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대전 한국원자력연구원에 '백색 비상'이 발생했다. 연구원 내 하나로원자로에서 실리콘 반도체 생산 작업 중 방사능이 누출된 것이다. 방사능 물질이 마모되어 물 표면 위로 떠오르는 사고였다. 다행히 원자로 내에서만 누출되어 큰 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저희 업무였어요. 우리 조합원들 세 명이 있었는데 백색 비상 알람이 울려서 시설 차단하고 밖으로 대피했습니다."
임철홍 씨(38세)와 한상진 씨(37세)가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1995년부터 운영된 하나로 원자로는 연구용 원자로로, 핵연료 및 원자로 재료 개발, 의료용 및 산업용 방사성 동위원소 생산 및 이용 연구 등의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부도체 실리콘 덩어리에 중성자를 쪼여서, 그걸 '조사'라고 하는데요. 그러면 고전력반도체로 변해요. 하나에 약 300만 원 이익이 생겨요. 우리나라가 최다 생산 국가고 품질도 좋죠."
이렇게 생산된 고전력반도체는 고속전철, 자기부상열차, 전기자동차 등에 사용된다.
"우리 일이 아마 연구원에서 돈 벌어주는 유일한 업무일 걸요."
한 씨가 설명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하고 위험에 노출되는 일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해 왔다. 차별은 차별대로 받으면서 말이다.
임 씨는 2004년 입사했다. 대학 원자력공학과 졸업을 앞두고 한 업체에서 연락이 왔다.
"원자력연구원 연구원으로 일할 생각 없느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막상 와 보니 연구소는 맞는데 소속이 다르더라고요. 면접도 연구소 정규직 실장, 과책(과제책임자)에게 봤어요."
한참 개발단계로 바쁠 때여서 임 씨는 입사하자마자 매일 새벽 2~3시까지 실험했다. 동료들이 좋아서 일하는 재미도 느꼈다. 정규직원과 같이 일하고 업무지시도 받고 회의도 같이 했다. 임금은 1800만 원으로 정규직의 3분의 1 수준이었지만 시험 쳐서 들어간 정규직과는 신분이 다르다고 생각하고 불만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리고 2007년 비정규직 보호법이 시행되자 연구원은 임 씨와 같은 도급업체 노동자들을 2년 계약직으로 직접고용했다.
"직접고용되니까 아무래도 중간 업체가 안 끼어서 그런지 임금이 많이 올랐죠."
그리고 2년 직접고용 계약이 끝나자 연구원은 도급업체와 또 2년 계약을 맺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간접고용했다. 그리고 평소와 같이 야근하던 어느 날, 임 씨는 과제책임자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때가 또 도급업체와 재계약을 앞둔 2011년 말이었다.
"과책이 향후 계획을 말하더라고요. 과제원이 12명인데 저를 포함해 핵심 인력 4명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자르고, 빈자리에 신입사원으로 채울 거라고요."
연구원은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높은 10년 이상 경력자들을 해고할 계획이었다. 임 씨는 해고될 동료 선배인 김영칠 씨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실리콘 반도체 개발부터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상용화까지 일궈낸 노동자들은 배신감을 느꼈다. 그리고 노조를 만들기 위해 한 씨와 논의하고 실무를 맡겼다. 노동자들이 한 씨를 찾은 이유가 있었다.
"저는 2011년에 1월에 여기 입사했어요. 사실 여기 들어오기 전에는 금속노조 한라공조사내하청 지회장이었습니다. 3년간 투쟁하다 회사가 부도나서 그만뒀죠."
이후 한 씨는 일자리를 찾다 연구원에 입사했다. 한 씨 역시 과제책임자에게 면접을 봤다.
"와서 보니 다들 정규직하고 똑같이 일하더라고요. 불법파견 소지가 제 눈에는 보였어요. 여기서도 노조 할 생각은 없었는데…. 하하."
