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회 바로 가기 : 국가정보원, 국회가 통제하라 [上] : 국정원 통제 수준이 민주주의 수준이다)
국정원, 중앙정보부 이래 여전히 KGB 모델
어느 나라에서나 국가안보는 인권 제한을 위한 가장 강력한 정당화 논거다. 특히 전쟁, 내전 등 비상 상태에 처한 나라나 이념적, 정치적 양극화가 심한 나라에서 인권은 국가안보 앞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분단의 압도적 규정력 밑에서 멀쩡한 사람이나 단체를 걸핏하면 '종북좌빨'로 몰며 극단적인 혐오와 배제를 선동해온 시대착오적 풍토가 북핵 위기 국면과 맞물려 좀처럼 극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1987년 이후 민주화 3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도 정치 개입과 인권 침해를 일삼는 국정원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근본적인 배경이자 국정원이 설치기 딱 좋은 환경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국정원의 정치 개입과 간첩 조작 등이 문제될 때마다 금지된 정치 개입의 유형을 법에 신설하고 정치 개입 위반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선에서 그쳤다. 국정원의 수사권을 박탈한다든가 국내외 파트를 분리한다든가 국회 정보위의 감독 권한을 대폭 강화하고 독립 전문 통제 기구를 신설하는 등 보다 근본적인 제도 개혁은 손도 못 댄 채 지난 30년이 흘렀다. 그 결과 아직도 국정원은 중앙정보부 시절 이래 변함없이 KGB모델, 곧 수사권까지 가진 매머드급 국내외 통합 정보기관의 근본 구조를 갖고 있다. OECD국가로서 아직도 KGB모델을 따르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정보기관 개혁의 세 가지 원칙
그렇다면 베니스위원회와 유엔특별보고관, 선진각국이 발전시킨 비밀정보기관 통제법의 핵심 원칙, 즉, 국제사회가 한 목소리로 동의하는 비밀정보기관 개혁 원칙의 으뜸은 무엇인가?
세 가지다. 첫째, 정보기관과 수사기관의 분리 원칙이다. 양자는 고유한 역할과 속성이 다르기 때문에 정보기관의 수사권보유는 엄격히 금지된다. 그렇지 않으면 정보기관은 시나브로 공포정치의 도구로 바뀐다. 독재국가의 비밀정보기관이 예외 없이 수사권을 갖고 있는 KGB모델을 따르는 건 우연이 아니다.
둘째, 국내외정보기관 분리 원칙이다. 미국의 경우 국내정보기관은 FBI, 해외정보기관은 CIA로 분리돼있다. 독일, 영국, 일본, 스웨덴, 네덜란드 등 선진국 정보기관은 예외 없이 국내외정보기관 분리형이지 KGB처럼 일체형이 아니다. 이유는 내국인과 국내결사를 상대하는 국내정보수집기관에 대해서는 더 강력한 정치적 중립성과 인권적 통제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위의 두 원칙은 민주적 통제를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관철되어야 할 조직 원칙일 뿐 가장 중요하고 보다 직접적인 세 번째 개혁 원칙이 남아있다. 비밀정보기관의 '모든 파일과 시설, 직원'에 대해 '무제한적' 접근 조사권을 갖는 독립감시기관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 그것이다.
이 원칙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수사권이 없는 분리형 정보기관이라도 얼마든지 국가안보를 내세우며 밀행성과 보안성의 방패 뒤로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원칙이야말로 지난20년 간 국제사회가 발전시킨 정보기관 통제법의 핵심원칙이다. 국가안보에 대한 인권 보장의 우선성 원칙 혹은 밀행성에 대한 투명성의 우선성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정보기관 활동을 대의기구에 보고해야 한다
국정원 개혁의 방향도 동일하다. 현재로서는 유일한 국정원 통제 장치인 국회 정보위의 조사 감독 권한이 국정원의 국가안보 방패 앞에서 멈춰 서지 않도록 국회 정보위의 조사 감독 권한을 미국과 영국, 독일 등 선진국 수준으로 대폭 강화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참고로 미국 정보기관은 "작전(operations), 장비, 예산에 대한 '모든' '최신' 정보"를 상하원 정보위원회에 제공해야한다.
영국 정보기관도 "모든 예산, 운영, 정책, 작전, 사찰"에 대해 보고한다. 단, "현재진행중인 첩보와 안보작전"만 예외다.
독일 정보기관은 "구체적 이유" 없이 답변이나 자료 제출을 거부하지 못한다. 핵심은 똑같다. 국회가 됐건 다른 독립기관이 됐건 국가기관 중 어딘가는 국민을 대신해서 비밀정보기관의 조직, 예산, 활동, 파일, 시설을 샅샅이 접근, 감시, 조사할 수 있어야 한다.
선진국들은 의회 정보위는 기본이고 독립감찰관(미국, 호주), 전문통제위원회(캐나다, 독일)를 만들어 이들에 대해서도 무제한적 접근, 조사 권한을 부여한다.
국정원이 법 위에 군림할 수 있었던 까닭
우리나라는 국회 정보위조차 실질적 권한을 갖지 못한다. 국정원의 정치 관여나 인권 침해 스캔들이 일어나면 국회 정보위가 국정원장을 불러 현안 보고를 받고 질의응답을 진행한다.
국정원장은 한사코 의혹을 부인하거나 마지못해 일부 시인하더라도 국가안보를 내세워 중요한 자료 제출과 추가 답변을 거부한다. 당연히 여야 간에 정치 공방이 오가지만 금세 가라앉는다. 현행법상 으뜸 패(trump)를 쥐고 있는 국가기관이 유감스럽게도 국회가 아니라 국정원이기 때문이다.
국정원법 제13조는 국정원장에게 "국가의 안전보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국가기밀사항에 대하여는 그 사유를 밝히고 자료의 제출 또는 답변을 거부"할 권한을 부여한다. 지금까지 국정원이 어떤 스캔들을 일으켜도 국회정보위가 국정원의 '국가안보+국가기밀' 방패 앞에 무기력하게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듯이 현행법제 아래서는 국회가 아니라 국정원이 갑이다. 국회로서는 국정원이 어떤 스캔들을 일으켜도 그 진상을 밝힐 방법이 도무지 없다. 국정원이 법아래 국가기관이 아니라 법위의 무법기관으로 군림하는 이유다.
그래서 말이다. 국정원 개혁의 핵심은 국정원의 예산과 조직, 업무와 활동, 직원과 시설에 대해 국민대표기관인 국회조차 접근 조사권을 갖지 못하는 현실을 바꾸는 데 있다. 지금처럼 국정원이 하는 일을 국회 정보위도 들여다보지 못하고 바로잡지 못한다면 국정원은 더 이상 민주법치국가의 국가기관이 아니라 덮어놓고 믿어야하는 신정국가의 종교기관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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