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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문'에게 고언함…문재인은 아직 대통령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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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문'에게 고언함…문재인은 아직 대통령이 아니다

[사회 책임 혁명] 억울해 말고 '패권 비용' 인정하는 게 중요

'벚꽃 대선'이 가시화하는 듯하다. 설을 전후하여 대선 후보들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대선 출마 포기 선언 또한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런 움직임의 하나이겠다. 술자리나 밥상머리에서 대선이 화젯거리로 등장하는 빈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자주 듣는 질문은 "문재인이 될 것 같아?"이다. 내가 그걸 알 리가 없지 않은가 하는 표정으로 머뭇거리면, 누군가 주변에서 "글쎄, 어쩐지 안 될 것 같아"라고 대답한다. "그럼 누가 되나?"엔 "…."

사교 범위가 제한되어 있고, 주변에 열렬한 '친문(親文)'이 많지 않아서 가능한 풍경일지도 모르겠다. 이른바 '친문'진영은, 막연한 느낌이지만, 문재인의 집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사실 딱히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기는 힘들다. 당장 내일 투표한다면, 문재인이 대한민국의 19대 대통령이 될 듯도 하다.

그럼에도 소위 '문재인 대세론'을 선뜻 수긍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나는 '친문'도 아니지만, '반문(反文)'도 아니다. 확고하게 지지하는 후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최소한 '저런 이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정도의 느낌만 있다. 말하자면, 강한 정치 의식을 지녔지만 현실 정치엔 거리를 두는 태생적 비평가 집단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그날'이 오면 제일 먼저 숙청당할 집단의 일원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유권자가 선택할 일이기에 나 같은 사람의 의견이 중요하지 않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듯이 만일 문재인 대세론이 좌절된다면, 무엇 때문일까?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동안 가장 자주 반복해서 등장하였고 앞으로도 자주 등장할 단어, 즉 '패권주의'가 패인(敗因)으로 지적될 것이다. 문재인과 '친문'이 현재로썬 가장 듣기 싫어하고 근거 없는 비방으로 간주하는 패권주의.

우선 분명히 할 게 패권과 패권주의가 다르다는 점이다. 정치 집단이나 세력이 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가운데 우위를 점한 어떤 집단이나 세력이 우위를 기득권화하고 경쟁 구도를 무력화하여 종국적으로 배제를 구조화하는 걸 아마도 패권주의라고 부르지 싶다. 또한 패권을 장악한 후 장악한 패권을 지속적으로 행사하기 위해 패권에 대한 도전을 체계적이고 배제적인 방식으로 차단하는 행태도 패권주의로 정의될 수 있다. 패권을 장악한 집단이 패권주의를 행사하는 적나라한 모습을 우리는 '친박(親朴)'을 통해 충분히 목격했다. '친문'은 '친박'과는 다르기에 비교하지 말라고 경기를 일으킬지 모르지만, 알게 모르게 패권주의는 '친박'과 '친문'을 아우르는 용어로 유통되고 있다.

▲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가 지난 1일 광주 무등산을 등반한 뒤, 문빈정사 앞에 설치된 '무등산 노무현 길' 표지석을 바라보고 있다. 이 표지석은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2007년 현직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무등산에 오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내 '친문'은 패권 세력이다. 분명 현재의 정국에서 대선에서 승리할 매우 유리한 고지를 점한 셈이다. 그러나 만일 대선에서 진다면, '친문'은 패권과 패권주의를 구분하지 못한, 오히려 패권주의를 지키기 위해 일부러 구분을 외면한 데서 그 원인이 찾아질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걱정스럽게도 자주 발견된다. 문재인은 지난 9일 자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친문 패권주의를 말하기에는 친문이 너무 많지 않나"라고 말했다. 패권과 패권주의를 혼동하였거나 외면한 발언이다. 패권주의는 숫자와 관련이 없다.

대표적 '친문'인 정청래의 인식에서도 문재인의 생각이 반복된다. 정청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문재인 패권'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결국 국민이 만들어 준 것"이라며 "아무리 부럽고 배 아파도 국민을 공격하지 말라"고 밝혔다. 그런데 이 글의 제목은 '친문 패권주의를 공격하는 그대들에게'이다. 그의 말대로 현재의 "'문재인 패권'은 국민이 만들어 준 것"임에 동의하지만, 문제시된 건 '문재인 패권'이 아니라, '문재인 패권주의'였다. 정청래는 패권주의에 관하여 해명하는 척하면서 패권을 설명했다. 왜일까.

노무현은 대선 후보로 결정되기 전까지 당내 패권을 가진 적이 없고, 당연히 패권주의를 행사한 적이 없다. 반대로 패권주의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문재인은 노무현과 달리 당내 패권을 가졌고, 지금은 패권주의를 행사한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친노(親盧)'를 계승한 '친문'이 180도 다른 상황에 처했다고 하여, '친노'와 '친문'이 단절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친노'와 '친문'은 단절되어서는 안 되며, 응당 '친문'이 '친노'를 발전적으로 계승하여야 한다.

그러나 대중에게 보이는, 또는 '반문'이 형성하는 프레임에서 '친문'은 '친노'와 달라 보인다. 오히려 '친박'이 '친문'의 데자뷔로 전개될 가능성이 상존한다. 더불어 문재인 대세론에선 과거 경선 과정에서 노무현이 만들어낸 드라마가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대선 재수 및 대세론과 맞물린 민주당 내 패권은 문재인에게 구태의 그림자를 드리우게 한다. 노무현의 계승자는 철학이나 정신은 논외로 하고, 위상에서 노무현의 대척점에 서게 된 것이다.

'친문'은 나의 분석에 대해 악의적인 누명이라고 길길이 화를 낼 법하다. 그러나 대선에 승리하려면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해야 한다. 노무현과 같은 감동의 역정이 부재한 문재인이, 패권주의에 맞서 싸운 노무현과 달리 패권으로 노무현을 계승하려고 한다면, 그 패권이 패권주의가 아님을, 경쟁하는 다른 정치세력에겐 아니어도 적어도 유권자에게 정확하게 인식시켜야 한다.

패권주의가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설명해야 할 주체는 패권을 가진 세력이다. 패권을 가진 측이 패권을 갖지 못한 측으로부터 패권주의라고 공격당하는 건 일종의 '패권 비용'이다.

패권주의의 실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패권주의라는 낙인의 고착이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만일 치열한 반성 끝에 패권주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다면 당연히 전면적이고 전격적인 패권주의의 청산에 돌입해야 하고, 만일 아무리 고민해도 패권주의를 인정할 수 없다면 그때도 없는 패권주의라도 청산해야 한다.

국민들 중에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소망이 단지 '친박'이 차지한 장관·수석·기관장 자리를 '친문'이 차지하는 광경을 보려는 데 있지 않다. 촛불 민심이 바라는 건 '친국민'·'친역사' 정권의 창출과 개혁과제의 실천이지 특정인이나 특정 세력의 패권이나 패권주의가 아니다. 문재인과 '친문'은 알아야 한다. 문재인은 아직 대통령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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