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간 ‘광부간첩’ 올가미 쓴 이병규씨
평양에서의 학습이 막바지에 접어든 1969년 10월 하순, 중앙당에서 거물급 인사가 방문했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이라는 50대 중반의 남자는 이병규씨를 비롯한 선원 31명을 개별면담 형식으로 학습점검에 나섰다.
“현재까지 학습 받은 내용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 시험 하겠다. 먼저 남조선에 내려가면 어떠한 방법으로 혁명투쟁을 해야 하는지 답변하라. 또 지하당 조직과 상부선 조직원이 찾아 갔을 때 위험신호와 접선방법을 말하라.”
이병규씨가 수십 차례, 귀에 박히도록 학습 받은 혁명투쟁 내용과 접선방법 등의 정답을 말하자 부위원장은 박수를 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동무는 학습을 매우 열심히 받아 혁명투사로서의 자격을 갖추었으니 명예스러운 조선 노동당에 가입시켜 주겠다.”
이병규씨가 김일성 초상화 앞에서 오른손에 들도록 한 뒤 선서문을 낭독하도록 지시하였다.
“선서! 이병규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노동당에 가입함으로서 김일성 수령님의 교시를 받들어 김일성 수령님의 명예로운 혁명전사로서 남조선 혁명통일에 목숨 바쳐 투쟁할 것을 굳게 선서합니다. 1969년 10월 혁명전사 이병규!”
선서가 끝나자 학습을 담당했던 지도원이 이씨에게 당원증을 보여주며 “동무의 당원증을 주면 좋겠지만 남조선 수사기관에 발각되기 쉬우니 통일이 될 때까지 우리가 보관 하겠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그는 조선노동당 입당축하식을 한다며 맥주 3병을 가져다 부위원장과 건배를 하면서 입당을 축하해 주었다.
약식으로 입당축하식이 끝나자 지도원이 입을 열었다.
“동무가 남조선에 가서 할 혁명사업에 대해 다시 한 번 정리해 지시하겠다. 남조선에 귀환하면 북조선의 사회제도와 교육제도 및 눈부신 경제발전상, 농업 및 공업발전상을 비롯해 모든 인민들이 실업자 없이 골고루 잘 살고 있는 공화국의 우월성을 선전하라.
또 평양에서 방송하는 우리의 방송을 듣고 사상교양을 높여야 한다.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 노동자, 농민 가운데 빈곤하게 살며 반정부적 사상을 가지고 있는 성향이 좋은 사람을 골라 포섭하고 지하당을 조직하라.
남조선의 군부대와 경찰서, 검문소 등의 중요 정보를 탐지, 수집했다가 북조선에서 내려가는 상부선 공작원에게 보고하라. 공작금은 다음에 공작원이 동무가 필요한 만큼 주겠다.”
특히 지도원은 선원들이 배반할 경우 본인은 물론 가족들을 몰살 시킬 수 있다는 협박을 곁들였다.
“만약 우리와 약속한 혁명사업을 이행치 않고 배신할 경우, 이미 남조선에 많이 심어져 있는 우리 공작원들이 동무는 물론 동무의 가족까지도 모두 쥐도 새도 모르게 처단할 것이다.
또 동무가 이사를 가거나 어디를 가더라도 우리는 이곳에서도 동무의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 공작원들이 동무의 당원증을 경찰서에 보내서 영원히 햇빛을 못 보게 만들겠다.”
이어 지도원은 남조선에 귀환 후 정보기관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지시를 내렸다.
“남조선에 내려가면 (당국의)심사를 받게 될 것이다. 그때 단체로 학습 받은 내용과 지시받은 내용만을 말하고 별도로 교양 받은 내용과 지시사항을 비롯해 조직원 부호와 연락방법, 입당사실 등을 절대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
남조선 수사기관에도 우리의 지하당 요원이 많기 때문에 동무가 비밀을 말했는지 안했는지 다 알 수가 있으니 명심하라. 특히 동무가 혁명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통일이 이룩되면 동무에게 화천군 인민위원장 자리를 보장해 주겠다.”
통일이 되면 이씨에게 화천군수 자리를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면서 환심을 사도록 했다.
개별 평가 등 ‘학습점검’을 마치고 며칠이 지난 10월 31일 저녁 7시가 되자 평양여관 1층 식당에서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과 지도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선원들을 위한 송별파티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북한잔류를 약속한 흥덕호 선원 이강원 등 9명의 선원들을 제외한 귀환 희망자 22명이 참석했다.
