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한국 대선에 출마, 당선된 후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될 경우 '유엔 결의안 11호'(이른바 '사무총장 공직제한 결의안')를 위반하게 되는 현실과 관련해, 국회 입법조사처가 "반 전 총장은 유엔 결의안을 충실하게 준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유권 해석을 내놓았다.
국회 입법조사처가 지난 26일 더불어민주당 김경협 의원(외교통일위원회 간사)에게 제출한 '유엔 사무총장의 임명 조건에 관한 유엔총회 결의의 검토'라는 입법조사회답은 "결의안 11호는 법적구속력을 의도하였다고 볼 수 있는 단서를 찾기 어렵다"는 해석을 담고 있다.
그 이유로 입법조사처는 "결의안 제4항 ⒝호에서는 '의무'를 명시하는 조동사(shall)를 사용하지 않고 '지침'적 성격의 조동사(should)와 '권고'적 성격의 형용사(desirable)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반 전 총장이 이 결의안의 공직 제한 규정을 위반해도 유엔 측에서 반 전 총장에게 법적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입법조사처는 "법적 구속력이 없다고 하여 반기문 전 총장이 이 결의안의 공직 제한 규정을 무시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공직 제한 규정의 '취지'에 맞게 충실하게 이 결의안을 준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의견을 냈다.
이는 반 총장의 대선 출마에 대한 국제 사회의 부정적 반응을 우려하는 내용으로, 반 전 총장 입장에서는 부담감을 갖게 될 수밖에 없는 해석이다.
국회, 반기문 대통령직 수행시 결의안 위반 전제
입법조사회답 보고서가 갖는 의미는 세 가지다.
첫째, 반 전 총장의 대통령직 수행이 유엔 결의안 위반이라는 지적과 관련해 공신력을 담보한 제 3의 기구가 낸 첫 해석이라는 것이다.
둘째, 반 전 총장이 출마해 대통령직을 갖게 될 경우 '결의안 위반'이 된다는 사실을 전제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즉 '법적 구속력' 여부와 별도로, 반 전 총장은 자신이 직전에 몸담은 조직의 규칙을 정면으로 위반하게 된다는 해석이다.
셋째, 국회는 반 전 총장이 결의안을 위반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권고를 내놓았다. 결의안을 위반해 대권을 노리는 것보다, 위반하지 않고 자중하는 게 더욱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국회는 결의안 위반(대통령 당선)을 전제로 정치적 활동을 하고 있는 반 전 총장의 현재 행보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이는 '윤리적 당위성'에 가까운 문제인데, 반 전 총장은 그 '당위성'을 대놓고 무시하고 있는 상황이다.
입법조사처는 또 제1대 사무총장부터 제7대 사무총장까지, 역대 유엔 사무총장들이 퇴임 직후 국적국에서의 공직 진출을 자제했고, 퇴임 후 가장 두드러진 공직 진출 경력을 가진 제4대 사무총장 발트하임(Waltheim)도 유엔 결의를 준수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반 전 총장의 대선 출마는 유엔 최초의 '유엔 결의안 위반' 사무총장이라는 타이틀에 한걸음 다가서는 일이 된다.
유엔 결의안, '파시즘' 부추겨 2차대전 빌미 준 사무총장 방지 위해 만들었다
그렇다면 1946년, 유엔은 이 결의안은 왜 만들었을까? 국제 조직에서 요직을 역임해 얻은 정보와 인맥이 오용돼 2차 세계대전 발발에 기여했던 실제 사례 때문이다.
입법조사처가 밝힌 결의안의 취지 및 제정 배경은 다음과 같다. 국제연합(UN)의 전신인 국제연맹( League of Nations, 1919~1946) 사무총장이 퇴임 직후 자국의 공직을 수행하면서 발생한 '드러몬드 사건' 때문이다. 이 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기여하게 된다.
국제연맹 사무총장이면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대해 관용적 입장을 갖고 있던 영국인 에릭 드러몬드(Eric Drummond)는 퇴임(1933)과 동시에 이탈리아 주재 영국대사로 부임(1933)했는데, 1935년 이탈리아(무솔리니)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할 당시 드러몬드는 본국인 영국정부과 국제연맹이 이탈리아의 침략행위를 사실상 묵인토록 하는 유화정책을 관철시켰다. 그 결과 이탈리아와 독일 등 파시즘 세력은 국제연맹의 안보기능 약화와 무력함을 간파하게 된다. 결국 국제연맹을 탈퇴하여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중요한 분기점을 마련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국제 사회는 국제연맹을 대신할 국제연합(유엔)을 설립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원인의 하나였던 '드러몬드 사건'을 상기했다. 그에 따라 사무총장의 역할과 함께 그의 퇴임 직후 국적국 공직 진출을 제한하는 결의안 제11호를 1946년 제1차 총회에서 채택하게 됐다는 것이 입법조사처의 설명이다.
'반기문 대권 도전 문제 해소'라고? 국회 '유권해석'에 대한 아전인수
그러나 일부 보수 언론 등은 이같은 국회 입법조사처의 해석을 두고 '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위반해도 처벌받지 않으니 반 전 총장의 대권 길이 여전히 열려 있다는 논리다.
김경협 의원은 "'유엔 결의안 제11호'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원인의 하나인 '드러몬드 사건'이 다시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국제사회의 평화를 위한 다짐인데, 유엔의 최고수장이었던 반기문 전총장이 이를 외면하는 것은 국제사회와 유엔에 대한 배신이며, 제2차 세계대전의 교훈을 망각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양건모 정의연대 공동대표, 최병모 변호사 등이 주도하는 '반기문 대선후보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위한 시민모임(반가시)'도 30일 성명을 내고 "유엔 결의의 경우 반기문 전 총장이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국내법처럼 구속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엔 사무총장을 역임했던 사람이 유엔 결의를 지키지 않으면 누가 유엔 결의를 지킬 것이고, 어느 나라가 유엔 결의를 지키려 할 것인가. 북한에 대한 핵제재 결의안도 지키라고 할 명분도 없어진다"고 비판했다.
반기시는 보수 언론의 논리에 대해 "조선일보는 '국회 입법조사처, 반 전 유엔 사무총장, 퇴직후 공직 가능'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중앙일보는 '입법조사처, 퇴임 사무총장 공직 참여 가능…潘, 대권출마 문제 해소되나'라고 기사를 썼다. 보수 진영에 대선 후보가 없다고 하지만 이렇게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은 보수 정론지로써의 위신을 완전히 팔아먹는 처사"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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