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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한 장면입니다”

[설악 무산 조오현 스님] 동안거 해제법어(冬安居解制法語)

일장마라(一場麽欏)

“부끄러운 한 장면입니다”

이 법회가 끝나면 안거대중들은 산문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금족 禁足, 하심 下心, 면벽묵언 面壁默言, 오후불식 午後不食, 정진 고행했던 지난 3개월 그 사이 바깥세상은 많이 변했습니다. 여러분들은 휴대전화기까지 반납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모를 것입니다.

대통령은 직무를 정지당했고 헌법재판소는 그 탄핵을 심판하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실업자가 1백 만 명 백수 白手가 4백 5십 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나라 빚과 함께 가계 빚은 늘어만 가고, 소득은 줄어들고, 물가는 오르기만 하니, 서민들의 살림이 비절참절 悲絶慘絶 말을 다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 국민들은 화가 많이 나 있습니다. 이럴 때 대중들은 몸가짐을 소종멸적 掃蹤滅跡 조심해야 합니다. 고행 정진했다는 생각, 깨달음을 얻었다면 깨달음을 얻었다는 집착과 함께 그 흔적까지 다 지우고 몸에 힘까지 다 빼고 떠나야 합니다. 자기로부터 무한정 떠나고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새벽마다 불전에서 행선축원 行禪祝願을 합니다. 축원문 끄트머리에 “내 이름을 듣는 이는 삼악도를 벗어나고 聞我名者免三途 내 모습을 보는 이는 모두 해탈할 지어다. 見我形者得解脫”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과연 내 이름을 듣는 이는 삼악도를 벗어나고 내 모습을 보는 이는 해탈할 수 있을까? 이렇게 자문자답 자신을 돌아보고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조심 걸어야 합니다.

▲설악 무산 조오현 스님.

가다가 사람도 짐승도 만날 것입니다. 사람과 짐승을 차별하지 마십시오.

언론보도에 의하면 가까운 시일 내에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있을 것이라 합니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떠들어대는 정치인들의 추태가 점입가경 漸入佳境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허물은 감추고 남의 허물은 들춰내는 것이 마치 선거 때마다 남발하는 공약 같다고 합니다. 사실 자고나면 남을 헐뜯으며 깎아내리는 종잡을 수 없는 유언비어가 나라를 어지럽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스님들을 보면 뭘 좀 많이 안다고 지레짐작하고 이번에 누가 대통령이 되냐? 고 물을 것입니다. “삼독 三毒의 불길을 잡는 사람이 민심도 잡고 대권도 잡는다”고 정중하게 전하십시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상두산 象頭山에 올라 “비구들이여 세계가 불타고 있다. 눈이, 눈에 비치는 현상이, 그 현상을 받아들이는 그 마음이 불타고 있다. 탐욕의 불, 저주의 불, 어리석음의 불길이 맹렬히 타오르고 있다”고 설파하셨습니다.

중생들은 탐욕이 많을수록 탐욕이 많은 줄 모르고, 남을 저주하는 중생은 저주하는 줄 모르고, 잘못을 저지르는 중생은 자기 잘못을 모릅니다. 이것이 모든 중생들의 허물입니다. 중생들은 남의 삶, 남의 죽음, 남의 허물을 다 보면서 정작 자기의 삶, 자기의 죽음, 자기의 허물은 못 봅니다.

그래서 국민적 존경을 받던 인물도 청문회에 나가면 생매장을 당하는 꼴을 우리는 많이 봐 왔습니다. 자기 허물을 보았더라면 아무리 높은 자리를 줘도 무서워서 사양했을 것입니다. 자기 허물을 못 보는 이유는 다 삼독심 三毒心, 삼독의 불길 그 집착 때문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나 부처님까지도 그 사람의 삶의, 행위의 그림자는 그 사람을 따라 다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어디 가서 좋은 일을 좀 하면 좋은 소문이, 나쁜 일을 하면 나쁜 소문이 따라 다닙니다.

사람이 죽을 때 아무 것도 갖고 가지 못하지만, 그 사람의 삶의, 행위의 그림자는 저승까지 따라갑니다.

자기의 허물을 보는 사람은 남의 허물을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않습니다. 자기 허물을 보면 남의 허물은 보이지 않습니다. 삼독의 불길을 잡으면 자기의 허물이 보입니다. 자기 허물을 보는 사람은 행위의 그림자가 부끄럽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제일로 무서운 사람입니다. 청검하고, 사사로움이 없고, 공명정대 公明正大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삼독의 불길을 잡은 사람은 자기 허물을 보는 사람이고, 자기 허물을 보는 사람은 공명정대한 사람이고, 이번에 공명정대한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각종 매체에 크고 작은 사건들이 보도되고 있는 것을 보는데 그것이 다 무진법문 無盡法門입니다. 고위공직자, 대통령, 국회의원, 대기업회장 그리고 온갖 잡범들을 형무소에 보내는 것은 검사 판사가 아닙니다. 그들 행위의 그림자가 붙들어 쇠고랑을 채우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다 자승자박 自繩自縛입니다. 이것이 다 살아있는 법문입니다.

선 禪에서는 이것을 생동하는 말, 활구 活句 또는 다함없는 무진구 無盡句라 합니다. 고대 중국의 화두 이 뭣고? 시시마 是是魔, 무자화 無字話, 뜰 앞의 잣나무, 조주사문 趙州四門, 마조백흑 馬祖白黑등 천 칠백 공안에는 시비인 是非人만 있고 무사인 無事人은 없습니다. 오늘의 고통 중생의 삶, 아픔이 없습니다. 천칠백 공안 이 흙덩어리는 다 깨트려봐야 흙먼지만 일 뿐입니다. 불심 佛心의 근원은 중생심 衆生心입니다. 중생의 아픔이 없는 화두는 사구 死句 흙덩어리입니다.

한로축괴 韓獹逐塊 사자교인 獅子咬人이라 했습니다. 흙덩이를 던지면 개는 흙덩이를 쫓고 사자는 던지는 놈을 물어뜯고 울부짓습니다. 그 울음소리는 진천 振天, 진천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흙덩이를 던지는 이 노골 老骨, 이 늙은이의 말을 물어뜯고 자신의 울음소리를 내야 합니다. 지금 누가 노골의 말을 쫓고 지금 누가 노골의 말을 씹어 뱉어 버리는가를 지금 노골은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생명을 걸고 찾고 있는 본래면목 本來面目도 그 흙덩이 화두 속에는 없습니다. 오늘의 고통, 중생의 아픔을 화두로 삼아야 합니다.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깨달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받아들이면, 몸에 힘을 다 빼고 중생을 바라보면, 손발톱이 흐물흐물 다 물러 빠지면 중생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됩니다. 중생의 아픔이 내 아픔이 돼야 중생과 한 몸이 되고, 한 몸이 되어 사무치고 사무쳐야, 사무침이 다 해야 “내 이름을 듣는 이는 삼악도를 벗어나고 내 모습을 보는 이는 해탈”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지금 세계는 삼독의 불바다입니다. 모름지기 수행승은 삼독의 불길을 잡는 소방관이 되어야 그림자가 부끄럽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림자가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오래 전에 본 오늘을 말후게 末後偈로 읊고 끝내겠습니다.

오 늘

가재도 잉어도 다 살았던 봇도랑에

맑은 물 흘러들지 않고 더러운 물만 흘러들어

진흙탕 좋아하는 미꾸라지 놈들

용트림 할 만 한 오늘

대한불교조계종 기본선원
조실 祖室 설악무산 雪嶽霧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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