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이 기정사실화하면서 불복에 앞서 박 대통령의 자진 하야와 같은 정치적 해법이 모색되는가 하면, 이정미 헌법재판소 소장 권한대행의 살해 위협까지 등장하는 등 요즘 해방 후 정국을 보는 듯한 사회상이 연출되고 있다. 박사모 온라인 카페에 '의거' 의향을 올린 최 모 씨가 지난 25일 자수함으로써 살해 협박은 일단 해프닝으로 끝났다.
최 씨는 '이정미만 사라지면 탄핵 기각 아니냐'는 제목의 글을 통해 "이정미가 판결 전에 사라져야 한다. 나는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 나라를 구할 수만 있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적었다. 자못 비장한 게 이 대목은 과거 독립운동가가 일제 요인을 암살하려는 결의를 밝히는 장면과 겹쳐져 더 당황스럽다.(여담으로, 일제시대의 친일과 달리 요즘의 친박이 전혀 수치심을 못 느낀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 역사에서 친박은 친일 못지않은 수치로 기록될 전망이다.)
그러니 대통령 대리인단에 포함된 김평우 변호사 같은 이가 법정에서 내란을 거론하고, 헌재가 탄핵을 받아들이면 아스팔트가 피로 물들 것이라는 등의 막말을 내뱉는 게 어찌 보면 정상이다. 김 변호사를 비롯한 박 대통령 대리인단이 이미 법률 행위를 넘어서 정치 행위를 하고 있다는 지적은 타당한 지적이지만, 반면 하나 마나 한 지적이기도 하다. 대통령 대리인단을 포함하여 박사모 등은 애초에 박근혜의 무죄를 광신하거나 광신해야 하기에, 탄핵 심판에서 소추안이 기각되기를 바라겠지만 그 반대의 결론에 대해서는 수용할 생각이 없다.
이 극우세력이 군대의 궐기를 호소하고 내란 운운하며 겁박하는 상황을 보면 예상대로 3월 초에 박 대통령의 탄핵이 결정되었을 때, 우리 사회에 광기와 혼란이 불어 닥치는 사태가 불가피해 보인다. 탄핵 이후에도 '박근혜'는 우리 정치의 가장 큰 화근으로 기능할 것이 확실하다.
혼란과 광기를 모면하려면, 그들 말대로 아스팔트가 피로 덥히는 파국을 피하려면, 탄핵이 기각되어 박 대통령이 무사히 임기를 마치기를 기원해야 옳을까? 그런 얘기는 누가 봐도 궤변이겠고, 따라서 헌재가 지금 기대대로 '정상적으로' 결정을 내렸을 때 승복하는 분위기를 강조하고 어떠한 혼란에도 불구하고 헌법 질서를 회복하며 다음 단계로 조속히 이행하여야 한다.
그러나 만에 하나 탄핵 심판이 '기각'으로 결론이 난다면, 같은 논리로 촛불을 든 국민들에게 승복을 요청하며, 12월 대선 이후로 모든 것을 연기하자고 말할 수 있을까. 나 한 사람의 견해가 중요하지 않겠지만, 만일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나는 결코 헌재 결정에 승복할 수 없을 것이다. 탄핵 인용을 가정했을 때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분노의 폭발로 사회는 마비되고 우리는 미증유의 혼란에 직면하여 사실상 내전을 방불케 하는 대립과 갈등 속으로 직행할 게 뻔하다.
극단적인 시나리오는 분노한 시민들이 국회의원 총사퇴를 요구하고 광장을 통해 국가권력을 직접 인수하려고 들 것이고, 이후 시민권력과 박근혜 일파의 폭력이 대결하는 양상을 배제할 수 없다. 이른바 '헌정' 질서의 중단은 불가피하고 이후 대한민국의 미래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된다.
여기서 쉽사리 눈치챘겠지만, 어떤 측면에서 김평우 변호사와 나의 논리가 비슷하다. 언명하는 정도의 차이만 존재할 뿐 서로 불복을 주장한다. 서로 기대하는 결론에 대해서만 승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 누가 맞고 누가 틀린 걸까? 아니면, 둘 다 틀렸거나 둘 다 맞을까.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하거니와 만일 헌재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을 기각한다면 나는 헌재의 결정에 승복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살아남게 될 박근혜 정권과 그 국가체계에 대한 모든 종류의 저항과 불복종을 지지할 것이다. 반면, 탄핵이 인용된다면 저들의 승복을 요구하는 의견에 힘을 보태는 한편 헌정질서의 회복을 기원하지 싶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란 식의 이런 막무가내 논리의 근거는 무엇일까. 내가 정신적으로 친박과 다른 바가 없는 것일까.
결론을 얘기하면, '박근혜'는 이미 (굳이 오래된 개념을 빌리자면 실정법이 아니라 자연법에 의거해) 탄핵당했기에 탄핵을 뒤집는 행위는 반(反)헌법적인 쿠데타로 규정되며, 따라서 쿠데타 기도는 만일 대한민국이 공화국이라면 척결되어야 한다. 헌재의 심판은 대한민국 헌법에 규정되어 있지만, 엄밀하게 말해 요식 행위에 불과하다. 법률 전문가 혹은 우리 사회의 엘리트 8~9명이 국민의 총의와 국회의 결정을 번복할 수는 없다. 물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 보았듯, 국회가 꼭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지 않기에 핵심적으로는 국민의 의지를 물어야 한다. 결국 국민이 헌법이다. '예외적 상황'에 관한 의사결정이 이미 내려진 상태에서 결정을 내린 주권자, 즉 국민의 의지에 역행하는 행위는 가능하지 않다.
'국민이 헌법'이란 얘기는 국민이 한 명이 아니기에,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과 같은 사태가 벌어졌을 때 끊임없는 공론과 토론의 장을 통해 '전체' 국민의 이익을 지키고 민주공화국의 미래를 보장하는 결정을 유기적이고 역동적으로 끊임없이 산출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 토론은 단지 다수결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판명하는 가치산출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전제를 충족하는 한 헌재가 탄핵을 기각하는 사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며, 만일 헌재의 어떤 법조엘리트가 '국민이 헌법'임을 망각한다면 친박과 동일하게 역사에 오욕으로 기록될 것이다.(이후 헌법 개정 논의가 진행된다면, 이번 기회에 헌법재판소의 기능과 역할에 관한 전면적인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 헌법재판의 최종 심급은 법관이 아니라 국민이다.)
탄핵 이후에 수치스러운 준동이 이어지겠지만,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헌재의 탄핵 결정 이후 친박의 광분이 우려스럽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가 감당하지 못한 수준으로 전개될 가능성은 없다. 사실 그때 가서는 친박이 문제가 아니다. 의회 권력과 금권 등이 새로운 방식과 그들만의 짬짜미로 더 정교하게 기득권 구조로 공고히 하는 사태를 막는데 민주주의의 온 역량을 집결해야 한다. 박사모 등 극우적인 박근혜 추종세력의 미래상에 대해서는 공교롭게도 성경에서 찾아낼 수 있어, 이것으로 갈음한다. 그렇다고 너무 은혜가 넘쳐 성경 인용문을 '박근혜의 구원'으로 잘못 읽지는 마시길.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 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 마침 거기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하신대 /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길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누가복음 8장 30~3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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