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재(1948년 12월 말 이후부터의 상황)를 집필하기에 앞서 그동안 연재했던 4·3사건의 전개과정을 '요약' 하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만, 해방과 그 직후 상황에서 벽에 부딪혔습니다. 새로운 자료가 발굴됨에 따라 그간의 연재 내용에 수정할 부분이 많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주일 동안 '요약'조차 정리하지 못한 채 글을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을 때, 서울에서 발행된 신문은 조선총독부 기관지라고 할 수 있는 <매일신보>가 유일했습니다. 1920년 창간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1940년 8월 10일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됐는데, 두 신문은 1945년 11월 말 또는 12월 초에야 복간됐습니다.
해방 후 <대동신문>과 <서울신문> 등 두어 개의 신문이 창간됐으나 대개 1945년 11월 이후에 창간됐기 때문에, <매일신보>를 제외하면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조직되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신문은 <조선인민보> 뿐이었습니다.
이처럼 '신문'이라는 '1차 사료'가 턱없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부족한 신문이나마 제대로 살필 수 없었던 환경 탓에,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에 관한 서술에 일부 오류가 있었습니다.
주한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의 보고서를 꼼꼼히 살핀 바 있지만,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한 때가 1945년 9월 8일이고, 제주도에 진주한 때는 그보다 20일 후인 9월 28일이라 <미군 정보보고서>라는 '1차 사료'도 그 오류를 막지 못했습니다.
오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하다보니 2주일간이나 글을 '펑크'내었고, 해방과 그 직후 상황에 대해 '요약'은 커녕 두서없는 '장황한 설명'이 불가피해졌음을 알립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바랍니다.(필자 주)
그런데 이튿날 서울시내에 아래와 같은 내용의 전단이 뿌려졌다.
"조선 동포여!
중대한 현 단계에 있어 절대의 자중과 안정을 요청한다.
우리들의 장래에 광명이 있으니
경거망동은 절대의 금물이다.
제위(諸位)의 일어일동(一語一動)이 민족의 휴척(休戚)에 지대한 영향 있는 것을
맹성(猛省)하라.
절대의 자중으로 지도층의 포고(佈告)에 따르기를 유의하라.
8월 1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
독립운동가 여운형,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발족
여운형(呂運亨·1886∼1947)은 1945년 8월 16일 휘문중학교 운동장을 가득 메운 군중들 앞에 연설을 하면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발족됐음을 선언했다.
온건한 중도 좌파 성향의 독립운동가인 여운형은 일찍이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해 1919년 3·1운동에 관여했고, 상해임시정부 수립에도 앞장섰다. 국내로 돌아와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사장에 재임하던 1936년에는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사진을 일장기를 지운 채 게재하는 바람에 신문사가 폐간되기도 했다. 여운형은 치안유지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는데, 1944년 8월에는 '조선건국동맹'이라는 비밀 조직을 결성해 독립을 준비해 왔다.
지식인·언론, 중일전쟁 이후 일제에 노골적인 부역
일제 치하가 오래 지속되자 한때 항일 성향을 보이던 명망가들조차 미래의 비전을 찾지 못한 채 일제 말기에 이르러 대부분 좌절하거나 변절했다. 곧 새벽이 다가올 것임을 모르고, 그 직전의 짙은 어둠을 못 견딘 것이다.
특히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폭압 통치를 하자 이광수, 최남선 등은 굴복을 넘어 노골적인 친일 행적을 보였다. 오랜 세월 사대(事大)를 해오던 거대한 나라 중국이 일본에게 맥없이 유린당한 중일전쟁은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이었고, 독립은 불가능한 것이라 여겨졌을 것이다.
일제는 중일전쟁 이후 한글을 못 쓰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이름과 성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는 등 민족말살 정책을 폈다. 1938년에는 '지원병' 제도를 도입했고 일본어와 일본사를 필수과목으로 하는 '조선교육령'을 실시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이러한 일제의 정책을 적극 홍보하면서 일제에 부역했다.
