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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마을에서 살고 싶어?"

[격월간 민들레] 마을을 상실한 청년들에게 필요한 공동체성

어떤 마을에서 살고 싶어?

"어떤 마을에서 살고 싶어?" 최근 이 질문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나중에 뭐가 될 거야?"라는 질문도 그렇다. 이 질문은 충분히 컸음에도 듣게 되는 말이다. '충분히 컸음에도'는 누군가 나에게 기대하는 사회적 성장을 말하며,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사회적으로 기대하는 '성숙'에 아직 미치지 못했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쉽게 말하면 나잇값 못한다는 뜻이랄까).

하지만 난 이 질문이 썩 기분 나쁘지는 않다. 나 역시 자신에게 기대해왔던 어떤 성숙에 아직 이르지 못했다고 생각하니까. 사실 그게 뭔지 도무지 모르겠다. 어린 시절에는 막연히 서른이 지나면 저절로 꽤 괜찮은 어른이 될 줄로만 알았는데 말이다.

그럴 때 나는 대답한다. "동네 백수가 꿈이야. 내가 가진 기술로 그때그때 필요한 일을 하면서 굶어 죽지만 않았으면 좋겠어." 이런 말을 하면서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장면에는 숲속에서 불을 피우기 위해 불쏘시개를 찾는 내가 보이고, 내 집은 나무 위에 살짝 걸쳐져 있다. 주변에 열매 달린 나무와 풀들이 서로 뒤엉켜 자라나고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아이들도 있고, 가까이엔 이웃들도 있다. 조금은 떨어져 있지만 동네라고 말할 수 있는 마을도 있다.

어떤 마을에서 살고 싶은지를 물음에는 이런 각자의 살고 싶은 '나'들이 있는 마을이다. 각자의 '나'들이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발현될 때, 다양성이 존중될 때, '나'들은 커뮤니티, 즉 우리가 될 수 있겠다. 그런데 요즘의 '나'들은 정작 나에 대해서 잘 모르거나 혹은 그대로를 표현하기 어려워서 각자 살고 싶은 모양의 '나'들이 되지 못한다.

마을과 공동체는 한국사회에서 커다란 이슈다. 잃어버린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마을을 살리자고 이야기하지만, 먼저 건강한 '나'들의 힘을 찾지 않는다면 건강한 공동체성도 마을도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떤 마을에서 살고 싶은지,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할 질문들을 우리는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갈 길 잃은 젊은이들이 내 주변에도 곳곳에 방황하고 있었다.

별의별 '나'들의 무모한 실험


어려서부터 아파트에서 살았다. 옆집, 아랫집, 윗집 그리고 경비아저씨 혹은 항상 비슷한 시간에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던 옆 학교 교복을 입은 남자아이 정도가 기억에 남는다. 서로의 필요와 욕구가 커질 때야 최소한의 소통을 했지만 (주로 층간소음 같은 일) 일상에서 교차하는 접점은 좁은 땅을 공유하는 것 이외에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젊은 세대가 그렇겠지만, 마을에 대한 내 경험은 겨우 이 정도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마을'이라는 단어에는 행정적, 공간적으로 구분되는 개념 외에 관계성, 동시성, 역사성처럼 우리 삶의 수직과 수평을 오가며 작용하는 근본적인 성질이 먼저 존재한다. 그러나 고향이라는 단어가 어색할 만큼 다양한 곳으로 빈번한 이주를 경험해온 청년들은, 삶의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상호작용을 느끼고 체화할 시간적, 공간적인 여유를 갖지 못했다. 좁은 땅과 적은 자원을 공유하며 권력과 자본에 따라 삶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주로 비교와 경쟁이 도드라졌던 부모세대에게서 자라난 젊은이들은 세상과의 분리와 단절을 경험하고 있다. 몸이 아닌 머리로 공동체 속에서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해 알게 된 이들은 많은 시행착오와 오류를 범하게 된다.

나 역시도 그러했고, 많은 방황의 시간을 지났다. 그 연장선에서 도전했던 '함께살이' 실험이 몇 년 전 시도했던 '별에별꼴'이란 청년 공동체다. 함께 사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그 안에서 나는 스스로 가능한 것은 무엇인지 새로이 배워야 했던 젊은 친구들은 자연의 한 부분인 인간 본연의 모습을 만나기 위해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한 한적한 곳, 자연과 가까운 곳을 찾았다. 고민이 비슷한 청년들이 모여 충남 금산에 있는 폐교 공간에서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

이름처럼 별의별 개인의 모습을 인정하려고 무던히 애쓴 시간이었다. 다사다난했던 다섯 해 동안의 공동체 생활은 '나에게서 우리'로 가는 과정을 도와주었다. 짧은 시간에 지름길로 올 수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서로 상처를 주고 폐를 끼치고 어려워했으며 아파서 우는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물론 도망가지 않고, 포기하지 않을 만큼의 기쁜 시간들이 참 많았다.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상호 연결된 에너지 속에 끈적이며 이어져 있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가장 크게 변화했던 부분은 주체적인 삶으로의 전환이다. 그동안 별생각 없이 밟아왔던 아스팔트 아래 내가 깨닫지 못했던 무한한 생명력을 느끼는 순간 (이 감각은 일주일마다 쑥쑥 자라는 운동장의 풀을 베며 깨어났다) 그것이 무지였든, 무식이었든 그동안 스스로 삶의 주체로 살지 못했던 나에게 큰 실망을 했다. 주체성을 찾기 어려운 사회에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언제까지 세상 탓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의 감각을 깨워줄 어떤 우연의 사건이나 존재들은 곳곳에 널려있다.

