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원혼들의 원통함이 다소 누그러졌을까. 4.3흔들기, 4.3문제 해결의 발목을 잡았던 이명박, 박근혜 보수정권 10년의 종말을 예상한 때문이었을까.
매년 피눈물 같던 빗줄기를 뿌려대던 날씨도 이날은 말끔하게 개었다. 69년 전 광풍이 휘몰아쳤던 한라산 중산간 자락에는 봄바람이 휘감았다. 과거 얼어붙었던 평화와 인권의 기운이 봄바람에 녹아 이 땅에 충만하기를 기원하는 듯 했다.
이명박, 박근혜 보수정권 10년 동안 대통령의 4.3추념식 참석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정부를 대신해 참석한 최고위 인사는 ‘4.3희생자 재심사’ 추진으로 유족과 도민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던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국무총리)이었다.
황 권한대행은 “희생되신 분들의 뜻을 기리고 유가족 분들의 아픔을 치유하는데 노력하겠다”고 했지만, 추도사의 절반 이상은 제주 관광산업 재도약 및 제2공항, 新항만 건설 지원 등을 약속하며 국민화합과 통합만을 강조해 진한 아쉬움을 남겼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위를 달리며 차기 대권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평가되는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안희정, 이재명 후보가 불참한 데 대해 유족들은 아쉽다는 반응을 보였다.
제69주년 4.3희생자추념식이 4월3일 오전 10시 행정자치부 주최, 제주도 주관으로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공원에서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을 비롯해 원희룡 제주도지사, 신관홍 제주도의회 의장,이석문 제주도교육감, 유족 등 1만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엄숙하게 봉행됐다.
추념식에 앞서 오전 7시30분에는 유족 등 3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식전 제례가 진행됐고, 오전 9시10분부터는 위령제단에서 불교, 원불교, 기독교, 천주교 등 4대 종단 성직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종교 추모의례가 진행되기도 했다.
올해도 4.3유족들과 관련 기관·단체에서 요구했던 4.3의 노래 ‘잠들지 않는 남도’는 합창되지 않았다. 대신 해병대 제9여단 군악대의 반주로 ‘빛이 되소서’가 합창됐다.
이날 추념식에는 5월9일 치러지는 19대 대통령선거와 맞물려 여·야 지도부는 물론 대권주자들이 여럿 참석했다.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 정의당 심상정 대표 등 대권주자들이 바쁜 일정을 쪼개 4.3민심 잡기에 나섰다.
국회 원내 제1당이면서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도 1위를 달리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를 비롯해 안희정, 이재명 후보는 불참했다. 이들은 막판까지 참석 여부를 놓고 일정 조율에 나섰지만 오후 2시 마지막 경선일정(서울·강원·제주) 때문에 끝내 불참했다.
정당대표로는 4.3과는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는 추미애 민주당 대표를 비롯해 정우택 자유한국당 대표 권한대행 및 원내대표가 참석했다. 바른정당에서는 정병국 전 대표가 참석하는 등 여·야 지도부들은 4.3문제 해결에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입을 모았다.
위령제가 진행된 한라산 자락은 구름 한 점 없을 정도로 맑았다. 유족들은 이 같은 따스함에 과거 얼어붙었던 평화와 인권의 기운이 해빙되어 널리 퍼져나가길 기원했다.
◇ 양윤경 유족회장, 황교안 대행 면전서 “이 정부에서 희생자 심사 멈춰” 직격탄
양윤경 제주4.3유족회장은 인사의 말씀을 통해 “4.3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용서와 화합의 정신이 필요하다”며 가해자의 진심어린 사과와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용서와 관용이 선행돼야 한다. 대승적 차원에서 화합을 추구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황교안 권한대행 면전에서 “정부는 수년째 4.3희생자 결정을 미뤄오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4.3희생자 결정을 하는 4.3위원회 위원장이 바로 황교안 대행(국무총리)이다.
