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와 에두아르도 이야기
마르코는 도시로 이주한 지 8년 정도 된, 막일꾼으로 살아가는 가난한 주민이다. 초등 교육까지만 받은 마르코는, 빌린 돈으로 버스를 타고 고향을 떠나와 브라질의 포르투알레그리 빈민가에 살고 있다. 그러다 마르코는 이웃의 손에 이끌려 우연히 주민참여예산제의 주민총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당연히 그는 뭐가 뭔지 몰랐고 이런 주민참여 과정이 자신의 삶을 얼마나, 어떻게 변화시킬지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 우연한 걸음이 마르코의 삶을 바꿨다. 마르코는 지방정부의 예산과 관련된 대부분의 안건들을 거의 알지 못했지만, 동료 시민이나 전문가들의 설명을 들으며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 안건들은 마르코가 살던 동네의 문제와 직접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복잡해도 설명을 들으면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다 마르코는 총회에 참석한 주민 10명당 1명씩 선출되는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참여예산제의 의미와 진행 과정, 규칙에 관해서도 배우기 시작했다. 마르코와 동료 대의원들은 시 예산으로 동네에 도로를 내고 하수도를 설치했다. 마르코의 숙원, 도시 빈민들이 거주하는 비닐하우스촌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정비하는 예산도 통과시켰다.
그동안 한 번도 사회운동에 참여하거나 단체에 가입한 적이 없었던 마르코는 이제 매주 총회에 참석하고, 때로는 총회에 처음 온 사람들에게 참여예산제를 설명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 평범한 주민이, 실제로는 기성사회에서 배제되었던 빈민이 능동적인 활동가로 변신한 셈이다.
여기 또 한 사람이 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사는 평범한 중산층 에두아르도. 그는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지만, 정부가 교육과 의료를 책임지기에 심적 여유가 있었고 2000년대 중반에 은행에서 저금리로 돈을 빌려 집도 구입했기 때문에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회노동당' 당원으로 정치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2007년 갑자기 스페인에 심각한 경제 위기가 닥쳤다. 실업률은 20%로 높아졌고 에두아르도도 직장을 잃었다. 경제 위기와 재정 위기에 몰린 스페인 정부는 교육과 의료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그리고 은행은 당장 빚을 갚지 않으면 집을 압류하겠다며 계고장을 보내기 시작했다. 자신이 지지하던 사회노동당마저 이런 정책에 동조한다는 사실에, 에두아르도는 할 말을 잃었다. 직장을 잃고 집마저 잃을 위기에 처해 당장 자녀의 교육비까지 걱정하게 된 에두아르도는 2011년 5월 15일 우연히 솔 광장에 들렸다가 자신과 비슷한 문제를 호소하는 시민들과 토론하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도 잊은 채 벌인 토론은 다음 날, 그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사람들은 이 토론을 '거리총회'라고 불렀다. 그 후 에두아르도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길거리의 풀뿌리정책 워크숍에 참여한 시민들 '인디그나도스'(los indignados, 분노한 사람들)이라고 부르며, 자신이 '15M운동'(5월 15일에 시작된 운동)이라 불리는 사회운동에 동참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에두아르도는 '15M운동'에 참여하면서 자신처럼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플랫폼인 '빠PAH'라는 단체를 알게 되었다. 혹시나 도움이 될까 싶어 모임에 찾아갔더니 차고 같은 공간에 상근자도 없고 자신을 대신해서 문제를 해결해줄 전문가도 보이지 않았다. '이래서 무슨 일이 되겠나' 에두아르도는 낙담했다.
