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를 읽을 때면 잠이 몰려온다. 눈을 감는다. 나는 붉은 노을을 가슴으로 안으며 황야를 걷고 있다. 아무도 아는 이 없는 낯선 이국의 왁자한 시장터에 추레한 모습으로 서 있곤 한다. 깨어나면 다시 찬란한 태양을 등에 지고 사랑하며 싸우며 일상을 산다. 그리고는 이 시끄러운 부대낌의 현장을 홀연히 떠나 천하를 주유하고 싶어진다. 주유(周遊), 장자의 본명은 주(周)이다. 장자 사상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글자를 하나 고르라면 나는 '유(遊)'자를 선택하겠다. 현대 중국에선 이 글자가 도태되었고 유(游)자로 쓴다. 노닌다는 뜻이다.
마음에 노닐다
<장자> 내편, 외편, 잡편의 긴 책을 읽으면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기발한 여행을 경험하게 된다. 장자는 삶 자체가 여행이었으며 마음과 몸이 모두 놀이였다. 그는 천하와 천지와 자연을 소요했다. 그런데 장자는 친구를 찾아가거나 특정한 지역을 방문한 적은 있지만 어딘가로 여행을 다닌 적은 거의 없었다. 자연을 사랑하여 깊은 산 속에 은거하지도 않았다. 아내와 자식과 복닥거리며 시장터에서 풀신을 엮어 팔기도 했다. 그가 노닌 곳은 마음이었다. 장자 여행의 본질은 '인간세(人間世)' 편에 보이는 승물이유심(乘物以遊心)이다. 일과 사물에서 멀어지지 않고 그대로 타고 넘어 자유로운 마음에 노니는 삶을 말한다.
세간을 벗어나 심산유곡에서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작은 은거다. 세상 속에 들어가 먹고 마시며 모든 존재와 함께하는 은거야말로 큰 은거이다. 장자는 출세간과 입세간을 구별하지 않았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도 아니다. 이 목숨은 잠시 빌려 사는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지북유(知北遊)' 편에서 순임금이 '내 몸의 소유자는 내가 아니냐?'고 묻자 승(丞)이 이렇게 대답한다.
"이것은 천지로부터 위탁받은 형체입니다. 삶도 당신의 소유가 아니라 천지가 화합하도록 잠시 위탁한 것입니다. 성명(性命)도 당신의 소유가 아니라 천지가 그에 좇으라고 잠시 위탁한 것입니다. 자손들도 당신의 소유가 아니라 천지로부터 위탁받은 허물일 뿐입니다."
장자의 여행지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그 사람은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내 마음이 곧 우주이고 자연이다. 마음에 노니는 사람이 진정한 자유인이다. 진인(眞人)이다. 정치, 경제, 사회, 인륜도덕 따위는 자연스런 본성을 억누르는 족쇄이다. 마음속 계산을 없애고, 일체의 욕망을 끊고, 모든 사회관계에서 벗어나야만 사람은 순수한 자연 상태를 지킬 수 있다. 마음의 순수성을 잃은 사람이 남을 탓하고, 부당함을 정당화하고, 이념으로 배척하고, 세상이 바뀌는 것을 두려워한다.
입을 것과 먹을 것만 있으면 족하다. 모든 것은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인성의 자연스러움에 순응하라는 것 자체가 강요 아닌가? 나는 기나긴 중국여행 동안 시종 이 의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유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철학자 리저허우(李澤厚)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중국 지식인의 겉모습은 유가이지만 내심은 영원히 장자이다."
학자로서 군자와 소인의 삶에 대해 생각하지만 "평소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가되 어디를 가는지 모르며, 입안에 무언가를 물고서 희희낙락 배 두드리며"('마제(馬蹄)' 편) 노는 시간이 더 많은 삶을 살아간다. '형체를 온전히 하고 참 생명을 지키며' 살기 위해선 이 일 저 일에 신경을 써서는 안 된다. '응제왕(應帝王)' 편 얘기대로 '명성을 구하지 않고, 권모술수 부리지 않고, 세속 업무를 맡지 않고, 지식의 주인이 되지 않은' 장자의 삶은 과연 온전한 것이었는가?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자연의 한 과정으로 본 그는 수명연장 따위의 술수를 비판했다. 죽을 때 제자들이 후한 장례를 묻자 천지를 관으로 삼고 만물을 부장품으로 삼는데 무얼 더하겠느냐고 말한 것으로 보아 장자는 완전한 자기망각을 통해 하늘과 하나가 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다.
