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와 거깄노. 오늘 소주 한잔하기로 했다 아이가. 이렇게 가면 우짜노 이누마야. 이같은 불효가 어딨단 말이가 흑흑.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다시 보자 친구야"
11일 오전 12시.
부산 영락공원 4번 화장로 앞에는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버린 한 민영통신사 기자를 배웅하기 위한 지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눈물로 범벅된 친구들과 가족들은 언론에 대한 가득한 열정으로 대를 이어 기자가 되고 싶어 했던 그가, 고통스러웠을 결정을 하는 순간까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아연해 하며, 찢어지는 가슴을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쓸어내고 있었다.
"몸도 정신도 너무 망가져서 더 이상 힘이 나질 않습니다. 결국 이런 선택을 하게 됐습니다. 국가기간통신사의 벽에 한없이 작아지는...제가 싫습니다. 결국 발로 뛰어 조금이나마 격차를 줄이려고 했지만 안 되네요. 모든 것이 제가 못난 이유겠죠"
고작 이 몇 마디로 세상의 부조리에 고함친 민영뉴스통신사의 한 젊은 기자가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2시간이 지나고 힘겹게 수골실로 향하는 동안에도 지인들의 통곡은 멈추지 않았다.
누가 기자가 되고 싶어 했던 이 앳된 청년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조문객들은 자신과 세상에 반문하면서 장례절차가 계속되는 내내 연신 눈가를 훔치며 "잘 가라 친구야 잘 가라 아들아 이 더러운 세상에 모든 한 내려놓고 편히 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세상 사람들에게 김 기자 32살 짧은 평생은 과연 긴 기억들로 남을 수 있을까.
숨진 당일 단 한 개의 신문에도 나지 않은, 쌍팔년도 공장노동자의 죽음만도 못한 그 길을 뭐 그리 좋아 가려 했을꼬.
장례절차가 끝난 뒤에도 조문객들은 한동안 원통함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가슴속에서 밀어내지 못한 채 멍하니 영정 속 김 기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김 기자는 지난 9일 오후 자택인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아버지와 얘기 후 손을 씻으러 간 찰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급히 구급차로 이송했으나 그를 다시 세상으로 오게 하기에는 시간이 허락지 않았다.
김 기자는 배타적인 기존 출입기자단의 높은 벽과 기사 경쟁 부담 등으로 심한 갈등을 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사망한 기사는 그가 근무했던 언론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쓴 마지막 기사는 2017년 2월 8일 오후 4시쯤 포털에 올라온 '수산업계와 부산지역 시민단체 관계자들의 남·서해안 배타적 경제수역 내 어장 황폐화를 막기 위한 모래 채취 중단 촉구 기자회견'이었다.
[취재] 지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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