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규씨는 교도소의 비좁은 감방 안에서 운동으로 매일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열심히 체력을 다졌다.
비좁은 공간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운동을 생각한 그는 앉았다가 일어서기, 벽에 발을 대고 팔 굽혀펴기, 물구나무 서기 등 하루에 수천 번 이상을 하며 재기를 준비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씨와 같은 처지에 놓일 경우 한탄과 한숨만 쉬다가 몸과 마음이 심각하게 퇴보하면서 수감생활을 마치면 병자 같은 병약한 사람이 되기 십상일 수 있다.
그러나 의지가 강하고 위기에 처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는 몸부터 단련해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상황판단이 그를 변화시킨 것이다.
이런 한편에서 이씨는 함께 수감된 문익환 목사로부터 따뜻한 격려와 위안의 말을 듣기도 했지만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인물들이 스쳐 지나갔다.
법정에서 한 위증 때문에 자신이 간첩으로 몰려야 했고 옥살이를 하는 것은 물론 사회에 나가서도 이제는 취업도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들면서 인생의 수렁에 빠진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씨는 매일 밤 “내가 출소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를 죄인으로 만든 광업소 위증자들을 모두 죽여 버리고 말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를 갈았던 것이다.
이런 생활이 3년여가 지나자 이씨의 마음에도 차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전주교도소에서 문익환 목사, 신영복 교수, 김남주 시인의 고결한 말씀과 세계사를 비롯한 인문 교양서적을 읽으면서 시국사범으로 수감생활을 하고 있는 대학생들과 토론도 펼쳤다.
이러면서 복수와 증오의 서슬 퍼런 응어리도 차츰 풀어지고 용서와 관용의 따스한 가슴으로 자신도 모르게 바뀌어 갔다.
“위증한 동료들도 보안사에 끌려가 협박과 고초를 겪다가 어쩔 수 없이 위증을 했을 것인데 내가 그들에게 복수를 한다고 응어리진 가슴이 풀어질 일도 아니고 어리석은 복수 생각을 털어 버리자”
이씨가 보안사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된 채 신문과 방송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뒤 재판을 거쳐 교도소에 수감되어 생활하는 동안 이씨의 본가는 물론 처가 등 친인척들의 집안도 풍비박산이 났다.
강원도 홍천이 고향인 이씨의 장인은 사위가 장성광업소 소요사태를 주동한 고정간첩으로 검거돼 수감됐다는 언론 보도이후 매일 술독에 빠져 살았다.
고향에서 간첩사위의 집안이라는 수근거림이 계속되자 장인은 경기도 화성으로 이사했지만 이곳에서도 간첩집안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녔다.
자존심이 강하고 매사가 분명했던 장인은 사위는 절대 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을 딸에게 전해 들었지만 이미 국가와 사회가 집안을 간첩의 집안으로 매도했으니 방법이 없었다.
결국 장인은 이씨가 구속된 지 2년도 지나지 않은 1987년 1월 매일 술로 지새다가 57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이씨의 모친도 경기도 광명시에서 간첩의 어머니라는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지만 남들이 수군거리거나 손가락질 하면 알지도 못하면서 간첩집안이라고 노발대발하며 언성을 높이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이병규씨의 회고.
“보안사에 의해 탄광촌 고정간첩으로 언론에 보도된 이후 집안은 풍비박산 났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지만 홀 어머니는 주변의 손가락질과 수근대는 것을 참지 못했다. 장인은 교도소에 수감된 이후 3년 만에 홧병으로 돌아가셨다. 동생은 물론 처가 집안과 모든 일가친척이 간첩의 집안으로 소문나며 취업도 직장생활도 심지어 사회생활도 정상적으로 할 수 없었다.
한 명의 간첩이 조작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해를 당하고 말 할 수 없는 고통과 차별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지 보안사 수사관들이 관심이나 있었는지 참담했다. 누명을 벗기 까지 교도소 생활을 마치고 나와서도 공권력의 사찰은 20년 이상 계속되었다. 꿈 많고 행복했던 30대에 간첩으로 몰려 교도소에서 암울하게 살아야 했던 나의 인생은 무엇으로 보상 받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나마 쥐꼬리만큼의 보상금도 정권이 바뀌면서 항소를 통해 대폭 낮춰 버렸고 재심에 도움을 준 변호사를 대검찰청에서 조사해 사법처리 하는 박근혜 정부에 분노할 기운마저 상실했다.”
부인 임순성씨는 수 십년 숨겨온 속내를 짧게 밝혔다.
“남편이 간첩으로 검거됐다는 언론 보도이후 친정집도 항상 초상집 같았다. 자존심이 무척 강하신 친정아버지는 동네에서 수군거리는 것이 싫다고 홍천에서 경기도 화성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사위가 간첩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자 매일 술독에 빠져 살았다. 건강했던 분이 1987년 1월 세상을 떠나셨다. 남편이 구속된 이후 자녀들과 생존을 위해 식당에도 나가고 파출부 생활도 했다. 경기도 광명으로 이사해서 파출부 생활을 하다가 생활이 힘들어 인천으로 옮긴 뒤 사촌오빠의 소개로 식기제조회사에 취업했다.