영원한 자유는 어디서 오는가?
장자는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물건일수록 나쁘게 보았다. 권력이 대표적이다. <장자> '추수(秋水)' 편과 <사기>의 '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에 실린 유명한 일화가 있다. 위나라 재상을 지냈던 혜시는 장자의 친구였다. 초나라에서 명망 있는 장자를 5천금으로 초빙해 재상으로 삼으려 했는데 관작과 봉록을 더러운 것으로 여겼던 장자는 초나라 사자를 한바탕 조롱했다.
"천금이라면 굉장한 이득이고 경상(卿相)이라면 높은 지위지요. 당신은 교(郊) 제사에 올리는 희생인 소를 본 적이 없소? 수년을 잘 먹여서 기르고 수놓인 비단을 입히는 것은 태묘에 들여보내려는 것 아니오. 그 지경이 되었을 때 외로운 돼지새끼가 되려한들 가당하겠소? 당신 빨리 사라지시오. 날 욕보이지 마시오. 난 차라리 더러운 도랑에서 유희하며 스스로 즐길지언정 군주의 재갈물린 말고삐가 되지 않겠소. 영원히 벼슬하지 않음으로써 내 자유를 즐기겠소."
장자는 권력에 가까이 가지 않음으로써 영원한 자유와 쾌락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꾸로 벼슬을 통해 이것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한다. 스러져가는 권력자에 빌붙어서라도 명성과 이익을 취하겠다는 사람들, 선거판에 불나방처럼 몰려들어 부지런히 앞날의 영광을 계산하는 사람들, 무엇인가를 바라고 하는 모든 행위는 행복한 자유를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참된 삶도 아니다. 자기를 없애고(無己) 욕심을 버리는(去慾) 것이 제 삶을 온전히 할 뿐만 아니라 천하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장자는 위대한 대통령이 되어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발상 때문에 재앙이 만세에 이른다고 보았다. 중국정치사상사에서 유명한 내성외왕(內聖外王)이란 말은 <장자>에 나오는 말이다. 정치는 욕망의 산물이다. 세상을 구한다는 허위야말로 자신과 주변을 모두 구렁텅이에 밀쳐 고통에 빠뜨리는 큰 욕심의 산물이다. <장자>엔 성왕이라 불린 인물들에 대한 분노와 욕설로 가득하다. 황제, 요, 순, 우, 탕, 문, 무, 주공이야말로 천리를 해친 진정한 괴수이며 군주들이야말로 참으로 큰 도적이라고 말한다.
장자는 정치 때문에 원시상태를 잃고 심계(心計)와 지식을 추구하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영원한 평화가 깨지고 근심걱정이 많아지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 말은 시대의 청량제였다. 장자가 살았던 전국시대는 활발한 지식경쟁의 시대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사회의 주류였는데 장자는 여기에 신선한 충격을 던진 것이다. 물론 장자의 말이 전부 옳다는 건 아니다. 순자는 그가 천(天)만 알고 인(人)을 몰랐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사람은 자연적 존재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의 욕망도 자연의 일부라는 점에서 그것을 부정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장자를 지식에 반대한 반지성주의자로 보기는 어렵다. <장자>의 분석은 너무도 지적이고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넘쳐난다. 실제로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없다면 무정부주의적 발상을 할 수가 없다. 그는 세상이 무비판적으로 인정하는 가치들, 관념들, 현상들을 다른 눈으로 보기를 요청한 것이다. 인의를 강조하니 의심이 생기고, 예악을 구분하니 귀천이 생기고, 지식을 좋아하니 혼란에 빠진다는 것이다. 살다보면 분명히 이런 것들 때문에 모기에 여기저기 물린 듯 밤새 잠을 설치는 경우가 많다. "인의로 자기를 버리는 사람은 적고 인의로 이익을 보는 사람은 많다"('서무귀(徐無鬼)' 편)는 장자의 분석은 일리가 있다. 권력의지가 있느니 없느니, 포스가 느껴지느니 않느니 따위의 말로 욕망을 조장할 것이 아니라 권력욕을 비판함으로써 권력을 자연에 돌려주자는 것이 장자의 참뜻이 아닐까. 장자는 불공평한 현실에 대해 비판했던 것이며 민정(民情)에 순응하는 정치를 요구했던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