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쌓여 온 폐단'을 의미하는 '적폐'는 산업화 시대의 정경유착과 부패고리에서 숙성되고, 구조화되었으며, 태생적인 한계를 안고 있던 정권의 안위를 위한 성장 이데올로기와 안보논리와 조응했다.
권위주의 시대의 유물인 반공주의와 냉전사고의 망령은 '보수'로 미화되어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성장의 기회비용으로 치부하기에 적폐는 거의 되돌리기 어려울 정도로 사회 전 영역에 걸쳐 강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다. 적폐를 숙주삼아 기득권을 누리는 시스템의 혁파가 사회개혁의 핵심이다.
적폐를 청산하지 못한다면 4·19 혁명과 6·10 민주대항쟁이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듯이 시민의 위대한 힘에 의한 3·10 촛불혁명은 미완의 혁명에 머무를 것이다. 공정성을 확립하기 위한 청산과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대통령 파면은 사유화된 권력을 회수한 반쪽의 승리에 만족해야 한다. '국론분열'이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헌법재판소의 최종주문이 낭독되기 전까지 일관되게 유지됐던 '탄핵찬성 80% 여론'에서 입증된다.
이번 대선은 성장제일주의에서 배태되고 강화된, 부정의한 사회 모순과 부조리를 혁파해 나가는 단초를 여는 정치과정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정치세력 간의 협력은 당연하다. 5당의 정당체제에서 어느 정파도 절대 다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한 현실에서 대선 후 연대는 켜켜이 누적된 사회 전 영역의 부조리를 해소해 나가기 위해 필수다. 연대와 협치가 대선 공학의 한 축이 되는 이유다. 그러나 개헌과 연대가 정치 세력 간 권력 획득을 위한 프레임의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적폐 청산은 현 정당체제에서 정당연합에 의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제왕적 권력의 폐해에서 민주화 이후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여섯 명의 대통령이 불명예 퇴진으로 기록되는 헌정사는 단순히 대통령제 때문만은 아니다. 중앙에 집중된 권력은 지방자치제도의 실시에도 불구하고 지방분권의 형해화를 초래했다. 여전히 기득권은 중앙으로 몰린다.
공정하지 않다는 인식의 팽배는 어떠한 제도에서도 사회통합을 가져올 수 없다. 박근혜 정권 이전부터 진행되어 오던 소득 불평등과 양극화의 심화는 박근혜 정부 이후 고착화되고 성장 동력마저 멈추게 했다. 검찰과 경찰, 국세청, 국정원 등이 민의 통제를 벗어나 있는 한 어떠한 권력구조도 공정성을 담보할 수 없다. 연대가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개헌을 매개로 형성되어선 안 되는 이유이다.
선거는 프레임이 승패를 좌우한다. 대선을 관통하는 대립쟁점이 형성되지 않고, 사회적 균열을 반영하는 갈등축이 작동되지 않는 선거에서 '적폐청산'과 '개헌연대'가 대선의 핵심 프레임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청산'과 '연대'가 대립적으로 기능한다면 선거 후 정당체제는 갈등을 통한 '적대적 공존'을 답습하게 될 것이다.
광장은 사라지는 게 아니다. 광장정치가 부정적 의미의 장외정치로 폄훼되어서는 안 된다. 대의제 민주주의가 간과하고 있는 민의의 왜곡을 막고 국민이 위임한 권력이 주권자의 의지대로 행사되기 위해서 광장정치의 제도화가 모색되어야 한다. 위임한 권력이 농단되고 사유화될 때 주권자인 시민이 나서서 권력을 회수하는 정치가 자리 잡는다면 시민정치는 대의제를 더욱 훌륭하게 가꿔나갈 수 있다.
광장정치와 제도정치가 별개라는 인식은 퇴행적이며 시대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 보다 공정한 사회가 무엇인지를 토론해 나가고 숙의해 나가야 한다.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의 모호한 개념에도 불구하고 시민이 정치의 주체가 되는 방식을 통해 적폐가 해소되고 제도권의 협치를 통해 구체화되어야 한다.
정치철학자 샹탈 무페(Chantal Mouffe)는 '민주주의는 시민에 의한 권력'이라고 했다. 정치의 객체로 전락했던 시민이 정치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시민정치의 전범(典範)을 3·10 법치혁명은 보여주었다. 한국 민주주의의 도약이다. 134일 동안 1600만이 운집했던 '광장'은 아고라 그 자체다. 집단지성과 일반의지의 전형적 발현이다. 시민이 각자의 생업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시민이 정치의 일상적 주체가 되는 시민정치를 포기하라는 말이 되어선 안 된다. 어떠한 권력구조가 되어도 민이 주체가 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의 복원이라는 기본명제에 다가설 수 없다.
적폐 청산과 연대의 변증법적 시너지를 모색해야 한다. 낡은 시대, 야만의 시대의 망령인 냉전적 사고가 모든 사회적 이슈를 진영논리로 몰고 가는 구태와 시대착오적 퇴행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청산 담론'은 필수다. '연대'는 청산을 구체화하고 제도적으로 완성시켜나가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할 때 존재의미를 찾을 수 있다. 청산과 연대가 상호대립적일 수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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