한편 일제는 1941년 12월 7일, 미국 하와이에 있는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잇따라 침공하는 '태평양전쟁'을 벌이면서 제2차 세계대전에 합류했다.
처음에는 '지원병' 형식으로 조선인을 군인으로 받아들인 일제는 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병력이 부족해지자 1943년에는 '학도지원병'이라는 미명 아래 전문학교 및 대학생들을 강제로 전쟁터로 끌고 갔다(이 무렵 훗날 고려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김준엽[金俊燁]과 유신독재 체제 반대운동을 주도하다 1975년 의문의 사고로 사망한 장준하[張俊河]는 대학생으로서 강제징집 됐다. 이후 병영에서 탈출한 후 대장정을 한 끝에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던 충칭[重慶]에 도착해 한국광복군이 됐고, 반면에 전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는 혈서까지 써 가며 일제 군인이 되기를 자원해 만주의 관동군[關東軍] 장교로 임관했다).
1944년에는 아예 '징병제'를 실시해 조선의 청년들을 전쟁의 한복판으로 몰아넣었다. 일제는 전쟁 막바지에 물자가 부족해지자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제사에 쓰는 놋그릇까지 빼앗아갔다. '징용(徵用)' 당한 조선의 청·장년들이 일본 홋카이도의 광산 등지로 끌려가 치른 곤욕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러한 시절에 독립투쟁은 주로 만주 지역 등 중국에서 벌어졌다. 한반도에 남아 이른바 '민족주의자'라고 일컬어지는 유명인사들 중에는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자들이 적지 않았다.
이에 반해 여운형은 국내에 남아있는 사람 중에 손꼽히는 독립운동 지도자였다. 그래서인지 조선총독부는 패전이 다가오자 조선 민중들의 신임을 받고 있는 여운형에게 치안유지와 일본인의 신변 보장을 요청했다. 1945년 8월 15일 오전 여운형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과 회담을 갖고 '정치범 즉시 석방', '자주적인 치안유지와 건국을 위한 정치운동에 간섭하지 말 것' 등을 요구 조건으로 조선총독부의 요청을 수락했다. 그리고는 곧 건준을 조직했고, 이튿날 건준이 설립됐음을 대중 앞에 발표한 것이다.
"과도기 질서유지" 표방하던 건준, '조선인민공화국' 선언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는 1945년 8월 28일자로 작성한 '선언'과 '강령(綱領)'을 9월 2일 발표했는데, 이를 통해 건준의 의도와 목적을 살펴볼 수 있다(건준은 해방과 동시에 급하게 발족한 탓에 뒤늦게 강령을 제정한 듯하다. 8월 28일 선언문과 강령을 만들어 놓았으면서 닷새 후인 9월 2일에야 발표한 까닭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무렵 한반도의 38선 이남에 대해 미군이 진주할 것이라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이를 의식해 급조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건준은 '선언'에서 곧 다가올 미군의 점령을 의식해 "일시적으로 국제세력이 우리를 지배할 것이나 그것은 우리의 민주주의적 요구를 도와줄지언정 방해치는 않을 것이다"라고 희망했다. 또한 일본 제국주의와 결탁해 민족적 죄악을 범한 반동세력이 해방조선을 그 건설 도중에 방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이어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期)함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정권의 수립을 기함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이라는 '강령'을 발표했다(<매일신보>, 1945년 9월 3일; 한국학중앙연구원 홈페이지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클릭]을 통해 건준의 선언과 강령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건준은 '선언'과 '강령'을 발표한 지 나흘만인 9월 6일 오후 9시 경기고등여학교 강당에서 1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전국인민대표대회를 개최해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 이튿날 새벽 1시까지 4시간 동안 계속된 이 대회에서 '조선인민공화국 조직 기본법 초안'을 축조심의한 끝에 다소의 수정해 통과시켰고, 이어 전국인민대표 위원 55명, 후보위원 20명, 고문 12명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매일신보>, 1945년 9월 7일.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를 통해 <매일신보> 1945년 9월의 기사 일부를 신문 모습 그대로 볼 수 있으나, 나머지는 확인할 수 없어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자료 대한민국사>에서 재인용함).
