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가 극우주의와 극단주의로 몸살을 앓는 가운데 세계 정치 경제를 주도하는 미국에서도 공화당 주류보다도 더 공격적이고 퇴행적인 집단이 트럼프를 내세워 정권을 장악하는 일이 일어났다. 국내적으로도 여성, 소수자, 이민자, 비백인, 이슬람교도 등은 물론 환경 운동과 인권 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 그리고 오바마 케어를 비롯한 각종 사회복지제도와 심지어 언론의 자유에 대해서도 적대적인 트럼프 정권의 탄생은 미국인들에게도 커다란 재앙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트럼프 일당이 추구하는 대외 정책은 미국 내 정책보다 훨씬 더 위협적이다. 특히 공화당 주류와 불화하는 듯 싶었던 트럼프 일당은 급속도로 공통분모를 찾아가며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적 본질을 한층 더 과감하게 드러내고 있다.
'신고립주의', '보호무역주의', '미국 제일주의' 등등 국제정치와 국제정치경제 분야의 학자들과 언론들이 제공하는 세련된 용어로 포장되어 있는 트럼프 정부의 대외정책 기조를 두고 많은 이들이 그 틀 내에서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그러한 세련된 용어를 나열하며 트럼프 정권이 추구하는 대외 정책의 기조가 오바마의 민주당 정권의 정책과 마치 대립되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분명 공화당 정권과 민주당 정권 간의 대외 정책은 그 기조에 있어서 분명 다른 면이 있다. 또한 같은 정당 내에서도 어떤 집단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크게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과도한 정당 중심적 정치와 정책 분석을 피해야 한다. 특히 유일한 헤게모니 국가로서 미국의 대외정치와 정책은 특정 정당이나 특정 대통령의 성향과는 무관하게 돌아갈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부시나 오바마나 트럼프나 공화당 민주당 할 것 없이 미국은 미국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고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른 국가들의 희생을 불사해 왔다. 시기나 역학관계 혹은 정권에 따라 서로 대립되어 보이는 기조를 내세워 왔을 뿐, 대외정책의 기조는 변한 적이 없다. 즉 자유무역을 외치며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주도했다고는 하지만, 자유무역은 미국이 아닌 국가에게 강요한 것일 뿐, 자국은 노골적으로 보호무역의 장벽을 쳐 오기도 했다. 부시 공화당 정권에 평화적 해결을 강조했다지만, 무력을 동원한 주권 국가에 대한 공격과 그것을 위한 비용은 민주당 정권 하에서도 결단코 줄지 않았다.
물론 트럼프 정권은 취임하자마자 미국의 TPP 탈퇴를 선언해서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리며 전 정권과 정반대의 정책 기조를 관철시킬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무엇보다 대 중국, 대 북한 강경 적대 정책, 이란과 쿠바 등 오랜 적대국과의 화해 무드의 반전, 그리고 독일을 위시한 유럽과의 긴장 관계, 중동 정책의 대변화 등 말 그대로 세계 곳곳에서의 미국 정책의 변화로 인한 긴장과 위기가 예견되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이슬람 난민을 포함한 대 이슬람 국가 정책, 멕시코 이주민을 포함한 대 라틴 아메리카 국가 정책도 급격하게 악화될 가능성도 보이고 있다. 앞으로 그가 내건 공약들이 실현될 경우 마치 그 전의 정권들과 근본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다른 미국이 될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될 정도로 많은 것이 변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 급격한 변화를 보이며 수많은 논란과 의구심, 그리고 정책이 실제로 크게 변화할 것임에 틀림없다라는 확신을 갖게 하는 부분이 바로 대 러시아 정책이다. 사실 다른 국가들에 대한 트럼프 정권의 정책 기조는 그로 인한 과도한 지역 내 긴장과 갈등으로 인한 제한의 문제였지 사실상 예측가능한 틀 내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랜 대 러시아 적대 정책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던 미국의 정책 변화는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트럼프 정권의 친 러시아 정책에 대해 단순히 트럼프 개인의 성향 혹은 러시아에 책잡힌 트럼프와 러시아의 밀월관계만으로 설명되어서는 안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단코 미국은 그 어느 정당의 집권 하에서도 그 어떤 대통령의 통치 하에서도 러시아와 밀월관계를 가질 생각이 없다. 트럼프가 푸틴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도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푸틴과 매우 가까운 친러시아 인사인 렉스 틸러슨 전 엑손 모빌 최고경영자를 초대 국무장관에 지명한 것을 두고 미-러 간 밀월관계를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전 세계 언론들이 호들갑을 떨었지만 이 역시 별 의미는 없다. 1972년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닉슨의 중국 방문 전에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 친화할 필요가 있으며, 이러한 전략은 훗날에는 정반대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이 필요할 때도 있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보다 훨씬 더 전인 2차 세계대전에서도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스탈린을 추켜세우기까지 하면서 히틀러의 독일을 무너뜨리기 위해 소련과 우호적 관계를 맺은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공통의 적에 맞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동맹을 포함해 역사적으로 미국은 자신의 단일한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부상하는 새로운 패권 경쟁 대상 국가들을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게 만드는 전략 하에서 행동해 왔으며, 현재 러시아에 대한 접근 역시 그러한 일관된 기조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러한 친러시아 정책으로 미국은 현 국면에서는 여러 가지를 동시에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중국의 힘을 속으로는 크게 두려워하는 러시아를 부추겨 중국을 견제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그 외에도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EU 견제 및 통제, IS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중동은 물론 수니 시아파를 막론하고 세계 곳곳에서의 이슬람 세력에 대한 약화를 위해서도 러시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에 있는 것이다.
