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현상'이란 말이 언론에 등장했다. 보수언론이 오히려 더 안희정 충남도지사를 띄운다. 행간에 역설이 읽힌다. 아무리 지지율이 뛰어도 안희정은 본선에 진출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깔려있다. 진짜 목적은 안 지사의 보수 행보를 칭찬해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이념을 공격하는 데에 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처리될 때까지,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었다.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대통령, 막돼먹은 정부를 한목소리로 비판했다. 딱 거기까지였다.
해를 넘기자 '벚꽃 대선'이란 말이 공공연히 쓰였다. 탄핵 정국과 대선 정국이 병렬로 진행됐다. 성급한 대선 정국에 여야 불문, 시간은 없고 마음은 급해졌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귀국한 지 20여 일 만에 하차했다. 진공상태에 빠진 여권이 더 급해졌다.
반 전 총장의 퇴장을 전후해 보수후보 단일화론이 부상했다. 과거 야권 후보 단일화를 '권력에 눈이 먼 담합'이라고 공격하던 보수의 모순이다. 이 역시 실체는 반(反)문재인 연합이다. 안철수, 유승민, 손학규 등 "문재인 아닌 것"은 모두 보수 단일화 대상이라는 주장이다.
"지금 박 대통령 탄핵으로 흔들리는 보수층은 박 대통령이 밉더라도 그가 추진하고자 했던 안보 노선, 반북 노선은 승계하겠다는 용기 있는 지도자를 원하고 있다. 문 씨의 독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치는 범보수 후보들의 단일화다."(1월 31일 자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
'진보 대 보수', '촛불 대 태극기'라는 틀은 교란이다. 박근혜 정부의 실패를 은폐하는 거짓이다. 최순실 씨의 국정농단이 정점을 찍었을 뿐, 이 정부의 국정은 이미 실패했다. 사드 배치, 개성공단 폐쇄, 위안부 합의는 국익을 해쳤다. 외교와 안보를 진창에 빠뜨려 경제 보복 위험까지 노출시켰다. 보수 정부라도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다.
대선의 중심 맥락은 그래서 정권교체다. 실패한 정부 교체 여론이 어느 대선 때보다 높다. 대부분의 여론조사에 나타난 대로 70~80%에 달한다. 후보별 지지율까지 대입하면 '어대문(어차피 대통령은 문재인)' 같다. 하지만 탄핵 정국 이래 문재인 스스로 얻은 점수는 거의 없다. 높은 지지율, 문재인 대세론은 사실 정권교체론 위에 얹혀있을 뿐이다.
대통령 탄핵 이후에도 '어대문'일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정권교체냐를 고민하게 된다. 두 달에 불과한 초단타 대선에서 먼저 보이는 건 사람이다. 문재인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시점이 오게 된다. 안희정 전 지사가 더불어민주당 안에서,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 유승민 의원,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밖에서 그 길목을 지킨다.
문재인 전 대표의 경쟁자들의 눈에 띄는 보수화는 쫓는 후보들의 필연적인 전략이다. 야권 후보인 안희정 지사, 안철수 전 대표는 야권 지지층의 '전략적 선택'을 노린다. 절대적 비토층이 있는 문 전 대표와 대비되는, 보수와 중도로의 확장 가능성이 이들의 무기다. 안 지사는 벌써 20%에 근접했고 안 전 대표는 대선 완주를 공언했다. 따라서 문재인과의 차별화를 통한 지지율 올리기가 목적인 이들에게 보수 행보와 그 내용을 비판해봐야 달라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
문재인 전 대표도 '진보 대 보수'라는 거짓 틀에 갇혀있다. 사드 배치에 관한 모호함이 증거다. 개성공단 폐쇄, 위안부 합의 문제와 달리 사드 배치는 찬성 여론이 더 높다. 재검토를 주장하면 표가 깎인다. 문 전 대표는 "다음 정부로 미루는 것이 옳다"고 한 말이 사드 재검토 의지로 해석되자 "사드 배치 결정을 취소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다음 정부로 넘기라는 것이 아니다. 한미 간 이미 합의가 이뤄진 것을 그렇게 쉽게 취소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움츠렸다.
사드는 누가 집권하더라도 가장 처음 마주하게 될 국가적 현안이다. 보수냐 진보냐를 뛰어넘는 문제다. 첫 단추를 잘못 맞추면 집권 5년 내내 대외환경에 종속된다. 이런 문제에 머뭇거리면서 '준비된 대통령'을 말하는 건 모순이다. 돌파해야 할 문제를 우회하려고만 든다. 남북문제, 대외관계 전문가들에겐 철학의 빈곤으로 비친다.
어설프게 보수 표심을 쫓다가는 탈이 난다. 문 전 대표가 안보관 논란을 불식하려 영입했던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이 각종 논란만 일으키고 물러난 사례가 그걸 보여줬다. 보수는 물론 진보층도 혀를 찼다.
문 전 대표는 팬덤 현상을 보이는 몇 안 되는 후보다. 하지만 그의 지지 기반은 결코 다수가 아니다. 보수 대 진보라는 틀에 갇혀, 쏟아지는 이념 공세에 수세적으로 대응하면 잘 해봐야 계가 싸움이다.
정치인에게 이념보다 더 강력하게 대중을 움직이는 힘은 진정성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시대를 이끈 비전으로 '빨갱이' 딱지를 돌파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순교자적인 모습으로 전인미답의 길을 걸었다. 헌정 사상 초유의 정권 붕괴로 열린 대선 정국이다. 작은 싸움으로 판을 짜고 수성전만 벌이다간 또 실패할 수 있다. 적폐 청산, 사회 대개혁은 구호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대선 승리는 늘 능동적인 사람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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