그 와중에 은행은 강제집행을 알리는 최종 통보를 해왔다. 사람들이 정말 도와줄까? 에두아르도는 '빠'에 강제집행일을 알렸고, '빠'가 트위터에 에두아르도의 집 주소와 강제집행 일시를 알리자 수십 명의 사람들이 아침부터 찾아와 서로 팔짱을 끼고 법원 집행관과 경찰에 맞섰다. 은행의 명령을 받은 법원과 경찰은 다음을 예고하고 돌아갔다. 3개월 뒤 다시 경찰이 찾아왔을 때도 역시 수십 명의 사람들이 스크럼을 짠 채 이들에게 맞섰고, 그들은 소득 없이 돌아가야 했다. 이제 에두아르도는 두려워하지 않고 은행과 협상해서 은행이 소유한 빈집에 싼 월세를 내고 사는 '사회적 월세'를 제안할 생각이다. 에두아르도는 이제 '빠'의 사람들과 함께 외친다.
"씨 쎄 뿌에데(Si Se Puede, 우리는 할 수 있다)!"
한국의 김 씨는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매주 토요일이면, 서울 광화문 광장에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모인다. 이들은 모여서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퇴진·탄핵·구속을 한목소리로 외친다. 그 많은 인파가 외치는 소리가 청와대에 들리지 않을 리 없는데, 대통령은 자신이 뭘 잘못했느냐고 되묻는다. 언론과 검찰 수사에서 속속 그 범죄가 드러나고 있는데도 물러날 생각이 없다.
김 씨는 광화문에 꼬박꼬박 들르는 민주 시민이다.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를 자주 보고 팟캐스트도 꾸준히 듣고 인터넷 검색도 하며 정치와 경제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는다. 집 장만할 때 대출받은 것이 있어 좀 쪼들리긴 하지만, 그래도 시민단체에 후원할 정도의 여유는 있다. 현재 가입한 정당은 없다. 예전에 속했던 진보정당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아 탈당한 상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김 씨는 뚜껑이 열렸다. 정말 힘들게 일해도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 한국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다 해 먹었다니…. 알면서 당했다는 사실에 울화통이 터지고, 저런 인간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사람들에 대한 원망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제 술자리 뒷담화는 그만두고, 행동으로 보여줄 때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여 줄까?' 방법이 보이지 않았는데, 주말마다 많은 사람들과 촛불집회를 한다니 부담도 없었다. 그래서 김 씨는 매주 광화문 광장으로 향한다. 분노의 목소리를 외치기 위해서, 사회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이것 외엔 딱히 분노를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해서…. 그리고 광화문에 가면 아는 친구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셈도 있다. 속 시원하게 외치면서 거리행진을 하다 아는 사람 만나면 옆으로 빠져서 밥도 먹고 술도 한잔 하고, SNS에 사진과 글도 올리고. 고단하지만 주말에 할 일이 생겼다.
그런데 마음 한편에는 불안감도 있다. 2008년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 때도 수십만 명이 거리로 나섰지만 뭐가 바뀌었던가. 외려 '박근혜'가 정권을 이어받지 않았나.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96%의 사람들 마음속엔 누가 들어 있을까? 이렇게 거리로 나오는 것만으로 세상이 바뀔까?
인터넷에 들어가니 집회에 대한 폭력-비폭력 논쟁이 한창이다. 한편에는 2008년 집회 때 생각 안 나느냐, 경찰이 차벽 쳐놓고 기다리는데 법을 지키다 보면 세상이 바뀌더냐, 폭력과 비폭력은 누가 정하는 것이냐, 기준이 있긴 하느냐는 이야기부터, 다른 한편에는 물리적으로 치고받으면 누구한테 이로울까, 불법집회·폭력집회로 낙인 찍히면 지금처럼 시민들이 많이 나올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까지 언제부터인가 자주 등장하던 이야기가 또 반복되고 있다.
어쨌거나 관성처럼 다음 주에도 나가야 할 것 같은데, 슬슬 피곤함이 몰려오기도 한다. 언제까지 나가야 하는 건지, 그걸 누가 정해주는 건지, 나는 왜 시위에 나가는 건지, 가끔은 모임에 나가는 건지 시위에 나가는 건지 헷갈리기도 한다.
한국의 김 씨는 브라질의 마르코나 스페인의 에두아르도와 무엇이 다를까? 마르코나 에두아르도만큼 분노나 변화에 대한 욕구가 절박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브라질이나 스페인이 한국보다 훨씬 더 정치적인 나라여서일까? 브라질이나 스페인의 정치참여제도가 한국보다 훨씬 나아서일까?
