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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박사장과 낭만-사슴 全盛時代

남재희 회고 文酒 40年 - 빠뜨렸던 이야기들 <54>

***5. 민음사 박사장과 낭만-사슴 全盛時代**

민음사(民音社)의 박맹호(朴孟浩) 사장은 내가 큰 신세를 진 대여섯 사람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그를 생각할 때는 가끔 이앙론(移秧論)이 떠오른다. 모를 한 번 옮겨 심어야만 벼농사가 잘 된다는 이치이다. 청주고등학교 동기생의 경우, 가령 세속적으로 출세했다는 사람으로 김덕주(金德柱) 전 대법원장, 박맹호 사장, 그리고 겸연쩍지만 나를 든다고 하자. 김덕주 원장은 서울의 경동고에 다니다가 6.25 피난으로 청주고로 옮겨 왔다. 박맹호 사장도 서울의 경복고에 있다가 역시 전란으로 청주고로 왔다. 둘 다 서울 유학생인 셈이다. 나는 그들보다 훨씬 먼저이지만 청주상업을 2년 마치고 의과대학에 가려고 청주고로 전학했다. 모두 이앙론에 해당된다 할 것이다.

충북에서는 괴산군에서 인물이 많이 난다고 흔히 말한다. 재경충북협회의 모임에서는 초기에 과장해서는 3분의 1쯤이 괴산사람이라는 인상이었다. 괴산은 산이 많고 농토가 별로 없는 곳이라 거기 사람들은 타관으로 많이 나갔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들이 많다. 이앙론.

해방 후 이북서 넘어온 사람들 가운데 남쪽에서 잘 된 사람이 많다. 생존을 위해 대단한 결심으로 이를 악물고 노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역시 이앙론인데, 이 경우에는 북쪽의 상층 사람들(영어로는 그것을 사회의 어퍼 크림이라 한다)이 공산치하를 피해 넘어 온 경우가 많으니 본래 수준이 있었다는 점도 고려에 넣어야 할 것이다.

참, 박사장의 경우도 이앙론에 보태어 본래의 수준을 말하여야 하겠다. 그는 충북 보은군에서 제일 가는 부자집 장남이다. 그러기에 대학을 선택해도 서울대 불문과라는 멋진 과를 택하지 않았던가. 흔히 법과, 의과, 공과 등을 빵의 학문이라고 하는데, 나는 의과에 갔다 법과를 졸업했으니 빵의 학문을 맴돈 셈이다. 서양의 연구 논문을 보니 부잣집 3대, 4대에 가서야 문화예술분야에 눈을 돌리는 자녀들이 많이 생긴다는 것이다. 역시 문화예술은 부의 축적이 있고 난 다음이다.

서론이 길어졌다. 그 박맹호 씨가 졸업 후 집안의 도움을 전혀 받음이 없이, 청진동 뒷골목에 구멍가게와 같은 출판사를 차린 것이다. 60년대 중반에 들어서다. 그의 선친은 국회의원에 네다섯번 출마했는데, 중간에 4.19 후 민주당으로 당선되기는 하였으나 단명에 끝나고 말았다. 장남이니 그 뒷바라지를 안 해줄 수 없어 아까운 시기를 희생한 셈이다. 그 전에는 작은 문예지에 <해바라기의 습성>인가 하는 소설로 당선되기도 했고, 맥파로(麥波路) 씨란 주인공을 내세워 모든 사회악의 근원은 사법부라고 선동하며 데모대를 이끌고 공격하는 정치풍자소설을 쓰기도 했었다. 부산정치파동을 소재로 한 것이라고 바로 짐작이 갈 것이다. 그래서 친구들간에 그의 호칭은 맥파로였다. 대학 졸업 논문을 얼핏 보니 그 때 풍미하던 실존주의에 관련된 것인데 신(神)에 대해 신 씨라고 ‘씨’를 붙이는 익살을 떨기도 했다. 그런 맥파로가 부친의 오랜 선거 뒷바라지에 소설가의 길을 놓친 것이다.

청진동 구멍가게 출판사에는 비슷한 연배의 문학청년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특히 환속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고은(高銀) 씨가 사랑방처럼 쓰며 점심때가 되면 자장면을 시켜 먹는 것을 자주 보았다. 나도 그 통에, 지금은 거물이 된 고선사(그 때의 호칭이 선사였다.)와 자주 술자리에 어울리기도 했다.

맥파로가 그 때 교류한 문인들은 많다. 최일남, 이호철, 유종호, 신경림, 박봉우, 최인훈, 이어령……등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데 특히 근처에 신구문화사가 있어 거기의 신동문(辛東門) 시인과 그의 단짝친구 민병산(閔丙山) 씨와는 매우 가까웠다.