“동무들은 그동안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와서 약 6개월간 김일성 수령님의 혁명사상을 배우느라 수고가 많았다. 내일 남조선으로 내려가면 김일성 수령님의 가르침을 잊지 말고 혁명투쟁에 앞장 설 것을 당부한다.”
이어 선원대표 한 명이 나와 답사를 했다.
“우리는 남조선에서 헐벗고 굶주리다가 김일성 수령님의 따뜻한 품에 안겨 행복하게 지내면서 김일성 수령님의 혁명사상으로 무장하고 떠나게 된 것을 무한히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남조선에 돌아가면 김일성 수령님의 가르침대로 남조선 혁명투쟁에 적극 앞장서 투쟁할 것을 약속합니다.”
답사가 끝나자 맥주와 인삼주를 따라 마시며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남산의 저 푸른 소나무 등을 잇따라 합창했다.
남한행을 결정한 선원들은 송별회가 끝난 뒤 숙소로 돌아와 잠시 후면 당장 고향에 돌아가 애타게 그리던 부모형제를 만날 수 있다는 가슴 벅찬 기대와 희망에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그런 한 편으로는 부스스한 눈을 비비고 ‘혹시 일이 잘못되는 게 아닌가?’하며 불안한 시간을 보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남한에 보내준다고 해놓고 갑자기 마음을 바꿔 북한 잔류를 시키면 항의도 못하는 것이 선원들의 처지였다.
그리고 저녁식사가 끝나자 오후 7시 서해안에서 붙잡혀 온 선원들은 해주로, 나머지 선원들은 동해안 원산으로 출발시켰다.
이병규씨 등 서해안으로 출발하는 선원들을 태운 버스는 2시간만에 해주여관에 도착해 여장을 풀었다.
해주여관에서 하루를 지낸 흥덕호와 제2신흥호 선원 14명은 11월 2일 오후 1시30분 해주인민학교 교정에 나가 당에서 마련한 환송식에 참가했다.
1000여 명의 학생과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마련된 환송식에서 피날레를 장식한 것은 섬뜩한 느낌이 드는 어린 소녀의 송별사였다.
12살 된 인민학교 여학생이 연단에 올라 눈물을 흘리며 감정에 북받치는 송별사의 내용은 정말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감동’의 메시지였다.
“남조선에서 고생하시다가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님의 따뜻한 품에 안겨 잠시 행복하게 지내다 헤어져야 하는 아픔을 뼈져리게 느끼는 순간입니다.
아무쪼록 남조선에 가시더라도 몸 건강하시고 김일성 수령님의 가르침대로 혁명투쟁을 하며 또 다시 만날 수 있는 재회의 기쁨을 맛 볼 수 있는 때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장내를 엄숙하고 장엄하게 하는 송별사가 끝나자 선원대표가 단상에 올라가 답사를 했다.
“저희들은 미제국주의자들에게 고통을 받고 또 미제국주의자의 개가 된 박정희 괴뢰도당이 인민들을 도탄에 빠뜨렸다. 이 바람에 길거리는 깡통을 들고 밥을 얻으러 다니는 거지가 우글거리며 노동자와 농민들은 나무뿌리와 풀뿌리로 연명하고 있다.
이런 남조선에서 살다가 지상의 천국인 김일성 수령님의 품안에 들어와서 6개월동안 잘 입고 잘 먹고, 행복하게 지내면서 김일성 수령님의 혁명사상으로 무장하고 남반부에 돌아가면 우리 모두 혁명투쟁에 앞장설 것을 다짐합니다.”
지도원이 써준 원고를 역시 한껏 감정을 섞어 낭송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어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합창하며 북한에서의 마지막 공식 행사인 환송식을 마쳤다.
환송식이 끝난 뒤 해주항으로 이동한 흥덕호 선원들은 자신들이 나포됐던 어선에 다시 태워졌다. 이때 시간이 11월 2일 오후 4시였다.
고향에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와 흥분에 들뜬 선원들은 나포당시처럼 북한 경비정 2척의 호위를 받으며 ‘따뜻한’ 남쪽나라로 향했다.
군사분계선에서 북한 경비정과 해어진 흥덕호는 해주항을 출발한지 9시간이 지나 인천항에 입항했다.
당시 시간은 1969년 11월 3일 오전1시.
이병규씨를 비롯한 선원 6명은 피랍 5개월 27일만에 꿈에 그리던 남한 땅을 밟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인천항 부두에는 간절히 만나고 싶었던 가족들의 모습은 그림자도 없었고 선원들을 조사할 조사요원만이 싸늘한 시선으로 이들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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