'과도기의 국내질서 유지'를 목표로 했던 건준이 갑자기 나라(國)를 표방한 까닭은 그동안 막연하게 알려지고 있던 미군 진주가 임박해오자 이에 맞서 급히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겠다는 의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아래의 기사는 1945년 9월에 접어들자마자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지만, 그 시기가 언제인지 불분명했음을 보여준다.
위 보도에서 '머지않아'라는 형용사가 말해주듯, 언제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할 것인지는 불확실했다.
이튿날인 9월 3일자 <매일신보>에 "9월 7일 미 육군 제24군 소속부대는 조선 경성지구에 진주한다. 인천항 지역에 있는 모든 선박 및 함정은 9월 5일 18시 이후 선행(船行)이 금지된다"는 일본정부의 발표가 보도됐지만1), 간략한 내용이어서 조선 민중들은 그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조선 주둔 일본군사령부가 '미 24군의 진주가 9월 7일로 예정됐으나 기상 관계로 하루 지연돼 9월 8일로 연기됐다'고 발표한 것이 9월 6일 자 언론에 크게 보도됨으로써 미군 진주가 기정사실화됐고 그 시기가 구체화됐다(<매일신보>, 1945년 9월 6일).
건준이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발표해 '국(國)' 자를 조직 명칭에 넣은 것은 곧바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건준 발족이든 급조한 조선인민공화국이든 이는 갑작스런 해방 직후 미래를 전망하기 어려울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급박하게 돌아가던 정국 속에서 민족의 자주적인 독립국가 건설과 민주주의 정권 수립을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보는 게 합당한 이해일 것이다.
미군 점령을 앞두고 9월 6일 다급히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던 건준은 1945년 9월 14일에야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의에서 결정한 '선언', '정강', '시정방침'을 발표했다.
우선 "일본제국주의의 잔존세력을 완전히 구축함과 동시에 우리의 자주독립을 방해하는 외래세력과 반민주주의적·반동적인 모든 세력에 대한 철저한 투쟁을 통하여 완전한 독립국가를 건설하여 진정한 민주주의사회의 실현"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정강'은 "정치적·경제적으로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하고", "일본제국주의와 봉건적 잔재세력을 일소하고, 전 민족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충실을 기하며", "노동자·농민과 기타 일체 대중생활의 급진적 향상"을 위해 "세계 민주주의제국의 일원으로서 상호 제휴하여 세계평화의 확보를 꾀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정방침'으로 27개의 항목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일본 제국주의의 법률 제도 즉시 폐기 △일본 제국주의와 민족반역자들의 토지를 몰수해 농민에게 무상 분배함. 단, 비몰수 토지의 소작료는 3·7제로 함 △18세 이상 남녀 인민(민족반역자는 제외함)의 선거권 향유 △부인의 완전한 해방과 남녀 동권 △8시간 노동제 실시 △최저임금제 확립 등이었다.2)
건준, 발전적 해체 후 인민위원회 결성
건준은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하면서 일종의 행정기관인 중앙인민위원회를 언급한 바 있는데, 건준이 공식적으로 해체된 때는 1945년 10월 7일이었다.