별에별꼴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감각의 회복은 벼를 만지는 것이었다. 해마다 우리는 300평 정도의 쌀농사를 함께 지었다. 이 역시 무지이거나 무식이거나, 경제적 능력 부족의 이유까지 겹쳐 우리는 매해 손으로 모를 심고, 낫으로 벼를 베며, 홀테로 직접 나락을 턴다. 농사지은 쌀로 밥을 해 먹는 것에서부터 손을 씻는 작은 행위까지, 이곳에서는 우리가 살아왔던 어느 곳과 다르게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고 내가 누구에게, 어떻게, 얼마만큼 의존하며 살아왔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함께 사는 이들과의 소통 방법에 대해서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함께 살면서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었지만, 진실한 자신을 인정하기 어려워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 여파로 2015년 별에별꼴에는 가장 적은 인원이 살게 되었고, 몇몇 친구들은 집으로 돌아가 생활했으며 내부적인 관계와 책임의 문제로 저마다 상처와 아픈 곳을 보듬고 치유하는 시간이었다. 결국 이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함께 해결해야 함을 깨닫고 우리는 '별에별 장례식'이라는 이름으로 지난 아픔과 상처들을 장례하는 행사를 치렀다. 언제부턴가 우리의 일상에서 어떤 초월한 존재 혹은 자연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기도하는 의식 혹은 행위들이 다 사라져버렸다. 언제부턴가 우리의 일상은 어떤 초월한 존재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기도하는 의식 혹은 행위들이 다 사라져버렸다. 특별한 종교의식이 아닌, 일상에서 소소한 우리들만의 기도 방식 말이다. 장례식을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아무튼 그해에는 결국 많은 품을 들여 정성스레 지은 논에서 거둔 벼를 3분의 1밖에 털지 못했으며, 홀테도 빌리지 못하고 머리빗과 손가락을 이용해서 나락을 털다가 결국 새와 생쥐와 옆집 닭들과 나누어 먹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공동체에서 책임과 의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참 웃기기도 하고 가슴 아프기도 한 일이었다.

▲ '별에별꼴'을 스쳐간 많은 청년들. ⓒ민지홍

이런 별에별꼴의 경험은 흙을 밟고 하늘을 바라보는 삶이 인간의 어떤 감각을 깨어나게 하는지, 노동하며 흘리는 땀이 얼마나 자신을 다스리는 인내를 길러주는지, 하락한 인간의 야생성과 생존력이 어디에 의존하는지 가감 없이 드러나게 해주었다. 단절과 분리를 경험하면서 살았던 우리가 자신을 얼마나 모르고 살아왔고, 언어로 표현하고 소통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지, 실패와 도전을 연습하는 나날들이었다. 절실하게 필요한 삶과 생활의 지식과 기술들은 도대체 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지, 어디서 배울 수 있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현대사회의 마을과 가정은 교육적 기능을 전적으로 학교에 미룬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배움의 본질을 상실한 그 학교에서 자본과 권력의 지시에 순응하는 교육을 몸에 익힌 세대가 지금의 청년들이라고 생각한다. 꿈의 90퍼센트가 실현되지 않는 이유는 타인과 나누지 않아서라고 하는데, 꿈을 꾸지 않도록 '나'들의 꿈이 아닌 '사회'의 꿈을, 사회의 권력을 거머쥔 몇몇 '소수'의 꿈을 실현하라고 교육해온 듯하다.

지속가능한 '나'들의 마을

마을을 이야기하는데 자꾸 생활, 교육, 개인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는 것을 보니 마을은 이러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삶의 기술, 관계와 소통의 연습 장소, 개인의 내적 수련과 성숙 말이다. 모르고 있지는 않았으나 함께 생활하면서 부딪치는 우리의 모습에는 그 부족한 모습이 역력했고 인정하기까지 시간과 품이 참 많이 들었다.

우리는 함께 살기에 부족한 우리의 모습을 인정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아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의 전개가 필요했다. 공동체에 대한 고민과 어려움이 더 깊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해외에 있는 공동체와 마을을 만나게 되었다. 개인과 공동체의 변화와 기능의 상실은 비단 한국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깨닫고 사람들이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 더불어 사는 지속가능한 삶을 고민하고 실현해가는 해외의 여러 생태마을들을 알게 되었다.

