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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소 후 생선·배추장사·세일즈맨·과일장사 등 파란만장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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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출소 후 생선·배추장사·세일즈맨·과일장사 등 파란만장한 삶

[홍춘봉의 광부아리랑] ㉟27년간 ‘광부간첩’ 올가미 쓴 이병규씨

이병규씨가 석가탄신일 특사로 출소하자 경찰은 이씨에게 취업을 시켜 준다는 제안이 왔다.


철도청에 정식 직원으로 취업 시켜줄 수 있다는 달콤한 제안에 취업이 봉쇄된 상황의 이씨는 살아갈 길이 막막하기에 잠시 갈등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신을 간첩으로 조작한 공권력에 의지하며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보안사에 의해 고정간첩으로 조작된 이병규씨가 지난 세월을 회고하고 있다. ⓒ프레시안

공권력의 도움이 싫어 맨 몸으로 맨땅에 헤딩 하듯 장사에 나선 이씨는 생전 처음 배운 운전면허증과 수중에는 달랑 70만 원을 가지고 장사를 시작했기에 오기가 발동했다.

“집사람이 다니던 직장에서 받은 퇴직금으로 트럭을 구입하고 남은 돈을 모두다 장사 밑천으로 털어 넣었으니 이제는 내가 악착 같이 돈을 벌지 않으면 우리 집안은 희망이 없다. 장사 경험이 없지만 경험은 쌓으면 된다. 벼랑 끝에 몰린 처지에서 이를 악물고 뛰어야 한다.”

1톤 트럭에 오징어 150상자와 고등어, 이면수 등 싱싱한 생선 80상자를 합쳐 모두 230상자의 생선을 가득 실었다.

처음 하는 장사에 이 많은 생선을 어디 가서 팔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일단 죽기 살기로 부딪쳐 보자는 생각밖에 없었다.

서울대 운동권 출신인 부평 시의원의 소개장으로 만난 노량진 수산시장 경매사 덕분에 외상으로 원가에 싱싱한 생선을 한 차 가득 싣고 나니 용기가 백배천배 났다.

이씨는 생선을 제대로 팔기 위해 당시 관광객이 많이 찾고 서울에서 오래 걸리지 않는 천안의 독립기념관을 선택했다.

천안 병천에 사는 친척 때문에 천안을 다녀온 기억도 나고 1987년 8월 15일 개관해 연간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 곳이라 독립기념관 주변의 대형식당을 찾아가면 생선을 쉽게 팔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천안 독립기념관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독립기념관 입구에 도착하자 정문을 지키는 경비원이 이씨의 트럭을 막았다.

“이곳은 잡상인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사전에 출입허가를 받지 않으면 출입이 불가합니다.”

작심하고 찾아온 첫 영업장소인데 경비원이 막는다고 되돌아가면 어느 곳에서도 장사가 힘들어진다고 판단한 이씨는 거침없이 답변했다.

“독립기념관 아는 식당에서 물건 가지고 오라 해서 왔습니다. 내가 싣고 온 물건은 생선인데 여기서 차를 오래 붙잡아 둬 상하게 되면 당신이 책임을 질 수 있느냐?”

이씨가 강하게 나오자 경비원은 차량을 통과해 주었다.

당시 시간이 오전 9시를 가리키고 있었는데 독립기념관 안에서 가장 큰 식당 앞에 트럭을 주차시켰다.

그때 문을 연 이 식당에 주인인 듯한 40대 남자가 문 앞에 서있었다.

지체 없이 이씨는 식당 주인과 흥정을 시작했다.

“사장님! 서울에서 생선을 갖고 왔는데 물건을 들여 놓으시지요”

“우리는 기존에 거래하는 사람이 있으니 필요 없어요”

여기서 포기하고 돌아서면 장사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어느새 다음 말이 튀어나왔다.

“사장님!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금방 가져온 팔딱팔딱 뛰는 싱싱한 생선이니 구경만 하세요. 안 사셔도 좋습니다.”

하면서 트럭의 포장을 벗겨 살아 움직이는 싱싱한 오징어를 보여주었다.

생선에 관심이 전혀 없던 이 식당 주인은 진짜 싱싱한 오징어를 보자 구미가 당기는 눈치였다.

지금까지 자신이 납품받은 생선은 모두 냉동 오징어와 냉동 고등어 등 냉동제품 일색이었기 때문이다.

“이거 상자 당 얼마죠?”

얼굴에 화색이 돈 이씨는 금방 되받아 치며 말했다.

“상자당 1만 2000원에 경매 받은 물건이지만 첫 거래기념으로 경매가격에 넘기겠습니다.”

