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일간지 <제주신문>과 <제민일보> 기자였던 저는 1988년 3월부터 '우연히' 4·3사건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1987년 여름 신문사에 입사한 후 1년도 채 되지 않은 햇병아리 기자가 '4·3특별취재반'의 일원이 된 것은 뜻밖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이유가 궁금한데, 아마도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점이 참작된 것이 아닐까 생각할 뿐입니다. 선배들을 도와 사료를 정리하라는 지시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4·3담당 기자로서 10여 년을 지내던 중 김대중 대통령 재임기인 2000년 1월 '4·3특별법'이 제정되고, 이 특별법에 의해 '국무총리 소속 4·3위원회'가 구성되자, 저는 2000년 10월에 진상조사보고서 작성을 위한 '3년간의 전문계약직 공무원'인 전문위원에 선임됐습니다.
2003년 10월 15일 진상조사보고서가 공식 채택됨으로써 법이 정한 기한에 맞춰 보고서 작성 업무를 무사히 마무리하였습니다.
그런데 곧 '희생자 심사업무'가 새롭게 맡겨졌습니다. 당시 희생자 심사는 매우 더디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수형인은 단 한 명도 심사에 통과하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위원회 심사회의 때마다 보고서를 제출해 군법회의 등 4·3관련 재판이 정당한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은 엉터리 불법 재판임을 입증하는데 힘썼습니다.
심사업무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2008년 3월 개관한 4·3평화기념관의 전시 콘텐츠 사료를 정리하고 패널 문안을 작성하였습니다.
평화기념관이 개관되고 희생자 심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인 2009년 3월, 극우세력들이 느닷없이 집단적으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헌법소원심판 2건, 행정소송 2건, 국가소송 2건이었습니다. '진상조사보고서를 파기하고 일부 희생자 결정을 무효화하라'는 것이 소 제기 취지였습니다. 피고는 4·3위원회 위원장인 국무총리와 대한민국이었습니다. 저는 총리와 대한민국의 '소송수행자'로 지정받아 2012년 3월까지 만 3년간의 지루한 법정 공방을 벌였는데 다행히 6개 소송 모두 승소했습니다.
그 후 추가신고를 접수해 달라는 민원이 빗발치자 2012년 말부터는 희생자 및 유족 추가신고를 위한 시행령 개정 업무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심사 업무를 하기 직전인 2013년 6월 말 4·3위원회 전문위원직에서 해임됨으로써 공식적인 4·3관련 조직이나 업무로부터 떠나게 되었습니다.
극우인사와 단체들이 '좌파적 시각을 가진 전문위원이 가짜 보고서를 작성하고 엉터리로 희생자 심사업무를 했으니 공직에서 퇴출시키라'는 내용의 민원을 청와대 등 정부 주요기관에 집중적으로 제출한 것과 같은 시기에 해임된 것입니다. 그간 제가 공식적으로 소속된 파(派)는 '경주김씨 익화군파'가 유일하지만, 어느덧 좌파(左派) 딱지가 붙어버렸습니다.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면, 4·3에 대한 공부는 저의 사명감이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신문사에서 시키는 바람에 얼떨결에 시작된 것인데, 어쩌다보니 13년 간 4·3취재에만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공직에서의 업무 역시 장기적이고 짜임새 있는 계획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끊임없이 밀려오는 과제의 늪에서 벗어나려고 13년 간 바둥거렸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26년이란 세월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습니다.
아무도 달려와 주지 않았던 40년
'제주4·3사건'은 탐라 개벽 이래 유례를 찾기 힘든 희생을 몰고 왔고, 오늘날까지도 아물지 않는 깊은 상처를 남겨놓았습니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이 발발한 때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통행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7년 7개월 동안 제주도민들은 너무도 큰 희생을 치렀습니다. 특히 군·경 토벌대가 1948년 11월 중순께부터 약 4개월 동안 벌인 이른바 '초토화 작전' 때 제주도민들이 치른 희생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제주4·3위원회 진상조사보고서는 희생자 수를 2만5000명에서 3만 명가량으로 추정했는데, 이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합니다.
이런 엄청난 피해에 대해 이승만 정권과 뒤이은 군사정권은 오랫동안 사건에 관한 논의조차 막았습니다. 1960년 4·19혁명 덕분에 처음으로 진상규명의 기회가 생겼으나, 1년 후 벌어진 5·16쿠데타로 인해 진상규명운동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정부는 진상규명과 사과는커녕 '공산폭동론'만을 주장하며 4·3사건을 입에 담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현기영, 김명식 등 작가들은 4·3사건을 소재로 소설과 시를 썼다는 이유로 정보기관 등에 끌려가 고문을 받거나 구속됐습니다. 유족들은 억울하다는 호소는커녕 연좌제에 걸려 장래가 막혔습니다.
1987년 벌어진 '6월 항쟁' 이후에야 비로소 4·3사건에 대해 말문이나마 틀 수 있었고 4·3사건 40주년인 1988년부터 조금이나마 전국적인 논의가 시작되었으니, 열흘 간 벌어진 광주항쟁을 다룬 한 소설가의 '아무도 달려와 주지 않았던 열흘'이라는 표현을 빌린다면, 고립무원의 섬 제주도 주민들에게 그간의 세월은 '아무도 달려와 주지 않았던 40년'이었습니다.