생각해보면, 김 씨에게는 마르코와 에두아르도에게서 서서히 구성되는 '나'라는 주어가 없다. '나는 나야'라는 식의 고립된 자아가 아니라 사회 속의 나, 많은 타자들 속의 나 말이다. 마르코나 에두아르도에게 정치적인 변화의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지만, 이들은 그 기회를 통해 타자들 속의 나를 만났다. 마르코는 주민참여예산제도를 통해 지역사회에 존재하는 나를 봤다. 에두아르도는 '15M운동'을 통해서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수많은 나의 모습을 봤다.
반면에 김 씨에게 촛불집회는 나를 돌아보는 과정이 없다. 만나고 싶은 사람들만 만나는 게 아니라 내가 몰랐던 타자 속에서 나를 만나야 하는데, 늘 만나던 사람들과 나 자신만 만나고 돌아간다. 그래서 김 씨는 집회 이후에도 그냥 김 씨일 뿐이다.
예전과 달리 요즘 집회에는 자유발언대가 있다. 발언권을 신청하면 대중 앞에서 연설할 수 있고, 때로는 그 연설이 SNS를 달구기도 한다. 문제는 말만이 아니다. 그 말을 하고 듣고 나누기 위해 모이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집회를 통해 누구를 만날까? 폭력-비폭력 논쟁만큼 중요한 것은 '그걸 통해 누구를 만났는가'다. 마르코는 난생처음 자기를 동료 시민으로 대하는 사람들을 만났고, 에두아르도는 같은 처지라는 이유로 달려와 스크럼을 짜며 맞서준 얼굴 모르는 사람들을 만났다. 김 씨는 1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모이는 광화문에서 누구를 만났을까? 그리고 그들과 무엇을 했을까?
정치는 자신을 공적인 존재로 전환시키는 과정이고, 그래서 나와 우리의 경계, 사(私)와 공(公)의 경계가 계속 바뀐다. 나를 무대에 올려놓아야 본격적인 변화가 시작된다. 내가 그 무대에 직접 오르지 않는다면, 마음이 바뀌거나 시간이 없으면 집회는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선택일 뿐이다. 공개적인 정치 행위도 언제든 술자리 뒷담화로 돌아갈 수 있다. 대안을 쇼핑하듯 선택할 수 있다면, 그건 정치라고 볼 수 없다. 내가 이 시스템을 유지하는 주체라고 생각하면 결국 '나도 함께 바뀌어야' 이 시스템도 바뀔 수 있다.
결국 정치는 수많은 타자들 속에서 '나의 위치를 어디에 어떻게 놓을 것인가', '무대 위에 올라 타자를 어떻게 만나고 무엇을 함께 도모할 것인가',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떻게 작은 승리의 경험을 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다. 답이 아니라 질문을 찾아야 하는데, 우리는 언제나 해답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이미 무대에 오른 자들이 해답을 찾아줄 것이라 기대한다.
왜 우리의 혁명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멈췄을까?
1960년 4월 항쟁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쫓겨난 뒤 과도정부가 수립되고, 국회는 내각책임제와 미국식 상하원제와 같은 참의원·민의원 양원제를 도입하는 헌법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불과 50일 만에 헌법 개정안이 마련되었고, 이 개정안은 국회에서 찬성 208표와 반대 3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채택되었다. 이 개정안은 헌법재판소를 신설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헌법상의 독립기관으로 만들었으며, 지방의회 의원과 단체장을 직선으로 선출하는 지방자치제도를 부활시켰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에 대한 사전검열이나 허가제도 금지되어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이런 변화는 그동안 억눌려온 시민의 정치적인 자유를 보장했다.
그런데 헌법 개정으로 새로운 사회의 틀을 짜는 일은 기득권 세력이 아니라 항쟁을 통해 새로이 드러난 다양한 정치 행위자들의 몫이어야 했다. 그들이 공적인 토론을 통해 정치를 바꿔야 했다. 그러나 거리로 쏟아졌던 시민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쫓아낸 이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학생들은 학교로, 시민들은 공장과 사무실로 돌아갔다.