처음으로 방문한 곳은 남인도에 있는 오로빌(Auroville) 마을이다. '새벽의 도시'라는 뜻을 지닌 이 거대한 공동체는 인도의 영적 지도자 스리 오로빈도와 그의 파트너였던 마더(mother)를 중심으로 1968년에 만들어졌다. 인류의 화합이라는 공동체 비전을 가지고 새로운 도시와 새로운 방식의 삶, 그리고 새로운 존재 방식을 창조해 나가고자 국가와 인종, 종교, 성별을 초월한 40개국의 2000여 명 사람들이 100여 개의 크고 작은 커뮤니티를 만들어 살고 있다. 주거, 음식, 의복, 교육과 의료 같은 삶의 본질적 가치를 되살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노동을 포함한 자연적인 에너지를 사용하기 위해 연구하고 실험하는 곳이다. 여러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문화를 아우르는 철학과 영성, 화합의 방식 역시 다양하다. 나는 이곳에 이끌려 네 번이나 방문했다. 가장 매력적인 것은 이런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한 마을에 모여 살고 있다는 데서 오는 위로였다. 한국에서는 찾고, 찾고 또 찾아야 하는데 말이다. 또한 이곳에서는 내가 어떻게 살고자 하는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가 분명해 조급하지 않게 균형감을 갖고 그 의지를 실천해갈 수 있었다. 사람이 모인 곳은 어디든 갈등이 있게 마련이지만, 그것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해결해 나가는 것이 멋져 보였다. 마을 한쪽에 적혀 있던 스리 오로빈도의 말도 좋았다.

오로빌은 이건 해도 되고 이건 안 되고 하는 식으로 제약을 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자가 원하는 방법을 택하고 풍부한 실험을 해서 영적인 삶이 하나의 엄격한 길로만 좁혀지지 않도록 하자고 제안하지요. 유일한 조건은 더 높은 삶에 대한 진지한 열망입니다.

마을에 대해 고민하던 나는 유럽의 오래된 생태마을 리더들이 미래세대를 위해 만든 '생태마을디자인교육(Ecovillage Design Education)'을 만나게 되었다. 4주 동안의 교육과정을 인도에서 수료했는데 깜짝 놀랄 만큼 지금의 나에게, 한국의 청년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교육이었다. 함께하고 싶은 친구들, 특히 가족이 떠올랐다. 이 교육과정은 전 세계 많은 생태마을에서 진행하고 있으며 세계관, 생태적 차원, 사회적 차원, 경제적 차원이라는 네 가지 키워드로 이루어진다. 이 네 가지를 통합적으로 자신에게 맞게, 지속가능하게 디자인하는 기술이이 교육과정의 핵심이다. 현재 국제생태마을 한국청년네트워크의 교육단체(NextGEN Education)에서 이 과정을 한국화 하는 연구와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얼마 전에는 한국 생태마을 네트워크 결성을 위한 모임에 다녀왔다. 생태마을운동, 생명평화운동의 2세대와 3세대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였다. 전남 영광에서 생명평화마을을 일구고 계신 황대권 선생님께서 한국 생태마을의 현황과 마을공동체에 대해 설명해주셨는데, 서구처럼 특정 사람들이 가치와 철학을 바탕으로 만든 계획된 생태 마을부터 정책 사업으로 접근해 복원하려는 일반적인 마을, 그리고 교육공동체, 종교공동체, 복지공동체까지 한국의 생태마을 혹은 마을공동체의 형태는 다양했다. 우리가 언급하는 '공동체와 마을'이라는 단어 안에는 본래 '생태적' 지역화의 특성이 담겨 있는데, 자본주의 사회를 지나오며 '생태'라는 의미가 축소되고 퇴색되었기 때문에 그 뜻을 되살리기 위해 인위적으로 '생태마을'이라 칭하는 상황이 생겨났다고도 하셨다. 이 자리에서도 역시 자원이 부족하고,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청년세대들의 문제가 언급되었다. 청년의 어려움은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국제적으로 증명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청년들이 스스로 의식을 갖고 해결해야 할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이러한 기회와 사건들은 우리들 주변에 조심스럽게 널려있다. 우리는 이러한 우연의 사건과 기회를 만나기 위해서 조금 더 감각들을, 마음들을 열어야 한다. 그렇게 가능하도록 가정에서, 마을에서, 사회에서 청년들에게 조금씩의 여백을 주고 자원을 공유해주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청년들은 이러한 상황들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시간과 공간적 여유를 가지며 자신을 위한 실험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의지와 인내가 필요하겠다.

마을이 해체되었다지만, 우리는 이미 마을에 살고 있다. 지구마을부터 가족공동체까지 겹겹의 공동체에 둘러싸여 있지 않은가. 그러나 마을과 가정의 기능 상실 등으로 많은 청년들은 '나'들이 모여서 각자 살고 있는 것인지, '나'들이 모여서 '우리'를 이루며 살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이러한 마을과 공동체성,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을 체화하려면 작고 큰 다양한 공동체들을 많이 만들어보고 느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미 속해 있는 커뮤니티를 포함하여서 말이다. 함께 사는 것을 새로이 배워야 하는 유목세대에게 필요한 마을은 이런 실험을 가능하도록 하는 자유와 충분한 자원의 공유가 지원되는 곳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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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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