물론 상자당 1만2000원도 시중가격에 비하면 절반 이상 싼 가격이지만 당시 이씨가 노량진수산시장에서 경매가로 받아온 가격은 8000원 이었다.

“그럼 20상자를 내려 주시오”

뛸 듯이 기쁜 이씨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감사합니다 사장님”을 연발했다.

이번에는 고등어를 살펴보더니 눈동자가 반짝이는 것을 보자 역시 추가 구매를 말했다.

“고등어와 갈치를 반반 섞어 50상자 내려 주세요.”

당시 이씨는 교도소에서 6년간 복역하고 나온 상태라 얼굴피부가 뽀얗고 운동으로 단련한 탓에 얼굴에 기름이 흐르는 것 처럼 보였다.

식당주인은 거래를 마치자 한마디 거들었다.

“생선장사 할 분 같지는 않은데요?”

“네 사장님, 사업하다가 하루아침에 부도가 나는 바람에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생선장사에 나섰습니다. 오늘은 경매가로 드릴 테니, 대신 사장님이 잘 아시는 근처 식당을 좀 소개해 주시지요.”

벌써 전문 장사꾼이 된 듯 했다.

“그러지요. 내가 주변에 전화로 이야기 해 놓을 테니 꼭 들려주세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언제 다시 옵니까?”

“네 3일에 한 번씩은 오겠습니다. 사장님!”

“그리고 오늘 내가 너무 싸게 생선을 샀는데 본전에 팔면 남는 게 없잖아요. 내가 20만 원 더 얹어 줄 테니 장사 잘 하세요.”

인정 많은 식당 주인은 사업실패로 생선장사를 시작했다는 이씨의 말에 돕고 싶은 마음이 커진 것이다.

“아이고 안 주셔도 되는데 아무튼 감사합니다. 사장님!”

▲탄차를 미는 광부. ⓒ김재영

이렇게 되어 고정적인 납품처를 확보한 이씨는 자상한 대형 식당 주인 덕분에 주변 식당까지 소개받아 첫날 인근식당에서 100여 상자를 추가로 판매할 수 있었다.

신이 난 이씨는 생선재고를 보자 불과 세 시간여 만에 230상자 가운데 180상자를 팔고 50여 상자만 남았다.

이번에는 독립기념관에서 가장 가까운 아파트단지로 옮긴 이씨는 차량에 달린 소형 앰프를 통해 이동수산시장을 열었다.

“자, 눈알이 말똥말똥한 생선이 1마리에 1000원!”

싱싱한 생선소리를 듣고 나온 동네 주부들이 싱싱한 오징어를 처음 보기에 오징어가 순식간에 동이 났다.

그러나 오징어는 인기가 많아 모두 처분했지만 고등어는 10여 상자가 남았다.

아파트단지서 40상자를 처분한 이씨는 땅거미가 지는 시간을 맞아 남은 생선을 처분하기 위해 천안 병천시장으로 옮겼다.

이곳에서도 앰프를 통해 생선 1마리에 500원씩 팔자 금방 동이 났다.

이씨는 인근에 사는 아저씨 집을 찾아가 장에서 산 소고기와 생선 1상자를 주고 인사를 한 뒤 인천 집으로 돌아왔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해 결산을 했다.

생선을 싸게 판매했지만 원가와 차량 기름값, 고속도로 통행료, 기타 경비를 제외하고도 55만 원이 첫날 순수입 이었다.

당시 부인이 한 달 내내 만근, 철야, 휴일근무를 해도 40만 원에 불과했으니, 매우 큰 돈을 번 셈이었다.

부인 임씨는 “여보! 우리 이렇게만 돈을 잘 번다면 금방 큰돈을 벌겠어요, 여보 고생했어요!.”
했다.

피와 땀 눈물이 배인 55만 원을 부인에게 건네주자 임씨는 눈물이 핑 돌았다.

이튿날 새벽 2시에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난 이씨는 다시 차를 몰고 노량진 수산시장에 나가 싱싱한 생선을 차에 가득 싣고 첫 장사에 성공한 천안에 내려갔다.

왕초보인 이씨는 도로가 복합한 인천에서는 엄두를 낼 수가 없어 천안의 독립기념관 주변 식당과 아파트 공사장 함바집 등을 돌며 장사하면서 하루하루 이력을 쌓아 나갔다.

새벽에 집을 나설 때는 부인이 정성껏 싸준 김밥, 슈퍼에서 600원에 구입한 싸구려 소시지, 물통을 식량으로 들고 나왔다. 생선이 다 팔리지 않으면 차안에서 잠을 자며 돈을 벌기 위해 자린고비처럼 생활하였다.

이렇게 6개월 가량 생선장사를 하자 운전도 베테랑 수준이 되었고, 돈도 제법 쌓였다.