공장에서는 작업시간 내내 물기에 젖은 작업복을 입고 악취가 날 정도로 열악한 조건에서 근무했지만 이를 악물었다. 야근과 주휴일근무를 밥 먹듯 했지만 월급은 40만 원을 겨우 넘길 정도였다. 남편이 석방될 때까지 근무시켜준 공장이 고맙기만 했다. 나중에 재심을 거쳐 국가에서 손해배상금을 받았지만 친정 아버지 등 친정에 대한 보상은 단 한 푼도 없었다.”
교도소에서 이씨는 억울한 수감생활을 했지만 교도소에 함께 수감했던 양심수들의 도움으로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민가협)와 국제 엠네스티에서 매월 100달러를 지원 받아 간식비와 교양서적 구입비로 요긴하게 사용했다.
당시 교도소에서 다른 수감자와 보던 책을 교환해 보면 징벌을 주는 관례가 있었다.
말이 좋아 독방이지 징벌방은 햇살을 전혀 볼 수도 없지만 습기도 가득한데다 어두컴컴한 독방에서 며칠을 지내는 것은 사람을 미치도록 하는 것처럼 힘들게 하는 징벌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를 모르고 다른 양심수와 책을 교환해 보다 적발된 것을 핑계 삼아 독방에 감금하려 하자 이씨는 빵 봉지로 만든 줄을 이용해 감방 문을 열면 자동으로 목이 조여 질식사 하는 장치를 하는 바람에 이 일을 계기로 교도관들은 이씨에게 징벌을 주지 못했다.
이씨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 중의 하나는 전향서 강요였다.
법무부와 경찰을 통해 이씨에게 전향서 요구를 숱하게 했지만 이를 거부하자 이씨 부인은 물론 이씨의 어머니를 현혹해 전향서를 써야 사회에 나와도 취업이 가능하고 사회생활에 지장이 없다는 식으로 호도했다.
이런 전향서 강요는 이씨가 교도소를 나오는 날까지 이어졌고 교도소를 나온 이후에도 중단되지 않았다.
마침내 1991년 5월 25일, 부처님 오신 날 특사로 이씨는 석방되었다.
죄도 없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죄인이 되었지만 석방이라는 단어는 이씨에게 새로운 희망이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랑하는 부인과 자녀들, 부모형제를 항상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보안사 수사관에 의해 체포 영장도 없이 불법 연행된 지 6년 20일 만에 악몽과도 같았던 보안사 고문과 폭행에서부터 강릉구치소와 서울구치소를 거쳐 대전교도소와 다시 전주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마감한 것이었다.
출소하는 날 교도소 문을 나서자 이 세상에서 그토록 보고 싶고 사랑하는 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여보! 고생 많았어요”
뜨거운 포옹을 하며 이씨 부부가 눈물을 흘리는 뒤편에는 그러나 인천 서부경찰서 대공과 직원이 대기했다.
모범수로 선정돼 교도소에서 석방됐지만 이씨는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보안감찰 대상자로 낙인 찍혀 24시간 검찰과 경찰의 사찰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이씨는 인천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이제 나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이 한 몸 바쳐야 겠다”고 굳은 각오를 했다.
그러나 인천의 집에 돌아왔지만 5식구가 사는 집은 반 지하 사글세방에 8평 규모의 방 2개짜리였다.
특히 사랑하는 부인은 철분과 악취가 심각한 작업장인 양식기 생산공장에서 근무하고 있어 몸이 엉망이었다.
그러나 가진 재산이 한 푼도 없고 특별한 기술도 업는데다가 이제는 고정간첩이라는 올가미까지 씌워져 자신을 받아줄 회사가 단 한곳도 없다는 사실에 눈앞이 캄캄했다.
이튿날 아침 부인에게 시내버스 차비 몇 푼을 받아 시내버스를 타고 인천항으로 나갔다.
이어 소형 배를 타고 작약도로 발길을 옮긴 이씨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한적한 해변에 죽치고 앉아 바다를 응시했다.
그리고 지난 6년간 가슴에 묻어 두었던 울분을 모두 토해냈다.
“야!, 우, 우, 와, 아악! 우후훅!”
눈물과 탄식이 나오고 한 맺힌 절규가 자동적으로 나오는 시간이 계속되었다.
자신의 처지와 신세를 생각하고 가족과 집안의 상황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내가 전생에 무슨 잘못이 있다고 북한에 피랍된 전력으로 인해 간첩으로 몰려 억울하게 교도소 생활을 하고 이제는 가족들 생계를 위해 취업도 못하게 생겼으니 어찌 살아야 하나!”
하루 종일 점심도 굶은 채 바다를 바라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했지만 뚜렷한 방책이 나올리 없었다.
