(Philippa Foot)가 제시한 대표적 사고실험인 '트롤리 딜레마(trolley problem)'는 자율주행자동차 논의에서도 자주 인용된다. 이 실험은 '탈주한 트롤리가 선로에 서있는 5명을 향해 돌진하는 상황에서 당신은 선로전환기를 당겨서 다른 선로에 서있는 1명을 치는 대신 5명을 구할 것인가? 아니면 5명을 치고 다른 선로의 1명을 구할 것인가?'라는 가설적 상황을 제시한다. 저자는 이런 상황이 현실에서 자주 발생하지는 않겠지만, 자율주행자동차의 개발 단계에서부터 이러한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공리주의적 입장에서는 '5명이 죽는 것보다는 1명이 죽는 게 더 낫다'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이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적극적으로 선로전환기를 당기는 행위가 운명에 따라 일이 발생하길 내버려두는 것 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고, 서로 다른 선로에 서있는 잠재적 희생자들의 사회적 가치를 평가해서 결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를테면 나치 제복을 입은 5명과 간호사 1명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어린이와 노인들이라면 어떠한가? 아이들의 죽음은 나이든 노인들의 죽음보다 더욱 피해야 하는 것일까? 만일 다른 선로에 있는 1명이 임신한 여성이라면 본인과 태아를 합쳐 두 명의 몫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강제선택 알고리즘에서 단순한 부상자의 숫자뿐 아니라 부상의 심각성, 삶의 질에 미칠 영향까지 고려해서 우선순위를 부여해야 할까? 이러한 질문들은 끝이 없고, 사실 정답도 없다.
논문에 소개된 한 실증연구에서 설문응답자의 76%는 더 많은 보행자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자율주행자동차에 타고 있는 승객을 희생시키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했다. (☞관련 자료: The social dilemma of autonomous vehicles)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강제선택 상황에서 자율주행자동차가 승객을 희생시키는 알고리즘을 탑재하고 있다면, 응답자들은 그러한 자율주행자동차를 구입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타인은 '공리주의적 선택을 하도록 프로그래밍된 자율주행자동차'를 구입하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자신은 '승객을 우선적으로 보호하는 자율주행자동차'를 구입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정답이 있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재닛 플릿우드 박사는 공중보건 영역의 전문가들이 지금부터라도 자율주행자동차의 설계 단계에서부터 깊숙이 개입해서 형평성과 안전 등 공중보건의 가치들이 반영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덧붙여 자율주행자동차와 관련된 공중보건과 윤리 이슈들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을 재고해야 한다는 점도 지적했다.
이러한 주장은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2015년 한국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람의 수는 4621명이며, 자율주행자동차가 도입되면 이 중 많은 이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관련 자료: e-나라지표: 교통사고 현황) 하지만 이러한 명백한 편익과 더불어, 구입의 부담 능력에 따른 격차, 강제선택상황에서의 윤리적 딜레마, 운수 노동자의 일자리 같은 문제들도 동시에 제기될 것이다.
그럼에도 현재 국내의 논의는 '시장 선도', '성장 동력', '규제 완화', '경제 혁신' 등 전통적 개발 담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관련 자료: 국토교통부 보도자료 '자율주행차, 한국이 선도하자'). 국토부가 "다양한 규제 등 관련 애로사항을 선제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협력해야 할 관계부처들을 호명할 때 보건복지부의 이름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기술은 항상 새로운 편익과 함께 새로운 위험, 새로운 윤리적 딜레마를 가져왔다. 기후 온난화를 완화하는 청정에너지라고 각광받은 바이오디젤이 열대우림의 파괴와 저개발국가 식량 문제를 가져온 것이 한 가지 사례이다. 우리 사회도 자율주행 자동차를 경제발전, 혹은 공학기술만의 문제가 아니라 공중보건 이슈로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또한 이러한 새로운 기술이 가져올 윤리적 딜레마에 답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 시민적 합의가 절실하다. 현대 사회에서 과학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재앙일 수 있는데, 이걸 축복으로 바꾸는 길은 오로지 '회의하는 대중의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이라고 강조했던 故 칼 세이건의 주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 서지정보
• Fleetwood, J. (2017). "Public Health, Ethics, and Autonomous Vehicles." American Journal of Public Health 107(4): 532-537.
• Bonnefon, J.-F., et al. (2016). "The social dilemma of autonomous vehicles." Science 352(6293): 1573-1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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