양 회장은 이어 “암울했던 과거사 청산을 위해서는 인권침해의 중대과실을 범한 국가가 피해자에게 법적인 배·보상의 의무를 다할 것”을 요청했다. 또 “4.3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미국의 책임을 묻는 작업도 시급히 진행돼야 한다”면서 4.3에 대한 미국의 책임론을 공식 제기했다.
원희룡 도지사는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었던 4.3은 이제 화해와 상생의 상징이자 과거사 청산의 모범으로 승화되고 있다”며 제주도민들의 4.3해결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특히 4.3발발 70주년을 1년 앞둔 올해는 4.3기록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노력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4.3희생자에 대한 배·보상 문제를 비롯해 4.3희생자 및 유족 심의·결정 상설화, 4.3수형인에 대한 명예회복, 4.3행방불명인에 대한 유해 발굴 등의 과제를 제시한 뒤 정부 차원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당부했다.
신관홍 의장도 “희생자·유족의 진정한 명예회복을 위한 배·보상과 희생자 유해발굴에 대한 정부의 지원, 교육을 통한 4.3평화인권 고양, 4.3추념일을 공휴일로 지정해 4.3의 의미를 기리는 등 70주년을 맞아 2단계 과제 해결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4.3해결의 지향점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청산이 이뤄지지 않는 역사는 퇴행한다”며 “제주도의회는 4.3특위를 재가동시켜 이 같은 중요한 4.3관련 현안들을 해결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정부를 대표해 참석한 황교안 대통령권한대행은 추념사를 통해 “4.3 희생자 영전에 머리 숙여 애도의 뜻을 표하며, 삼가 명복을 빈다”며 4.3영령들 앞에 고개를 숙였다.
이어 “정부는 지금까지 제주도민과 함께 4.3사건의 진상규명, 희생자와 유가족의 명예회복, 추모사업 추진 등에 노력해왔다”며 “지난 2014년부터는 추념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해 정부 차원의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앞으로도 희생되신 분들의 뜻을 기리고 유가족 분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데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4.3관련 내용은 여기가 끝이었다. 그것도 지난해 추념사 내용의 재탕 수준에 그쳤다. 추념사의 절반 이상은 제주관광산업 지원 약속과 최근 대통령 탄핵에 따른 갈등 국면을 의식한 듯 국민화합을 당부하는데 할애했다.
황 권한대행은 “제주는 2015년도 경제성장률과 민간소비증가율이 전국 17대 시·도 가운데 1위를 기록하면서 경제적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최근 국내외 여러 상황에 따라 어려움에 직면한 제주관광이 다시 도약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4.3과는 무관한 안보, 경제의 어려움을 거론하며 국가적 화합과 통합을 강조하기도 했다.
황 권한대행은 “우리나라는 지금 안보,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특히 북한의 무보한 도발책동이 계속되는 가운데 최근 일련의 사태로 확대된 사회적 갈등과 분열 양산도 심각하다”며 “이를 극복하는 길은 국민적 화합과 통합으로 국가역량을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제주도민들이 보여온 화해와 상생의 정신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희망의 에너지’가 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며 다시 한 번 4.3희생자 영령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는 것으로 추념사를 마무리했다.
황 권한대행의 추념사를 끝으로 ‘4.3의 평화훈풍! 한반도로 제주로’를 주제로 한 추념식이 끝나자 행사장을 가득 메운 4.3유족들은 화창한 날씨 속에도 헌화와 분향을 하며 69년 전 영문도 모른 채 스러져간 4.3영령들을 위무하며 영면을 기원했다.
국가추념식으로 치러진 이날 위령행사는 제주뿐 아니라 서울과 부산에서도 분향소를 설치하는 등 전 국민적 추모의 정을 모아내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4월22일 도쿄에서 4.3추모행사가, 4월23일에는 오사카에서 ‘재일본 4.3희생자위령제’가 열린다.
한편 이날 추념식 진행 과정은 KBS제주방송총국을 통해 30분간 전국으로 생중계 됐다. 제주MBC, JIBS, 제주KCTV는 도내 생중계 방송을 통해 69주년 4.3희생자추념식 전 과정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제주의소리>도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생중계했다.
프레시안=제주의소리 교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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