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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 돌아 다시 만난 DJ와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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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 돌아 다시 만난 DJ와 노무현

갈등과 협력, 평화와 민주를 향한 애증의 쌍곡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의 집요한 모욕성 수사 끝에 자살이라는 비극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등진지 불과 석달 만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먼 길을 돌아가는 동안 여러 차례 엇갈렸던 정치인생 속에서도 언제나 같은 곳을 바라봤던 두 전직 대통령의 남다른 인연에도 새삼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같은 듯, 다른 듯…하나의 '가치' 공유했던 두 사람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정치에 입문시킨 사람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아닌 김영삼 전 대통령이었다.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날렸던 노 전 대통령은 당시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눈에 들어 1988년 13대 총선에서 부산 동구에 출마해 첫 금배지를 달았다.

그러나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0년 민정당, 신민주공화당과 합당하는 '3당합당'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은 이를 '역사적 반역'으로 규정, 꼬마 민주당에 잔류하게 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계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 직후 노 전 대통령은 '야권분열'의 우려 속에서 곧바로 이에 합류하지는 않았지만, 1997년 대선을 앞두고는 영남 출신 정치인으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원한다.

'정치적 동반자'로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본격적인 인연은 당시부터 시작됐다. 김 전 대통령은 50년 만의 정권교체에 일조한 노 전 대통령을 1998년 보궐선거를 통해 서울 종로에서 당선시키고 2000년에는 해양수산부 장관에 임명하는 등 아낌없이 지원했다.

동교동계 인사들은 노 전 대통령이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을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데에도 김 전 대통령의 '암묵적 지원'이 적지않은 작용을 했었다고 회상한다. '대통령 노무현'의 탄생이라는 드라마의 서막을 알렸던 민주당 광주 경선에도 이같은 김 전 대통령의 '침묵지원'이 적지 않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지원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이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됐으면 하고 희망했었다"라고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 지난 2003년 11월 '김대중도서관' 개관식에서 만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당시 대통령. ⓒ연합뉴스

'대북특검'-'도청수사'-'분당' 겪으면서도 결국 다시 한 길에 서다

물론 부침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정치개혁과 지역주의 극복에 온 힘을 기울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존재는 그 자신의 '뿌리'인 동시에 '극복의 대상'이었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뒤에는 대북송금 특검 문제가 불거지면서 박지원 전 비서실장과 임동원 전 국정원장 등 'DJ의 남자들'이 줄줄이 구속됐다.

노 전 대통령이 당시 특검을 수용한 것은 상당 부분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의 '정치적 압력' 때문이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이긴 하지만, 이 문제가 동교동과 노 전 대통령이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된 계기였던 것만은 분명했다.

양측의 정치적 갈등은 김대중 정부 시절 국정원의 불법도청 사건 수사,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분당 등을 경과하면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호남의 민심도 점차 노무현 정부에게서 멀어져 갔다.

다시는 같은 길을 걷지 않을 것 같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을 하나로 묶어낸 것은 다름 아닌 남북관계였다. 노무현 정부 시절 남북관계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김 전 대통령은 늘 대북특사 '0순위'로 거론될 정도로 '든든한 조력자'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직후인 2007년 10월 노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을 청와대로 초청해 회담 성과를 설명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은 "1차 정상회담 때 뿌린 씨앗이 크게 성장했다"며 "더 좋은 열매를 맺기를 기대한다. 우리 민족에게 다행스러운 일이고 노 대통령이 재임 중 큰 업적을 남겼다"라고 평가했다.

일반 민주주의의 확대라는 측면에서도 두 사람은 '정치적 동지'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국가인권위원회를 설치했고,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도 제정했다. 여성부도 김대중 정부 시절 만들어졌다.

"전생의 형제 같던 노무현…내 몸의 반이 무너진 심경"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직후 "내 몸의 반이 무너진 심정"이라며 울분을 토한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이후 최악의 경색국면을 맞이한 남북관계와 전사회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민주주의 퇴행'의 징후는 두 전직 대통령을 다시 한 번 '투사'로, 또 '동지'로 만들고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6월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나하고는 이상하게 닮은점이 많습니다. 전생에 노무현 대통령과 나는 형제간이 아닙니까. (중략)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만일 그렇게 고초를 겪을 때 500만 문상객의 십분지 일이라도 '그럴 수 없다', '전직 대통령에 대해 이런 예우할 수 없다', '증거도 없이 매일 신문에 발표해서 정신적 타격주고 수치주고 이렇게 할 순 없다'고 50만만 그렇게 소리를 냈다면 노무현 대통령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부끄럽고,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이웃 사람들이 희생된 데 대해 가슴 아파하고…. 마음으로부터 피맺힌 심정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그러나 이 연설은 결국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공개 연설이 됐다. 급격히 악화된 건강문제로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김 전 대통령은 끝내 자리를 털지 못하고 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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