“나 때문에 사랑하는 마누라가 6년째 저 고생을 하고 있는데 사회에 나왔으면 빨리 돈을 벌어 마누라를 더 이상 고생시켜서는 안 되는데. . . ”
계속 고민을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고 온갖 잡념과 공상만 떠올랐다.
그렇게 드넓은 바다도 그러나 이씨의 괴롭고 답답한 가슴을 달래주지는 못했고 밀려오는 파도는 잡념만 날려버릴 뿐이었다.
그러면 다시 바다를 향해 “내 인생이 왜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었는가?”하는 생각이 들어 고함을 지르며 울부짖기도 했다.
파도가 스트레스를 풀어 주는 역할을 한다지만 지금의 이씨에게 파도는 가슴에 쌓인 응어리를 분출하며 소리치는 목소리를 그저 흡수하는 역할에 그쳤다.
“야, 이 개 같은 세상아! 이제 나에게 살길을 마련해 달라!, 아, 아, 야 , 야 , 야!”
목이 터져라 고함을 계속 지르자 가슴에 고였던 응어리가 다소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다시 현실을 생각하면 답답한 가슴에 울분이 쌓였다.
미칠 것만 같은 마음에 당장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사랑하는 부인과 자녀들에게 씻지 못할 죄를 짓는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작약도에 석양이 곱게 물 들자 이씨는 마음을 추수린 뒤 다시 배를 타고 인천항을 거쳐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작약도에 나가 똑같은 공상을 하며 미친 사람처럼 고함을 치다가 하늘을 향해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이어 다음날에도 작약도에 출근했지만 앞날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동이 트면 아침을 먹고 곧장 작약도로 출근하는 일과를 시작한지 어느덧 20일째가 되었다.
이날도 작약도에서 서해바다를 바라보며 미친 사람처럼 소리도 쳐보고 이런 저런 구상을 하다가 머리에 번쩍하는 것이 떠올랐다.
“그래, 이제 기동성이 있어야 한다. 장사를 하든 무엇을 하든 이제는 운전면허가 생존에 절대 필요하다. 당장 운전면허부터 취득하자.”
이러한 생각이 들자 이씨는 해가 중천에 있었지만 새로운 목표와 꿈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보! 나 내일부터 운전학원에 나가 운전을 배울 뒤 운전면허를 따서 장사를 하겠다.”
이씨는 운전학원에 나사 아침부터 열심히 학과시험 공부도 하고 코스와 장거리 등 면허취득에 필요한 내용을 누구보다 악착 같이 배우고 익혔다.
이런 열정과 극성 덕분에 이씨는 학원강습 등록 20일 만에 1종 보통 운전면허를 딸 수 있었다.
고시에 합격한 것처럼 기분이 들뜬 이씨는 부인에게 자신 있게 말했다.
“여보! 이제 내가 장사를 해서 돈을 벌테니 당신은 당장 회사를 그만 두시오!”
이씨는 부인의 퇴직금 350만 원 가운데 자신이 교도소에서 단식투쟁으로 만들어진 시영아파트 12평형 임대 보증금 180만 원을 내고 남은 돈 가운데 100만 원으로 1톤 트럭 할부 보증금을 납부했다.
며칠 후 주문한 1톤 트럭이 출고되자 집 주변에서 간략하게 주행연습을 한 뒤 이튿날 새벽 2시 차를 몰고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왕초보인 이씨는 경인고속도로에 접어드는 시점부터 실수를 연발하며 자칫 사고를 유발할 뻔 했다.
5톤 대형트럭을 몰던 운전기사는 갑자기 이씨의 차량 앞에 차를 새운 뒤 “야 이 자식아! 죽으려면 혼자 죽지, 왜 남까지 죽이려고 그따위로 운전하는 거야!”하며 노발대발했다.
이씨는 머리를 숙이며 “죄송합니다. 오늘 첫 운전이라 서툴고 몰라서 그렇습니다.”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어렵게 노량진 수산시장에 도착했다.
다행히 이씨는 교도소에서 알게 된 양심수의 소개장을 받은 탓에 노량진 수산시장의 해당 코너를 찾아갔다.
소개장을 읽어본 수산시장 상인은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 언제든지 저를 찾아오세요. 제가 적극 도와드릴테니 열심히 해 보세요”하며 힘을 실어줬다.
이 말을 들은 이씨는 안도와 함께 장사 밑천이 적은 돈을 의식하며 어렵게 말을 이었다.
“돈이 70만 원 밖에 없는데 70만 원 어치만 실어 주세요”
“무슨 말씀이세요. 돈을 나중에 팔아서 갚으면 되지 신경 쓰지 마시고 제가 싱싱하고 잘 팔리는 물건으로 드릴테니 가져가세요.”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생전 처음 본 이 상인은 이씨의 1톤 트럭에 오징어와 꽁치를 비롯해 자반과 생고등어, 이면수 등 수십가지의 생선을 가득 실었다.
경매 받은 가격 그대로인 수준인데 그 가격을 정상 가격으로 받으면 최소 300만 원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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