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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치 한 손의 시(詩)를 부르는 홍천 5일장 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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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치 한 손의 시(詩)를 부르는 홍천 5일장 봄 풍경

[서정욱의 아날로그 향기찾아 떠나는 시골장터 여행] 잊혀져가는 흥겨운 풍경

넉넉한 인심 느끼는 홍천 5일장…빗방울 속 봄 풍경

홍천 버스 터미널에서 내렸을 때 버스정류장 밖에는 비가 뜨문뜨문 내리고 있었다. 대합실 시계는 26일 오후 1시를 알렸다. 미처 우산을 준비 못한 나는 버스정류장 입구 한 마트에서 우산을 하나 구입해서 썼다. 아직은 굵직한 비가 내리지는 않았다.

5일장이 열리는 장터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붐비지 않았다. 한 10여 분을 걷자, 5일장이 열리는 장터가 보였다. 장터 입구에는 대파를 실은 1톤 트럭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홍천 5일장이 열리는 장터 입구 풍경. ⓒ프레시안(서정욱)

닷 세 만에 열리는 홍천 장날은 봄비가 부슬부슬 장터를 적시고 있었다. 좌판이 골목 마다 펼쳐졌고, 천막 지붕에서는 빗물이 송글송글 맺혔다.

나는 5일장이 열리는 읍내 장터를 걸었다. 낯설지 않은 길이다. 벌써 20년 전이다. 그때와 크게 변한 게 없는 시장 골목에는 홍천에서 나는 메밀로 부침을 부치는 아주머니의 기름이 타다닥 튀는 소리가 먼저 들려온다.

그리고 해발 1000미터 내면 고랭지 마을이나 인근 골짜기 어느 마을에선가 호미를 든 홍천사람들이 막 캐 왔을 봄 고들빼기 냄새가 물씬 풍겼다.

▲방금 쪄낸 따끈한 족발의 하얀 김이 사람들을 부르고 있다. ⓒ프레시안(서정욱)

시장 안에는 봄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막 건져 낸 구리빛 족발에서 나오는 김 때문인지 따뜻하다. 구수한 국물 맛이 깊이 밴듯한 수북이 쌓인 족발에서 나오는 김이 마치 비온 뒤 홍천강물 위로 떠오르는 봄 안개처럼 얼마나 강하게 올라오는지 사고 파는 사람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또 한 골목을 꺾어 들어가자 한 할머니가 겨우내 광 속에 숨겨놨던 들기름 두 병과 홍천에서 만 볼 수 있는 굵은 산더덕을 좌판에 놓고는 싸게 줄테니 사라며 손짓을 하신다.

“많이 파셨어요. 할머니.”
“비가 와서 그런지 손님이 영 없어!”
할머니는 애써 ‘중국산’이 아니라며 2만원 팔던건데 1만5000원에 가져가라며 내 마음을 붙잡으신다.

홍천 더덕은 냄새가 강하다. 그런데도 나는 더덕을 사드리지 못해 괜히 미안했다.

▲동해바다에서 온 싱싱한 꽁치와 고등어를 파는 모습. ⓒ프레시안(서정욱)

그러다 사거리 모퉁이에서 만난 등푸른 꽁치와 고등어를 파는 좌판을 보고는 할머니 생각이 다시 났다.

어릴 적 봄나물을 팔러 5일장을 보러 나가신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먹고 싶은 꽁치 한 손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어둠 속에서 하루가 지쳐 보이는 어머니는 내가 기다리던 꽁치 한 손을 제일 먼저 내게 건넸다.

그 날 저녁. 회색 슬레이트 지붕 아래 호롱불에는 네 식구가 옹기종기 앉아 어머니가 석쇠에 구운 꽁치를 한 마리씩 들고 저녁 밥 한 공기를 번갯불 지나가듯 먹어 버렸다.

그런 추억을 떠올리게 한 등푸른 꽁치가 좌판에서 쾡한 눈을 하고 나를 보고 있다.
20년 전, 내가 홍천장날을 찾았을 때도 똑같은 풍경이다.

그 때 나는 <홍천 장날을 보며>라는 시 한 편을 써서 중앙지에 보냈다. 나는 바닷가 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꽁치를 보며, 지금은 누렇게 빛바랜 신문지에 박힌 그 낡은 시 한편이 그리워 다시 한 번 읊어 보았다.

장엘 갔다/닷새면 돌아오는/좌판 논 사람들 틈/걸음걸이마다/물씬 묻어나는 산냄새/어느 구석진 곳이라도 쭈그리고 있을/어머니는 없는지/빠지도록 눈을 돌릴 때/ 대신 올챙이 국수 한 그릇씩/거뜬히 비우며 또 다음날을/약속하는 와동리 사람들/하루를 털고 일어설 때/꽁치 서너 마리 씩/손아귀에 꽉 쥐고 앉았다. -홍천장날을며.

이 시는 내가 아는 홍천 사람들이 꽤 좋아했다.

그 때는 젊은 시인 냄새가 나는 가난한 청년이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시가 홍천 5일장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나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산더덕과 봄나물을 팔던 할머니에게로 갔다. 그리고 산더덕을 한 사발 샀다.

그러고는 마음속으로 ‘할머니는 어쩌면 내 시 속의 와동리 사람들처럼 장이 끝나면 좌판을 털고 일어나 나의 어머니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손주를 위해 아니면 단 둘이 사시며 할머니를 기다리는 할아버지를 위해 꽁치 한 손을 사들고 와동리 버스를 타실지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산더덕을 가방에 넣고나서야 뱃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나는 시장에서 내가 좋아하는 메밀전 서 너 장으로 점심을 대신 때웠다. 창 밖에는 아직도 부슬거리는 봄비가 유리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비가 오면 더 맛있게 먹던 홍천 메밀부침. 이 부침을 다 먹고 나면 봄은 더 빨리 이 장터의 풍경도 바꿀 것 같다. 어쩌면 다음 장날에는 싱싱한 내면 고랭지 곰취가 나올지 모른다. 그러면 나른한 봄날 밥맛이 없던 사람들에게도 홍천 장터는 된장을 얹은 곰취 쌈에 밥 한 숟가락으로 싱싱한 고랭지 기슭의 봄을 다 배부르게 먹을 거 같다.


▲홍천 장날, 고랭지역의 홍천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마을버스. ⓒ프레시안(서정욱)

해질녘. 어둠 속에서 죄판이 골목마다 걷히고, 하나 둘 좌판을 논 사람들이 5일장을 기약하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 사람과 사람들 사이. 텅 빈 시장 골목을 지키는 몇 개의 전신주 가로등 불빛만이 봄비를 맞고 졸고 있다.

그리고 홍천사람들이 내게 준 시 한 편처럼 장날 꽁치 한 손을 손에 꽉 진 할머니가 와동리 버스를 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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