'살암시민 살아진다'…존경받아 마땅한 제주의 어른들
국민 대부분은 4·3사건을 알지 못했고, 설령 조금 알았다 해도 미군정기 분단 상황에서 발생한 제주도만의 돌출적인 사건으로 인식하며 외면해 왔습니다.
살아남은 제주도민들은 '연좌제'와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등 온갖 치욕과 분노, 좌절과 체념을 겪어야 했습니다. 4·3학살극은 허무주의와 패배주의를 심어주었고 전통적인 공동체 의식을 크게 변화·왜곡시켰습니다.
그러나 제주도민들은 온갖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십 년 간 외롭게 몸부림쳤습니다.
예로부터 제주의 어른들은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살암시민 살아진다(살다 보면 살게 된다)"고 위로했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극한 상황이라도 살다 보면 어떤 생존의 방도가 생길 것이니 절망하지 말라는 뜻이지요. 구체적 도움도 아니고 가시적인 희망을 보여주는 것도 아닌, 이런 막연한 말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마는 제주도민들은 그래도 이렇게 서로를 달래며 살아왔습니다. 남편을 잃고 50년간 청상과부로 살아온 많은 할머니들은 자신들이 겪어 온 기막힌 세월을 털어놓은 후엔 대개 "살암시난 살아지더라(살다 보니까 살게 되었다)"는 말로 끝을 맺었습니다.
내년이면 4·3 제70주년입니다. 현재 70~80대 어른들은 당시 10살 안팎의 나이였습니다. 이 분들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음에도 좌절하지 않고 군·경 토벌대의 방화로 깡그리 불에 타버린 마을을 고사리 같은 여린 손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고 제주 공동체를 복원시켰습니다. 이는 기적적인 일이며 존경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한편 제주도민들은 끈질긴 생명력과 높아진 민주의식을 바탕으로 4·3진상규명운동을 줄기차게 벌여왔습니다.
그 결과 2000년 1월 12일 마침내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 작업이 시작됐고, 2003년 10월 15일 정부의 공식보고서인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보고서가 채택된 지 보름만인 2003년 10월 31일 제주4·3사건을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으로 규정한 보고서 내용을 근거로 유족과 제주도민들에게 머리 숙여 사과했습니다. 과거사에 대해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을 한 것은 제주4·3사건이 처음이며, 국가 원수가 과거사에 대해 공식 사과한 것도 제주4·3사건이 처음입니다.
이처럼 제주4·3사건은 오늘날까지 제주도민의 공동체 의식과 삶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 '제주 역사의 상징'이며, 제주도민이 주체가 되어 국가차원의 진상규명까지 이끌어 낸 '과거사 진상규명운동의 효시'이자,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역사의 상처를 교훈 삼아 평화와 인권의 정신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평화·인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3은 말한다'를 이어갑니다
이제부터 여러분께 전해드릴 '김종민의 '다시 쓰는 4.3''은 <제민일보>의 '4·3은 말한다' 이후 중단됐던 4.3연재를 다시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동안 '4·3은 말한다'는 1948년 11월부터 약 4개월간 전개된 '초토화 작전' 시기까지 연재되었습니다. 이 연재물은 <4·3은 말한다>라는 책으로 제5권까지 출판됐습니다.
제6권에 해당하는 부분은 1998~1999년까지 연재했는데, 제가 2000년 4·3위원회의 전문위원으로 선임되어 신문사를 떠나는 바람에 책으로 출판되지 못했고(일본어판으로는 제6권까지 출판), 연재도 중단되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연재할 글은 제7권에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1948년 11월 17일 불법적으로 선포된 계엄령 시기에 제주농업학교 운동장에 설치된 천막수용소에 갇혔던 청년들이 전국 각지의 형무소로 끌려가게 된 사연부터 연재가 시작되는데, 집필 과정에서 제목이 수정되거나 내용이 추가되겠지만 그 대강은 아래와 같습니다.
① 합동토벌기(49.01~49.03)
2연대 주둔 / 학련과 청년단 / 경찰력 강화 / 무장대 공세 / 합동작전 / 마을 축성과 소개생활 / 북촌사건 등 화풀이 집단학살 / 무장대 해산
② 선무활동기(49.03~49.05)
전투사 설치 / 선무공작 / 마을재건 / 빗질작전 / 이승만 내도 / 국회의원 재선거 / 부도덕행위
③ 소강상태기(49.05~50.06)
독립대대 / 이덕구 사살 / 학살 지속 / 폭도화 / 보도연맹 / 수감자 사살 / 해병대 주둔
④ 예비검속기(50.06.25~50.10)
6·25전쟁 발발 / 혈서 쓰며 해병대 입대 / 제2대 총선 / 예비검속 / 백조일손 / 유지사건 / 형무소 수형인 학살
⑤ 마지막토벌(50.10~54.09.21)
계엄 해제 / 피난민 / 100사령부 / 무지개부대 / 금족지역 / 무장대 상황 / 마지막 빨치산 / 피해상황
⑥ 4․3 이후 70년
저는 그동안 7천 명가량의 증언을 채록했습니다. 증언을 해주신 분 중에는 이미 돌아가신 분도 많지만 저는 그 증언들을 소중하게 기록하고 간직해 왔습니다. 제가 들었던 증언들을 사료와 함께 검증하면서 정성껏 여러분께 전해드리겠습니다.
'김종민의 다시 쓰는 4.3'은 <프레시안> 기사 교류 중인 <제주의 소리>와 동시에 연재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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