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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 행적보고서’가 간첩활동 공소장으로 둔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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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자수 행적보고서’가 간첩활동 공소장으로 둔갑

[홍춘봉의 광부아이랑] ㉕ 27년간 ‘광부간첩’ 올가미 쓴 이병규씨

27년간 ‘광부간첩’ 올가미 쓴 이병규씨

이병규씨 일행이 인천항에 도착하자 경찰 대공수사관을 비롯한 중앙합동 신문반원들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천경찰서로 호송되어 시작된 조사는 북한에 월경한 동기와 북한에서의 행적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였다.

이씨 일행은 1주일간 인천경찰서 주변 여관에서 머물며 조사를 받았다.

ⓒ인천남동경찰서

선원들의 행적을 훤히 꿰고 있는 조사관들에게 어설프게 답변하거나 거짓으로 진술하는 선원들도 있었다.

이씨는 평양에서 간첩교육을 받으면서 지시받은 구체적인 지령내용과 혁명투쟁에 대해 어느 선까지 자백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내용 등 북한에서의 모든 행적에 대해 1분 1초의 시간까지 모조리 자백했다.

또 평양에서 둘러본 김일성 생가와 인민문화궁전 등 주요 명승지와 산업체 등 견학코스까지 밤늦게까지 조사와 진술은 계속 되었다.

조사관들은 선원들에게 진술조서를 나눠준 뒤 북한에서의 행적에 대해 지금까지 누구를 만났고, 어떤 대화를 나눴으며, 심지어 어떤 밥을 먹었고 이들이 묵었던 여관과 식당의 밥그릇, 테이블 형태까지 상세히 기록하게 하였다.

이병규씨를 포함한 대부분의 선원들은 북한에서의 행적과 학습내용에 대해 거짓 없이 사실대로 100% 진술하거나 진술서에 기록했다.

그러나 흑산도에서 승선했던 최수용씨는 노동당 입당과 선원대표 선서 등을 밝히면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가 나올까 두려운 나머지 이런 사실을 은폐하다가 조사관에게 폭행을 당하는 등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당시 북한에 강제로 나포되었다가 귀환한 어부들은 중앙합동신문반의 조사를 받고 자수를 한 다음 간첩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면 그대로 훈방되었다.

그러나 나포선원들이 급증하자 정부는 1969년 11월부터 귀환어부에 대한 처리방법을 바꿨는데 11월 3일 인천항에 입항한 이병규씨 일행이 첫 적용대상이 되었다.

11월부터 바뀐 나포선원 처리지침은 1차 합동조사 후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은 다음 유무죄를 판단, 무죄판결을 받은 선원에 대해 석방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1969년 10월까지 나포됐다가 남한으로 풀려난 선원들은 1주일가량 조사를 받은 다음 북한에서의 행적을 사실대로 자백하고 각서를 쓰면 석방이 되었지만, 11월부터는 재판을 거쳐 석방여부를 가리게 된 것이다.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할 처지의 이씨 일행은 4일 전인 10월 31일 인천항에 도박했으면 재판도 없이 무죄 석방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바뀐 규정 때문에 그토록 기대했던 부모형제가 기다리던 집 대신에 교도소에 수감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이병규씨 등 6명의 흥덕호 선원들은 인천교도소에 수감된 이후, 변호사를 선임해 6개월간의 재판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병규씨의 회고.


“인천경찰서에서 1주일간 조사를 받았는데 나는 이틀 만에 조사가 모두 끝났다. 북한에서 어떤 일을 경험했고 무슨 교육을 받았는지 또 어느 곳을 견학했는지 100% 사실대로 진술하고 기록했다. 특히 간첩교육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내용까지 밝히고 경찰 조사에서 어떤 내용은 밝히지 말라는 부분까지도 진술했다.

이 때문에 나는 이틀 만에 조사가 마무리되어 나머지 5일간은 저녁에 술을 마시며 잡담을 했다. 그런데 보안사는 나중에 인천경찰서에서 진술한 기록을 복사해 내가 남한에서 간첩활동을 실제 한 것처럼 조작했더라.

방송국에 엽서를 보내 접선자를 만나도록 하고 장성광업소 광부나 공장 동료들에게 북한을 찬양했다는 식으로. 검찰에서 공소장에 기록한 내용을 보니 인천경찰서에서 진술하고 기록한 내용 그대로 실행한 간첩으로 포장한 것으로 말이다.”

이씨 일행은 수원지방법원 인천지원에서 1970년 5월 11일 반공법 위반 및 간첩미수죄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았고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1심에서는 무죄판결이 내려졌으나 검찰은 무슨 억하심정인지 1심에 불복해 항소하는 바람에 2심까지 불구속 상태로 재판이 이어졌고, 2심 재판부에서는 당연히 무죄를 선고했다.

이병규씨는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던 자신에게 15년의 세월이 지난 이후, 갑자기 자신을 간첩으로 왜 몰아가는지 원통하고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비록 북한에서 6개월 가까이 간첩교육을 받았지만 타의에 의한 것이었고, 귀환 후 자수를 한 뒤 간첩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고 지난 15년 동안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온 대한민국 국민이라 자부하였던 자신에게 간첩이란 올가미를 씌우는 상황을 보고는 일이 크게 잘못 꼬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부인과 자녀들은 지금쯤 자신의 안부에 대해 크게 걱정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지만 다른 공상을 할 여유조차 보안사 수사관들은 주지 않았다.