건준은 10월 7일 오후 2시 서울 옥인정(玉仁町)에 있는 인민공화국정청(人民共和國政廳)에서 집행위원회를 열어 "조선인민공화국이 이미 탄생되었고 인민의 지지를 받았으므로 이로써 건준은 그 창생기의 거룩한 사명을 다하였다는 이유로 이의 해소를 결의"했다. 이어 10월 8일 숙명고등여학교에서 여운형 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건준 해소식이 거행됐다.3)
물론 건준이 10월 7일 공식 해체됐다고 해서 전국 각지의 인민위원회가 건준 해체 이후에야 비로소 조직된 것은 아니다. 인민위원회는 건준이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한 이후부터 조직됐는데, 1차 사료의 부족으로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이와 관련, <매일신보>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9월 1일 휘문중학교에서 열린 경성지회 상임위원회에서 조선인민공화국 경성시 인민위원을 선출했으며, 12일 오후 제1회 인민위원회를 열기로 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4)
제주도 건준과 인민위원회 발족
해방 직후 제주도의 신문 등 1차 사료가 아직 발굴되지 않은 탓에 언제 제주도에 건준이 결성됐고, 건준이 인민위원회로 재편된 때가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런데 1차 사료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채 '제주도 건준이 1945년 9월 10일 결성됐고, 건준이 9월 22일 인민위원회로 재편됐다'는 기록은 수정돼야 할 듯하다. 이는 일본에서 김봉현(金奉鉉)·김민주(金民柱)가 펴낸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자료집>(1963)과 김봉현이 쓴 <濟州島 血の歷史-4·3武裝鬪爭の記錄>(1978)의 기록에서 비롯된 것인데, 출처를 달지 않고 있어 어떤 근거로 쓴 것인지 알 수 없다.5)
제주도 건준과 인민위원회가 언제 조직됐는지, 그 무렵 정치·사회 상황이 어떠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른 지역의 건준과 인민위원회 결성 시기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을 때, 서울에서 발행된 신문은 조선총독부 기관지라고 할 수 있는 <매일신보>가 유일했다. 1920년 창간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1940년 8월 10일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되었는데, 두 신문은 1945년 11월 말 또는 12월 초에야 복간됐다.
해방 후 <대동신문>과 <서울신문> 등 두어 개의 신문이 창간됐으나 대개 1945년 11월 이후에 창간됐기 때문에, <매일신보>를 제외하면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 발족을 살펴볼 수 있는 신문은 1945년 9월 초 창간한 <조선인민보> 뿐이었다.
이처럼 '신문'이라는 '1차 사료'가 절대 부족한 탓에 전국 각지의 건준과 인민위원회가 언제 조직되었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해방 직후 부산·경남과 인천 지역에서 발간된 지방지가 남아있어 해당 지역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경상남도의 경우를 보면, 건준 경남지부가 1945년 10월 5일 대표자대회를 부산극장에서 개최해 '경상남도 인민위원회 결성에 관한 안건'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킴에 따라 건준이 인민위원회로 전환됐다.6)
경남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자, 부산지역 인사들이 10월 7일 부산시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기 위한 준비대회를 열었고, 열흘 후인 10월 17일 부산시 인민위원회 결성대회를 개최했다.7)
서울과 가장 가까운 인천시의 경우, 건준 인천시지부는 10월 11일 건준의 발전적 해체를 결정하고 인천시 인민위원회 창립준비위원회를 개최했다(이때 발표한 인천시 인민위원회의 '정강'과 '시정방침'은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8) 이어 10월 16일 인천시 인민위원회가 결성됐다.9)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인천시와 부산시의 건준이 발전적 해체를 하고 인민위원회로 재편된 날은 각각 10월 16일과 10월 17일이다. 이날들은 그동안 제주도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고 알려진 '9월 22일'보다 늦은 때이다.
당시 제주도의 행정적 위상은 일제의 '도제(島制) 실시'에 따라 부여받은, '제주도(濟州島)'라는 특이한 것이었다. 육지와 멀리 떨어진 섬 지역이라 교통이 불편한 관계로 '도(島)'라는 행정구역을 정하고 그 책임자인 '도사(島司)'에게 비교적 자율적인 행정권을 줬다. 하지만 '제주도'는 '특별한 군(郡)지역'일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제주도가 전라남도에서 분리돼 '도(道)'로 승격함으로써 제주도(濟州道)가 된 때는 1946년 8월 1일이다).
따라서 행정구역상 아직은 '군(郡)' 지역의 위상을 갖고 있던 제주도에서 부산시와 인천시보다 먼저 인민위원회가 조직됐다는 것은 맞지 않아 보인다.
