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출판 거목' 박맹호의 말 "책은 쇠퇴하지 않는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출판 거목' 박맹호의 말 "책은 쇠퇴하지 않는다"

민음사 박맹호 회장 별세 향년 84세... 한국 문학 성장 산역사

국내 거대 출판그룹 민음사 박맹호 회장이 22일 오전 0시 4분 향년 84세에 노환으로 별세했다.

충북 보은에서 태어난 박 회장은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 재학 시절부터 책을 가까이 했다. 1955년 제1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낸 단편 <자유 풍속>이 1등을 차지해 소설가로 등단할 기회도 맞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승만 정권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당선이 뒤늦게 취소됐다. 이후 그는 몇 차례 등단 시도를 끝으로 책을 만드는 일에 인생을 걸었다.

박 회장은 대학 졸업 후 1966년 서울 청진동 옥탑방에서 민음사를 창업했다. 처음 펴낸 책 <요가>부터 2만 부 가까이 팔리며 소위 말하는 '대박'을 냈다. 출발은 좋았으나 대중의 마음을 내내 잘 읽지는 못했다. 소설가 유주현의 <장미부인>에 큰 기대를 걸고 대대적인 광고전을 벌였으나, 사업에 치명타가 됐다. 어느새 3000만 원에 달하는 빚더미에 올랐다. 약사였던 아내가 활명수를 1원씩 팔아 출판사 사업비로 충당하던 시절이었다.

책 외판 조직을 강화한 후 조직은 재건됐다. 고은 시인이 민음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것도 이때 즈음이다.

민음사 스타일의 시리즈 기획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1970년대 들어 박 회장은 '세계 시인선', '오늘의 시인 총서' 시리즈를 시작하며 순문학을 시리즈 카테고리로 엮어 대중에게 과감히 소개했다. 민음사의 시 시리즈는 일본어판을 중역한 이전의 번역본과 달리, 외국시의 번역을 한국 문학가에게 맡겨 우리 스타일로 되살렸다는 호평을 받았다.

외국의 유명 시인을 소개하는 '세계 시인선'과 한국 신인 시인을 발굴한 '오늘의 시인 총서'는 1970~80년대 한국 시 전성기의 밑거름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늘의 시인 총서'를 통해 김수영, 김춘수, 고은, 천상병, 박재삼, 황동규 등 한국 시단의 거목이 대중과 만났다.

시집 발행 시기 가로쓰기를 단행본 출판사 최초로 시도 가로쓰기 전면 도입도 박 회장의 공이었다. 민음사의 가로쓰기는 이후 출판계 모두가 따라하는 전범이 됐다.

민음사의 시리즈 기획은 소설과 인문·사회·기초과학 분야 단행본 기획으로 이어졌다. '오늘의 작가 총서'는 한수산, 이문열, 최승호, 이혜경 등 현대 한국 문단의 거목을 발굴하는 길이었다. 이문열에게 민음사를 대표하는 스테디셀러 <삼국지> 집필을 제안한 이도 박 회장이다. 당시 이문열은 등단 3년에 불과한 젊은 작가였던 이문열에게 삼국지 연재를 과감히 제안했다. 이문열의 <삼국지>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여태 1800만 부가 넘게 팔리며 한국 출판 사상 가장 많이 팔린 책으로 기록됐다.

'이데아 총서', '대우 학술 총서' 등의 기획 시리즈는 그간 교재 출판 수준에 머물렀던 기초 학문 출판이 오늘날 단행본 브랜드로 자리 잡는 기초가 되었다. 이후 민음사는 비룡소, 황금가지, 세미콜론, 반비, 사이언스북스 등 각 분야 전문 브랜드 자회사를 통해 독자 취향에 맞는 출판 브랜드를 키워나갔다.

책 디자인의 중요성을 일깨워 전문 편집자 시대를 여는 길도 박 회장이 닦았다. 아침부터 새벽까지 일하는 게 당연했던 시대에 박 회장은 한국 최초의 북 디자이너로 일컬어지는 정병규 정병규학교 대표에게 오후 3시 출근을 허락하는 한편, 디자인에 관한 전권을 일임했다. 정 씨의 '올빼미 업무' 습관을 배려해야 책 디자인이 살아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책은 예술품"이라는 박 회장의 지론이 한국 출판계에 편집 디자인의 중요성을 일깨운 계기가 된 셈이다. 1990년대 편집자를 주간으로 처음 발탁하며 전문 편집자의 위상을 끌어올린 것도 박 회장의 공로다.

박 회장은 생전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 한국단행본출판협의회 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등산을 좋아했고 특히 문인들과 술자리를 즐겼다. 박 회장은 평생을 책과 씨름하며 보냈다. 그는 지난 2012년 12월 낸 자서전 <책>(민음사 펴냄)을 내며 책에 관한 평생 철학을 정리했다.

"한국의 산업 발전에 발맞춰 출판 규모도 커졌지, 축소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나는 책이 인간을 성숙시키는 DNA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통해 인간은 성장하고 완성돼요. 책은 성장의 역사지, 쇠퇴의 역사가 아닙니다."

박 회장은 생전 대통령 표창,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화관문화훈장, 서울시문화상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위은숙 씨와 상희(비룡소 대표이사)·근섭(민음사 대표이사)·상준(사이언스북스 대표)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특1호실, 발인 24일 오전 6시, 장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묘봉리. 02-2072-2020

ⓒ민음사 홈페이지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이대희

독자 여러분의 제보는 소중합니다. eday@pressian.com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