참, 유명한 이어령(李御寧 - ‘어녕’이 아니고) 씨가 신문에 처음 데뷔하는 계기를 만든 것이 맥파로였다. 이 씨는 국문과, 맥파로는 불문과 동기라 일찍부터 친했는데, 당시 학생들에 인기 있던 한국일보 문화부장 한운사(韓雲史) 씨가 맥파로에게 신진기예를 추천하라고 해서 이어령 씨를 천거했는데 이 씨의 기성문단을 우상파괴하는 평론은 단연 각광을 받았었다.

내가 맥파로를 크게 골탕 먹인 이야기를 해야겠다. 서린동의 대포집에 불러내어 계획적으로 술을 많이 마시게 했다. 시계를 볼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러다 11시를 훨씬 지났다. 통금이 있던 때라 돌아갈 일이 큰일이다. 나는 그 때 조선일보 정치부에 있었기에 취재차의 편의를 볼 수 있었지만, 시치미를 떼고 그를 근처의 호텔로 데리고 가서 외박을 하게 하였다. 대단한 애처가일 뿐 아니라 외박 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하는 유교적 분위기의 집안이라 일대사건이었다. 그 후 오래도록 나는 그의 집안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다.

사업도 물이 오르기 시작하여 그 때 유명했던 맥주집 <낭만>에의 출입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참 분위기가 있는 집으로 지금도 그런 맥주집이 있으면 하고, 아쉽게 생각된다. 거기서 박사장은 헨델의 오페라 『크세르크세스』가운데 <라르고>나 영화 『의사 지바고』의 <라라의 노래>를 계속 부탁했다. 그리고 소리 내어 따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 술에 취하면 <축배의 노래>를 “아- 부어라 마셔라……”가 아니라 외설적으로 패러디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그야말로 「孟子之浩然之氣」였다. 한자글귀가 나온 김에 덧붙이면 민음사 사무실엔 그가 애지중지하는 경봉(鏡峰) 큰스님의 「민음활성(民音活聲)」이란 액자가 걸려있다.

사업이 잘되어 종각 뒤에 있는 작은 빌딩을 샀다. 이때 처음 집안의 도움을 받았다 한다. 그리고 1층을 <낭만>의 미스 리를 중심한 삼총사에게 세를 주어 <사슴>을 차리게 했다. <낭만>시대에서 <사슴>시대가 왔다. 주로 문인, 신문기자, 대학교수의 집합장소가 되다시피 하였으니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없고, 곧바로 서울의 명소로 떠올랐다. 약속이 없을 때도 들르면 박사장은 물론 이병주(李炳注) 소설가, 이수성(李壽成), 김학준(金學俊) 교수 등 화려한 면면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무렵 박사장이 나에게 권한 것이 등산이다. 등산에는 일가견이 있고 심취해 있던 그는 우선 북한산을 가잔다. 출발점을 구기동, 우이동, 의정부 등으로 옮겨가며 비봉능선, 우이능선, 포대능선 등 대여섯 번을 다니고는 이제 재미를 붙였을 것이니 됐다고 했다. 참 경치가 좋았다. 서울 근처에 그런 등산코스가 있다는 것은 대단한 축복이다. 그런데 그 때 예상치 않은 고생을 했다. 땀이 많은 나는 되도록 물을 안 마신 것이다. 그랬더니 노랗게 농축된 오줌이 고통을 주는게 아닌가. 그때는 산에서 식사를 해먹을 수 있을 때여서 약수에 밥을 짓고 불고기에 소주를 들면 그야말로 신선노름이었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라는 노래처럼 박사장과의 술이야기는 끝이 없는데 그는 요즘 위가 나빠져 술을 못해 영 재미없게 되었다. 다만 상복은 틔어 <서울시 문화상> <자랑스런 서울대인상>, <인촌문화상> 등을 계속해서 받았다는 위안이 있다.

그는 지금 서울대 문과대 불문과 총동창회장으로 있는데, 대학물은 역시 중요한 듯, 불문과 출신의 감각이나 판단력이 훌륭하다. 정치적 판단력도 가끔 나를 놀라게 한다. 물론 재력에 맞게 약간 보수적이지만. 얼마 전 파주출판단지의 민음사 신축사옥의 입주행사에 갔더니 창비(‘창작과 비평사’가 개명)의 백낙청 교수 등 출판계 거물들이 다 모였다. 이문열과 황석영의 <삼국지>를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민음사>와 <창비> 양쪽 모두에 정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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