절망의 끝자락 밖에 보이지 않는 보안대 지하 취조실은 백열등 자체만 해도 사람의 혼과 정신을 모조리 빼앗아 갈 것 같았다.

지하실에서 보안사 수사관들은 처음에는 별다른 취조나 조사 없이 잔뜩 겁을 먹도록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다가 본격적인 고문을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한 고문은 ‘잠 안 재우기’ 고문이었다.
보안사 수사관들에 의해 3일 밤낮으로 잠을 재우지 않은 탓에 이씨는 잠이 쏟아지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보안사 수사관은 지하실 출입구에 총을 든 군인에게 보초를 세우고 이씨에게 “당신, 태어나서 이곳에 연행될 때까지 했던 일과 모든 상황에 대해 하나도 빠트리지 말고 사실대로 기록하라”며 “만약 거짓을 쓰거나 빼놓은 부분이 있으면 그냥 두지 않겠다”며 협박을 했다.

이씨는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질린 가운데서도 어쩔 수 없이 의자에 앉아 자신의 지나온 과거를 백지에 적어내려 갔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에서도 인간의 본성은 그대로 나타났다.

자신의 지나온 삶을 적다가 장시간 잠을 못잔 탓에 꾸벅꾸벅 졸면 수사관이 주먹으로 이씨의 얼굴을 내지르며 “이 새끼, 쓰라는 진술서는 안 쓰고 졸고 있어!”라고 하면서 사정 없이 주먹을 날렸다.

잠깐 졸다가 별이 번쩍하는 충격을 받은 이씨는 마지못해 또다시 자신이 지나온 과거를 백지에 적어내려 갔으나 그런 상황에서도 다시 조는 일은 반복 되었고, 그때마다 수사관들은 주먹과 발길질로 이씨의 졸음을 쫓아냈다.

보안사 수사관들은 1명이 4시간동안 이씨를 조사 및 취조한 뒤에 또 다른 수사관과 교체하면서 휴식을 취했지만 이씨는 24시간 눈 한 번 붙이지 못하고 보안사 수사관이 준 백지에 지나온 이야기를 적어야만 하였다.

이렇게 24시간 꼬박 잠을 못자고 의자에 앉아 글을 쓰는 고역은 상상을 초월했는데 백열등 아래서의 이러한 고문과 심문이 계속되자 이씨의 눈에는 닭똥 같은 눈꼽이 끼였고,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다 못해 퉁퉁 부어올랐다.

이처럼 잠 안 재우기 고문이 계속되자 밤낮의 구분은커녕 몸과 마음이 체념상태가 되었다.

이씨는 스무 살의 나이에 피치 못하게 어선에 승선했다가 북한에 피랍되어 간첩교육을 받은 내용을 비롯해 고향에서 결혼과 군 입대, 전방과 논산훈련소에서 조교로 충실히 근무하면서 사령관 표창을 받은 내용까지 상세히 기록하였다.

또한 이씨는 1974년 군에서 제대한 후 인천에서 처자식과 안정된 직장생활을 위해 비료를 생산하는 경기화학에 입사하여 상차 반에서 열심히 근무했으나, 경찰의 보안감찰 때문에 1년 만에 강제로 쫓겨난 사실도 상기하였다.

이어 이천제강에 단순 노동자로 입사 했으나 역시 경찰의 보안감찰로 이번에는 6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이후 양식기를 만드는 국진화학에 취업을 하였다.

양식기를 만드는 회사는 일이 힘들고 작업조건도 매우 열악했는데, 작업을 하다가 오른쪽 얼굴에 큰 부상을 입었으며, 6개월간 산재 환자로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치료가 끝난 뒤 회사 측에서는 한 푼도 보상을 해주지 않았고, 경찰의 감찰 때문에 또 다시 정든 직장을 떠나야만 했다.

그러다가 이웃의 소개로 동신타이어에 입사를 하였으며, 누구보다 근면 성실한 모범 노동자로 근무하였다.

다행히 동신화학에서는 3년 동안 열심히 근무한 끝에 진급의 기회가 찾아왔지만 담당이사가 이번에는 이씨의 진급에 제동을 걸었다.

경찰이 매월 한차례씩 찾아와 인사담당 이사에게 이씨의 동태를 살피며 캐묻는 것이 귀찮아 담당이사가 자신의 진급을 막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결국 이씨는 눈물을 머금고 동신화학을 퇴직한 사실을 진술하였다.


▲탄광부. ⓒ박병문 작가

이처럼 타의에 의해 6개월간 북한에 강제로 끌려갔다 온 전력으로 인해 안정된 직장생활을 제대로 못하게 되었다는 참담한 현실을 인식하고는 생에 대한 환멸을 느꼈다.

당시 이씨는 인천에서 이런 생각을 하며 밤늦도록 술을 마시다가 만취가 되어 생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고 죽고 싶었던 심정이었으며, 곧바로 경인선 철길로 달려가 세상을 하직키로 작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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