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진보정당 운동의 역사와 함께해온 오재영 보좌관이 지난 22일 별세했습니다. 고인은 옛 민주노동당 조직실장 등을 거쳐 현재까지 정의당 노회찬 의원의 정무수석보좌관으로 활동해 왔습니다. 고인의 '동지'이자 '벗', 김윤철 경희대 교수의 추모사를 싣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편집자
오재영! 그는 '소리 수집가'였다. 징징거림, 투덜거림, 욕지거리란 이름을 달고 있는 이런저런 소리를 가슴을 열어 고스란히 품어 주었다. 공치사, 자화자찬, 궤변도 결코 수집 목록에서 빼놓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무척 능력 있는 소리 수집가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타적 삶에 투신한 탓으로 번뇌에 차 있되 센 척하기로 유명한 '진보정당 운동가'들은 그와 대화를 나눌 때면 한없이 솔직해졌다. 왜냐고? 오재영은 자신이 만난 이의 곤란스러운 처지를 헤아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 그 난감함을 풀어주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소리를 맡기면(때때로 지르면) 문제 해결의 문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열리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결코 관념적이지도, 현학적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늘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었던 것이다.
오재영과 함께 학생운동을, 청년운동을, 진보정당운동을 했던 많은 이들이 그를 '경청자', '조정자', '실력자'로 기억하는 이유이다. 잠깐이라도 자리를 비울라치면 한결같이 벗들이 그를 찾고 찾고 또 찾아 불러냈던 이유이다. 작별하자마자 애타게 그가 보고 싶어지는 이유이다. 그를 떠나보낸 이들이 서로를 끌어안고 눈물 속에 "이제 어떻게 해"라고 절규하는 이유이다.
한두 해 전 일이다. 그가 '그놈의 진보정당 운동판'으로의 귀환을 고민하며 "어찌할까?"라고 물으면, 나는 돌아가지 말라 했다. 전체를 읽으면서도 부분을 포착하는, 부분을 갖고서도 전체의 윤곽을 잡아내는 명민한 진보정당 운동가 특유의 힘으로 '유능한 직장인'의 반열에 들어선 터에 뭐 한다고 돌아간단 말인가. 그냥 한 걸음 떨어져 인간의 이기적 본능에 따르면서도 차분하고 넉넉하게 이타성을 발휘하는 '중년 이후의 삶'을 꾸려가면 될 일이지 말이다. 그가 그리 살면 덜 미안해해도 될 것이고. 하지만 역시 예상대로 그는 '그놈의 진보정당 운동판'으로 돌아갔다.
알아챘던 것일까? 침체에 빠진 진보정당 운동의 일선에서 고군분투하는 오랜 벗들과 함께하라는 자기 내면 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지천명(知天命)'의 소리를. 이 소리에 따르는 것이 우리가 몇 해 전부터 부쩍 자주 입에 올렸던 가치, '행복'에 다다르는 것임을.
누군가가 오재영이 훌쩍 이 세상을 뜬 것을 두고선 말했다. "미래를 당겨썼기에 그런 것"이라고. 그렇다. 미래를 당겨 쓸 만큼 힘든 게 바로 진보정당운동이다. 그 어려운 진보정당운동을 씩 미소 지으며 지켜냈던 오재영에게 또다시 고백한다. 사랑하고 존경했노라고.
누군가가 진보정당 운동을 분열과 낡음과 독선과 아집으로 기억하고 칭한다면, 그는 틀린 것이다. 진보정당 운동의 한 복판에 오재영이 있었기에. 또 '오재영의 넋'으로 진보정당 운동은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할 것이라 믿기에.
참으로 지극히 사랑한 아내와 두 아들 걱정일랑은 다 붙들어 매시라. 그대의 벗들이 분명 함께 보듬고 살필 테니, 부디 극락왕생하시라. 오. 재. 영.
빈소 : 고대구로병원 장례식장 202호
발인 : 25일(토) 08:00
연락처 : (02) 857-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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