당시 원자력연구원에는 10~15개 도급업체 약 800여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과제가 다르면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 조직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하나로원자로 근무자 50여 명을 만나 노조를 하자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별의별 사람 다 있었어요. '나는 정규직 시험 봐서 들어가겠다'는 사람, '왜 이렇게 억지 부려서 정규직 되려고 하느냐?', '나도 왕년에 노조 해봤는데 노조는 아니다',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마라, 괜히 우리까지 피해 본다' 등. 그런 사람들이 지금은 우리 덕에 무기계약직이 돼서 잘살고 있죠."
결국 2012년 8월 17명 만이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한국원자력연구원 비정규직지회에 가입하고,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을 시작했다. 노조가 생기자 과제책임자는 노조 탈퇴를 종용하고 조합원들만 회사 회식과 체육대회에서 제외시켰다. 또 원청 사용자성 증거를 없애기 위해 없던 도급업체 현장대리인을 내세워 모든 업무보고와 지시를 현장대리인만 통해 이루어지게 했다. 현장대리인은 업무경력이 적어 긴급 상황 등 중요업무에 대처할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당연히 현장에서는 업무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았다. 그리고 2012년 9월, 강인범 씨가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해고됐다. 강 씨는 이후에도 복직과 해고를 반복해 노조에서 가장 해고 기간이 길어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이듬해인 2013년 3월에는 계약기간 만료를 보름 앞두고 11명이 노조에 가입했다. 새빛연료과학동에서 핵연료 생산을 하는 (주)코라솔 소속 노동자들이었다. 그리고 곧 계약만료로 해고됐다. 노조는 천막농성을 하고 북대전 IC사거리에서 원자력연구원까지 삼보일배 투쟁을 했다. 지역 국회의원실도 점거했다. 그해 10월 18일에는 조합원 전원이 계약기간 만료로 해고됐다. 대전 고용노동청에서는 불법파견을 인정하고 직접고용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원자력연구원은 시정명령을 이행하지 않아 4억9000만 원의 과태료를 부과했다. 노조는 '고용 안정'을 요구하며 투쟁했다. 국정감사를 위해 국회도 수시로 드나들었다. 해고 기간이 길어지면서 재정마련을 위한 후원주점, 채권사업도 했다. 결국 2014년 1월 10일 원자력연구원과 무기계약 직접고용에 합의한다. 2년 이상 근무자는 바로 무기계약 전환, 2년 미만자는 2년 계약기간을 거친 후 전원 무기계약으로 전환됐다. 도급업체들도 모두 사라지고 조합원이 아닌 비정규직들도 무기계약직이 됐다. 복지는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따라잡았지만, 아직 임금은 정규직의 60퍼센트 정도 수준이다. 노조는 차별시정을 신청한 상태다.
원자력발전 사고는 한 번 일어나면 어떤 재난과도 비교할 수 없이 위험하다. 또 환경문제와도 따로 생각할 수 없다. 위험물 가장 가까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위험한 것을 잘 알죠. 하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면 평온해요. 일상이 되어버리니까 무뎌지고요. 여기 박사급 전문연구원들은 원자력은 잘 알면 전혀 위험하지 않다는 입장이에요. 학식에 대한 자부심도 크고, 자신들이 에너지 발전에 이바지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해요."
환경단체의 입장과 정반대다. 원전 사고가 나지 않더라도, 사용후 핵연료(핵폐기물)는 최소 10만 년이 지나야 안전한 수준이 되는데, 핵폐기물 처리비용과 노후 원전 해체 비용, 사고 위험성 등을 감안하면 타 에너지에 비해 경제적이지도 않다고 환경단체들은 주장한다. 앞으로 원전의 미래에 대해 노동자인 이들은 어떻게 생각을 할까? 임 씨는 이렇게 말한다.
"필요악. 점진적으로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장 대체할 방법이 없으니까요. 원자력산업 종사자도 엄청 많고요.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고 봅니다."
노동자의 권익 향상을 위한 투쟁은 곧 사회 정의와도 맞닿는다고 보아왔다. 원전은 없애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다. 원전을 없애고 노동자의 생존권은 보장하면 된다. 그런데 그런 정책은 대단한 혁명이 일어나야 나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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