러시아도 과거 이와 유사한 정책을 취한 바 있었다. 미국 및 유럽과 대립일로에 있을 때, 돌연 9.11 테러가 일어났고, 이슬람 세력 확장을 저지하고자 하는 공통의 이해관계 속에 러시아는 자국의 영향 하에 있는 중앙아시아와 조지아 등지에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과 알 카에다 세력 퇴치라는 목적 하에 미군 기지 건설을 허용하는 대신 자국 내 체첸 반군 진압을 정당화하고 미국으로 하여금 중앙아시아 등지에서의 이슬람 세력 확산 저지를 대신하게 하는 데 일정정도 성공한 바 있었다. 그런가 하면 미국의 일방적인 이라크 침공으로 인한 유럽(특히 독일과 프랑스)과 미국 간의 갈등 시에 러시아는 매우 교묘하게 유럽을 부추기며 미국과의 대립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도 했다. 이번에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서구의 제재로 악화된 경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미국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며 미국과 유럽의 간극을 이용, 자신의 외교적, 경제적 목적을 달성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들의 예측과는 달리, 이러한 밀월관계는 서로의 이익을 확보한 후 곧바로 와해될 것이다. 러시아가 미국 대선에 개입(?)할 정도로 트럼프 당선을 원했고, 러시아 측에서도 트럼프와 밀월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처럼 보도하고 있지만, 이는 반만 사실이다. 정반대로 러시아 역시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있다. 즉 미국은 같은 중심부로서 큰 틀에서는 이익을 공유하고 있는 유럽은 허용할 수 있으나, 중국의 패권 도전을 강하게 억압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중국 외의 또 다른 패권 국가가 등장하는 것은 절대로 용인할 수가 없다.
흥미로운 점은 미국은 중국과는 경제적으로 상호보완적 관계로 얽혀 있어 물리적 충돌은 자제하는 데 비해, 경제적 관계가 약한 러시아와는 간접적 물리적 충돌도 불사하고 있는데, 특히 유라시아 연합을 구성하며 역내에 자체적으로 막대한 자원과 시장, 중요한 지정학적, 지경학적 입지, 그리고 저임금 숙련 노동력을 보유한 유라시아 연합을 주도하는 러시아라는 또 다른 패권 도전 국가의 등장은 미국으로서는 절대로 허용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중동에서의 IS 사태의 해결, 궁극적으로는 이슬람 세력의 확장 저지라는 목표는 단기간에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서로의 협력 관계는 일정 부분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사태를 러시아에게 유리하게 종결시키는 등 러시아의 급격한 부상을 방조하지는 않을 것이며, 기존 우방국들을 중심으로 미국과 러시아가 영향력 경쟁을 벌이고 있는 전 세계 여러 지역들에서의 갈등은 머지않아 다시 재현될 것으로 판단된다.
많은 전문가들은 미국의 대외정책기조 변화가 세계 정세 변화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현재의 세계화라는 오랜 경향조차 급격하게 변화, 심지어 퇴조시킬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이러한 예측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지만, 미국의 정책 기조가 지금까지와의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정책과는 달라 보일지라도 결단코 미국의 이익, 특히 극소수의 미국 자본가들과 기득권 세력들을 위한 정책의 추구라는 점에서 그 본질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며, 보호무역주의처럼 보이는 정책들조차 신자유주의와 근본적으로 대립되거나 그러한 기조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정책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더해 국가를 막론하고 미국의 이익을 위한 보호무역주의를 강화, 그 질서 속에서의 복종을 강요하면서도 대만과 이스라엘 등 지역 내 소수의 미국 동맹국들이나 친미 독재 정권들을 지원함으로써 미 군산복합체의 이익이 실현되도록 제한된 분쟁을 야기하는 정책도 한층 강화될 것이다. 그리고 북한을 비롯한 전 세계의 많은 지역들이 미국에게 있어서 중국 뿐 아니라 러시아와의 이익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점들이기 때문에 향후 러시아와의 밀월 관계는 중국을 일정정도 견제하는 선까지만 지속된 후 종결될 것이다. 러시아는 금융을 중심으로 하는 이익 구도에서는 미국에게 아직 위협이 되지는 않지만, 그 외의 이익 구도에서는 미국과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무장한 세계화 등으로 표현되며 세계 정치경제 질서를 지배해 왔던 기본 원리는 자본이 아닌 국가가 우위에 서서 국가주의나 민족주의, 보호무역주의 등을 내세우며 마치 (신)자유주의적 질서나 시장근본주의를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원리에 입각한 정책을 펼친다고 해서 질적인 변화를 가져 오지는 않는다. 더욱이 그러한 근본적 변화의 상징으로 보이는 듯한 미국의 급작스러운 대 러시아 친화정책 역시 근본적인 변화와는 거리가 멀다. 트럼프라는 개인 행위자에 과도하게 초점을 맞추거나 집권 정당의 정책 기조에만 근거하는 분석은 한계가 있다. 조금 더 장기적인 역사적 시각과 세계자본주의체제 전체적인 구조 속에서 미국 국내 사회 내 지배 기득권 세력들의 세계 지배 미 재편 전략 속에서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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