운전에 자신이 생긴 이씨는 이때부터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가까운 인천으로 장사 터전을 옮겼다.

인천에서는 대단위 아파트단지를 돌며 생선을 팔았다.

이씨는 장사를 하면서 반드시 그날 떼어 온 생선은 그날로 처분하는 원칙을 세우고 이를 지켰다.

그래서 오후 4시까지 팔다가 남은 생선이 있으면 평소 익혀 놓았던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사는 달동네에 찾아가 “싱싱한 꽁치가 6마리가 1000원!, 자, 3마리에 1000원 하는 꽁치가 6마리에 1000원! 하니 구경들 하세요”하면서 헐값에 처분해 재고를 남기지 않았다.

이렇게 2년간 한눈 팔지 않고 열심히 장사를 하다가 배추장사를 하면 큰돈을 번다는 말에 산지에서 밭떼기로 배추를 계약하고 가락동 시장에 넘기는 장사를 시작했다.

최소 3000만 원 이상 투자해야 하는 배추장사는 잘하면 짧은 시간에 2배 이상의 이윤을 남길 수는 있지만 운이 따르지 않아 배추 값이 폭락하면 투자금을 모두 날려야 했다.

이씨는 강원도 정선과 삼척시 하장의 고랭지 배추밭을 5,500만 원에 계약하고 모자라는 2500만 원은 이자가 비싼 사채를 빌려 잔금을 치렀다.

잘 만 되면 8000만 원 투자로 1억5000만 원 이상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배추농사가 잘 되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출하를 불과 5일 가량 남기고 장대비가 쏟아지는 장마가 시작되어 이씨가 계약한 배추밭은 모두 녹아나기 시작했다.

억장이 무너질 것 같은 이씨는 인부들을 동원해 몇 푼이라도 건지기 위해 새벽부터 배추를 뽑기로 했으나 몇 시간 비를 맞은 인부들이 추위에 덜덜 떨며 일당을 2배 이상 줘도 일을 못하겠다며 돌아갔다.

배추밭에 혼자 남은 이씨는 교도소 출감 3년 뒤 억척스럽게 모아놓은 전 재산을 날리고 거액의 빚까지 지게 되자 눈앞이 캄캄했다.

“하루에 2, 3시간만 잠을 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악착같이 벌어 놓은 돈인데 이렇게 하루아침에 날리다니, 나는 왜 이렇게 운이 없는 놈인가?. 이렇게 고통 속에 어두운 삶을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지 않겠나!”

투자금 8000만 원을 날리게 된 배추밭에서 망연자실하며 서 있는 이씨는 장대비를 맞으며 별의 별 생각을 다하면서 허탈해 했다.

다시 최악의 상황에 처한 이씨는 장사할 의욕을 완전히 상실하고는 한숨을 쉬며 재기를 준비하다가 신문광고를 보고 서울 신월동을 찾아갔다.

당장 이자도 갚고 생활비는 물론 아이들 학비를 벌려면 밑천 없이 맨몸으로 돈을 버는 직업을 택해야 했다.

이씨는 이번에는 기계를 판매하는 세일즈맨이 되어 전국의 유리업자와 간판업자, 새시업자 등을 찾아가 물건을 팔았다.

이 일이 아니면 재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이씨는 그야말로 목숨 걸고 열심히 제품을 설명하는 세일즈에 나섰다.

또 다른 업자를 소개받아 발을 넓히면서 이씨는 하루에 최고 150만 원까지 버는 프로 세일즈맨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10개월 가량을 전국을 돌며 세일즈맨으로 자리를 잡을 즈음, 주변에서 빌라 건축현장의 책임을 맡으라는 권유를 받고는 다시 현장소장으로 자리를 바꿨다.

▲대통령 전두환은 부인 이순자 여사와 함께 국내 최대 탄광인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를 방문해 광부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1980년대 중반 보안사는 중앙정보부를 능가하는 파워를 갖고 있었다. ⓒ대한석탄공사

그러나 빌라의 건축현장 소장은 비교적 안정되고 편안한 대신, 급여가 200만 원에 불과해 6개월 뒤에는 다시 장사를 하기로 했다.

생선장사 경험이 풍부한 이씨는 부평시장에 새벽 3시에 나가 과일을 도매로 떼어다가 밤 12시까지 장사를 하였다.

이렇게 과일장사로 3년을 지내다가 경매로 나온 34평형 아파트를 구입하고, 둘째는 대학을 마치고 막내를 대학에 보내며 부채까지 모두 갚았다.

그렇지만 이씨는 매월 보안감찰을 핑계로 자신과 가족을 감시하는 경찰관의 눈길을 피해나갈 길인 재심의 기회를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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