일본군의 '전보문(電報文)', 생생한 1차 사료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 결성 시기를 살펴볼 수 있는 몇 가지 1차 사료가 있다.
일본 학자 츠카사키 마사유키(塚崎昌之)는 그동안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일본군 자료, 즉 제주도 주둔 제58군사령부가 조선 전체를 맡고 있는 제17방면군사령부에 보고한 '전보문'(<終戰後における朝鮮軍電報綴>) 등을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 부속도서관에서 발굴·분석해 발표한 '해방 직후 제주도의 정치 정세'10)라는 논문을 통해 중요한 1차 사료를 소개했다.
이 논문의 저자도 "일본군 전보문은 어디까지나 일본군의 주관과 관찰에 근거해 작성된 자료이다. 또 일본군이 알아차리지 못한 제주도 민중의 활동은 기록돼 있지 않다"11)라고 인정하고 있듯이, 전보문의 내용은 제주 주둔 제58군의 일방적 기록이다. 따라서 이 기록에 주로 의지해 작성한 츠카사키의 논문에는 일부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전보문은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1차 사료'이다.
이 전보문 중에는 "9월 23일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 결성대회가 각 면 대표 약 50명이 제주읍에 모여 정숙하게 실시하고 규약 결정과 임원 선임을 끝내고 결성을 종료했다"라는 기록이 있다.12) 다른 1차 사료로써 수정되지 않는 한, 제주도 건준은 1945년 9월 23일에 결성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한편, 1945년 10월 10일자의 한 언론은 미군정청 법무국 관리인 김영희의 입을 빌어 제주 상황을 전하고 있는데, 김영희는 '지난 일요일에 법무국장 우달 소좌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갔다. 제주도의 행정기관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으며 치안상태는 극히 평온했다. 도사(島司) 외 유림(儒林), 건준(建準) 등과 회견하고 변호사 최원순, 양홍기, 박종훈씨 3인에게 지방법원 사무를 임시로 위촉해 도내 치안을 맡겼다'고 밝혔다.13)
기사의 내용 중 '지난 일요일'을 살펴보니 10월 7일이고 '그보다 앞선 일요일'은 9월 30일이다. 그런데 앞서 츠카사키 마사유키가 소개한 9월 30일자 '전보문'에는 "금일 법무국장, 도청 방문. 조선인 변호사 3명을 각각 판사, 검사로 임명했다"라는 기록이 있다.14)
위 신문 보도와 일본군의 전보문을 비교해 보면, 미군정청 법무국장 우달이 제주도를 시찰한 때는 1945년 9월 30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제주도는 아직 인민위원회로 개편되기 전의 건국준비위원회 시절이었던 것이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제주도 건준이 1945년 9월 10일 결성됐고, 건준이 9월 22일 인민위원회로 재편됐다'는 통설과 달리, 제주도 건준은 1945년 9월 23일 조직됐고, 건준이 언제 인민위원회로 재편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9월 30일까지도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조직되지 않았다.
당시 행정구역상 제주도의 상급기관인 전라남도에서 언제 건준과 인민위원회가 발족됐는지를 보면 제주도의 상황을 엿볼 수 있을 텐데, 광주·전남 지역에는 1945년 10월 초까지도 지방신문이 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사실관계를 알 수 없다.
해방 직후 건준과 인민위원회에 대해서는 향후 1차 사료의 발굴과 학계의 연구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각주
1) <매일신보>, 1945년 9월 3일(국사편찬위원회, <자료 대한민국사 Ⅰ>(1968), 35쪽에서 재인용).
2) <매일신보>, 1945년 9월 19일.(국사편찬위원회, <자료 대한민국사 Ⅰ>(1968), 99~100쪽에서 재인용)
3) <자유신문>, 1945년 10월 9일(국사편찬위원회, <자료 대한민국사 Ⅰ>(1968), 208쪽에서 재인용).
4) <매일신보>, 1945년 9월 11일(국사편찬위원회, <자료 대한민국사 Ⅰ>(1968), 89~90쪽에서 재인용).