이런 역사는 1987년에도 반복되었다. 당시 집권당인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 맞춰 6월 10일 박종철 군 고문치사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전국에서 열렸고, 22개 지역에서 약 30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그리고 6월 26일의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국민평화대행진'에는 전국 37개 도시에서 약 150만 명이 참여했다. 결국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이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시국사범 대폭 석방 등을 약속하는 특별선언(소위 6.29선언)을 발표했다. 그리고 10월 29일 전두환 정권은 여야 합의로 헌법을 개정하는데, 대통령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대통령의 직선제를 부활시켰으며 국회의 권한을 강화시켰다. 헌법 전문도 수정되고 헌법재판소도 설치되었다.
문제는 전두환 정권이 6.29선언 이후에도 거리에서의 시위나 조직 활동을 방해하면서 개헌을 논의하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야당뿐이었다는 점이다. 이전 헌법 조문의 37%나 되는 많은 부분을 개정하면서도 헌법 개정 과정은 1961년 때처럼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왜냐하면 민정당과 민주당을 대표하는 '8인 정치회담'이 이 과정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7월 31일부터 9월 16일까지 총 48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헌법을 개정했다. 그러면서 기득권 정치인들이 관심을 가진 의제 외에 다른 의제들에 관한 주장은 점점 짓눌렸다. 예를 들어 그해 7월부터 시작된 노동자들의 투쟁, 즉 민주노조 건설과 생존권·노동3권을 보장해 달라는 노동자 대투쟁은 좌파 용공세력으로 규정되어 강제로 진압되었고 노동자가 최루탄에 맞아 목숨을 잃기도 했다.
4월 항쟁 때와 마찬가지로 이 헌법 개정으로 몇몇 제도가 개선되었지만 헌법을 개정하는 과정은 민주주의의 뿌리를 단단하게 만들 새로운 정치 공간을 열지도, 시민의 사회·경제적인 권리를 강화시키지도 못했다. 생활임금이나 노동권의 보장, 자립경제, 국가보안법 폐지 같은 주요한 의제는 헌법 논의에서 배제되었고 대통령을 뽑는 절차와 선거만이 주요한 의제가 되었다. 시민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 돌아올 선거를 기다려야 했다.
이제 2016년 한국으로 돌아와 보자. 거리에 모인 수많은 시민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 대통령의 하야? 거국중립내각? 정치개혁? 모두 중요한 주제들이다. 하지만 여기에 시민들의 공간은 없다. 개헌도 얘기되고 있지만, 이 역시 시민들의 자리를 배정하지 않는다. 수많은 시민들은 열심히 구호를 외치고 행진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이것의 문제는 새로운 정치 공간을 열고 타자를 만나며 나의 정치를 시작할 기회를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와 분리된 의제가 아니라 우리 생활의 의제를 주요한 정치개혁의 과제로 만들고, 지금껏 손잡지 않았던 사람들과 손을 잡으며 우리의 정치를 시작해야 한다. 부패한 기득권에 대한 분노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반영될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밀실에서의 거래가 싫다면 투명하게 공개되는 정치를 요구해야 하고, 권력 남용이 두렵다면 그 권력을 쪼개고 특권을 폐지해야 한다. 선거제도를 바꿔서 민의가 전달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국회의원도 소환해서 죄를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주요한 정책은 반드시 시민들의 동의를 거치도록 법률화하고 공권력이 시민의 편에 서도록 강제해야 한다. 이런 구체적인 개혁을 위해 정당에도 가입하고 때론 정당도 만들어야 한다.
'~해야 한다'라는 당위가 실현되지 않으면, 우리는 '돌아간다'라는 현실 앞에 좌절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반복되는 지진과 위태로운 핵발전소 사고의 위험 앞에서, 이제 우리에겐 돌아갈 곳도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지금 시작해야' 돌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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