5) 필자는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와 <濟州島 血の歷史-4·3武裝鬪爭の記錄>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1990년 6월 일본으로 가서 도쿄에 살고 있던 김민주와 오사카에 살던 김봉현을 잇따라 만났다. 먼저 김민주와 이틀간 함께 지내며 1박2일 동안 취재했고, 곧 오사카로 가서 주 저자인 김봉현과 사흘간 집중적인 인터뷰를 했다. 김봉현은 한림중학원(한림중 전신)과 제주제일중학교(오현중 전신)에서 역사를 가르쳤으며 건국준비위원회에서도 활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김봉현은 필자의 거듭된 질문에도 자신이 일본으로 간 시점을 밝히길 거부했다. 책의 신뢰도가 떨어질까 우려하는 태도가 역력했다. 그런데 김민주 등 몇몇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김봉현이 일본으로 건너간 시점은 1947년 여름경이나 늦어야 1948년 2월경 제주를 떠났다. 김민주는 조천중학원 학생으로서 4·3무장봉기 발발 후 입산했다가 1949년 4월경 붙잡혀 인천소년형무소에 수감됐는데,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의해 옥문이 열리자 일본으로 피신했다. 두 사람의 약력을 거론하는 까닭은 4·3연구에 워낙 큰 영향을 끼친 이들의 책에 대해 설명하기 위함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책을 주도적으로 쓴 김봉현은 4·3무장봉기 발발 전에 일본으로 떠났기 때문에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의 내용은 대개 일본으로 피신해 온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쓰여진 것이다. 김봉현은 증언자를 만나기 위해 홋카이도까지 갈 정도로 집필에 공을 들였다고 말했다. 김봉현은 제주에서는 당대 최고의 역사학자였다. 그는 일제 때 일본 관서대학과 명치대학에서 역사학과 지리학을 공부했노라고 말했다. 그는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를 쓰기 3년 전인 1960년에 제주도 개국설화부터 일제 말기까지를 꿰뚫는 <제주도역사지(濟州島歷史誌)>라는 통사를 출판해 향토사 연구에 선구적인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아무튼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는 좌익적 시각에 편향돼 있고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팩트'만을 놓고 볼 때는 매우 사실에 가깝다. 일례로 "○○지역에서 적 수백 명을 섬멸했다"는 식으로 표현한 부분 등을 추적해 보면, 날짜에 약간 혼선이 있고 숫자에 과장이 있을지언정 해당지역에서 그러한 사건이 있었음을 대부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책은 4·3의 참혹상을 처음으로 알렸을 뿐만 아니라, 단지 증언을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사건의 거의 모든 전개과정을 짚어 갔다. 지금까지도 무장대 활동상이나 사건 전개과정을 파악하는데 여전히 유효한 역작이다. 하지만 제주도 건준과 인민위원회 발족 시기에 대한 기술은 오류이다.
6) <민주중보>, 1945년 10월 6일(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부산민주운동사>(1998), 80쪽에서 재인용)
7) <민주중보>, 1945년 10월 8일 : <민주중보>, 1945년 10월 18일(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81쪽에서 재인용)
8) <대중일보>, 1945년 10월 14일(인천민주평화인권센터, <인천민주화운동사 연표>, 2014, 4~5쪽에서 재인용).
9) <대중일보>, 1945년 10월 18일 : <자유신문>, 1945년 10월 21일(인천민주평화인권센터, 앞의 책, 5~7쪽에서 재인용).
10) 츠카사키 마사유키(塚崎昌之), <해방 직후 제주도의 정치 정세>, <한국민족운동사연구 53>(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7. 12.)
11) 츠카사키 마사유키, 앞의 논문, 248쪽.
12) 츠카사키 마사유키, 앞의 논문, 246·272쪽.
13) <조선인민보>, 1945년 10월 10일.
14) 츠카사키 마사유키, 앞의 논문, 247·273쪽
'김종민의 다시 쓰는 4.3'은 <프레시안> 기사 교류 중인 <제주의 소리>와 동시에 연재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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