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17일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수능을 봤다(단정할 수는 없지만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기에 마지막이라 하겠다). 창가 맨 뒷자리, 같은 교실에 배정된 친구들이 시험을 치르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홀수 번호 친구는 수시 합격생인 듯하다. 창밖을 내다보며 멍 때리고(넋 놓고) 있다. 짝수 번호 친구는 정시인가 보다. 내가 이렇게나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눈길 한번 안 주는 걸 보니 말이다.
제도권 교육과 멀어진 지 오래라, 이런 광경이 조금은 낯설기도 당황스럽기도 하다. 초콜릿과 따뜻한 음료수까지 열렬한 응원을 받으며 수험장까지 들어왔는데, 내겐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시험이 고작 이런 거라니, 허무하다. 하루도 채 안 되는 시간에, 한 사람의 오랜 배움과 노력을 어떻게 평가한다는 말인가.
그동안 나에게 '배움'이란, 주어진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며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새로운 질문들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 속에서 나만의 답을 찾아 토론하고 되돌아보며 사색하는 것이 삶에 대한 공부이자 진리라고 생각해왔다. 국정 교과서를 만들어내는 대한민국의 주입식 교육은 내가 생각하는 배움의 과정과는 맞지 않았다.
"목숨까지 내놓고 정의를 외치지는 마!"
나는 이미 교과서 너머의 세상에서 삶을 배우고 있었다. 엄마는 자주 말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몇몇 사람들에게 착취당하며 살아간단다. 그래서 우리는 연대하며 사회적 약자로서의 요구를 함께 외쳐야 해."
2015년 4월 학교에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인 단원고 3학년 1반 유미지 학생의 언니와 부모님을 모시고 <금요일엔 돌아오렴>(416세월호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지음, 김보통 그림, 창비 펴냄) 북콘서트를 진행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미지 언니가 대안중학교를 졸업해서 그런지 부모님은 우리를 딸, 아들처럼 대해주셨다. 같은 반 친구들과 작은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천개의 바람이 되어'를 연주하고, 자유 발언과 소박한 편지를 통해 마음을 전달하기도 했다. 짧지만 깊은 만남 후, 세월호 유가족과 안부를 묻고 집회에 나갈 때면 먼저 연락하며 인연을 이어갔다. 다른 유가족도 우리를 친자식처럼 가까이 대해주셨고, 자세히 알지 못하던 이야기도 들으며 우리는 더욱 분노했다. 가족들이 말하는 세월호의 진실은 언론에서 비치는 것과는 너무 달랐다.
2014년 겨울 우리가 팽목항을 찾았을 때 바람에 흔들리던 노란 리본과 미수습자 가족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2년이 넘어가도록, 팽목항에서 이렇게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 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광장에서 "세월호 안에 아직 사람이 있어요"를 수없이 외쳤지만, 미수습자 가족들이 겪고 있는 이런 아픔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다. 시민단체나 언론도 유가족에게만 중심을 두었지 미수습자 가족들의 현실을 깊이 다루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미수습자 가족의 그 말씀에서 절박함이 느껴졌다.
이 안타까움이 행동으로 이어져 2015년 11월 14일 나는 친구들과 "세월호 인양과 특별조사위원회 활동 기간 연장"을 외치며 민중총궐기에 참가했다. 그곳에는 경찰이 폴리스 라인을 치고, 캡사이신과 물대포로 시민들의 집회를 단속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경찰의 차벽 앞에서 행진을 멈출 수 없었다. 사람들이 차벽에 가까이 오자 경찰은 거센 물대포를 발사했다. 나와 친구들은 겁이 나는지 아무도 나서지 않던 그 자리로 가 경찰버스에 묶인 밧줄을 당겼다. 주변 몇몇 학생들이 우리와 함께했고, 힘을 모으자 미동이 없던 경찰버스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경찰은 우리를 조준해 물대포를 쐈다. 그런데 우리보다 조금 앞에서 더 거센 물대포를 온몸으로 맞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고(故) 백남기 농민이었다. 할아버지가 쓰러지신 건, 정말 한순간이었다.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그때서야 겁이 나고 무서웠다. 물러나 있던 어른들이 나섰다. 구급차가 왔고 백남기 할아버지가 실려 간 후에도 경찰들은 여전히 시민에게 물대포를 쐈다.
기숙사 생활을 하느라 오랜만에 집에 온 나는 할머니를 뵈러 엄마와 차를 타고 가던 중 민중총궐기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는 운전 중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 얘기가 끝날 때쯤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네 목숨까지 내놓고 앞장서서 정의를 외치지는 마!"
"왜?"
"엄마가 살고 있는 사회니까 엄마가 집회 나갈게. 넌 가지 마!"
"엄마, 앞으로 내가 살아갈 사회이기도 해!"
그동안 내게 "정의로운 사람으로, 위대한 평민으로 살라"고 했던 엄마는 그 순간만큼은 비겁했고 모순적이었다. 내가 본 엄마는 적어도 이 나라를 '비난'이 아닌, '비판'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어떤 상황에서든 정의를 요구하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2008년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며 촛불집회에 나가고 집에 현수막을 걸었으며, 밀양 할머니들과 함께 송전탑 건설 반대를 외쳤고, 영덕 주민들과 탈핵을 외쳤다. 엄마는 또 아빠에게 여성에 대한 불평등한 대우를 비판하며 가사노동의 평등을 요구했고, 학부모로서 학력평가와 주입식 교육방식을 반대했다. 그런 엄마가 끝까지 나에게 한 말은 "너, 한 번만 더 광화문에 나가면 엄마가 잡으러 간다"였다.
광장은 폭력이 난무하고, 위험한 장소이긴 했다. "만약 백남기 농민이 아닌 내가 쓰러졌더라면, 더 많은 언론들이 청소년인 나를 이슈로 만들고 많은 시민들이 촛불 들고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혀주지 않을까?" 나의 이런 말이 엄마를 더 화나게 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난 진심이었다. 엄마가 내 생각에 동조해주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조금 위험했더라도 내 생각과 행동이 엄마가 말했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정의로운 행동이었다고 응원해주기를 기대했다. 나를 걱정하는 엄마 마음이 이해되면서도 화가 났다.
그래서 엄마의 말은 잠시 뒤로 했다. 나는 유학을 갈 것도, 이민을 갈 것도 아니다. 이 나라에서 내 삶과 꿈을 펼쳐나갈 것이다. 나의 권리는 내가 목소리 내서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다시 광장으로 나갈수 밖에 없었다. 전보다 더 많은 불편한 진실과 왜곡된 역사가 나를 광장에 서게 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게 했다. 어느 새인가 "엄마, 서울 다녀올게"라는 말을 굳이 하지 않고 집회에 나갔다. '말해 봤자, 엄만 화부터 내겠지. 아니면 날 잡으러 집회에 오든지!' 엄마 몰래 나온 집회에서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생각을 나누면서 나는 '정의로운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씩 확장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혼자가 아닌 함께이기에
내 행동을 두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나를 더욱 이상한 아이로 만들었지만,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는 유일하게 달랐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시간을 허용했다.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줬다. 그 배움은 그 시간 속에서만 얻을 수 있었다. 질문에 또 다른 질문을 던졌고,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했다.
학교에서는 내가 '이 사회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활동'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지난해 학기 초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 <귀향>(조정래 감독, 2015)을 본 뒤, 졸속 한일위안부협상을 알리는 대자보를 써서 붙이고, 친구들과 국정 역사교과서에 반대하는 플래시몹을 준비해 서울 안국동 사거리에 서기도 했다.
학교에서 아침마다 한 편의 사설이나 칼럼을 읽는 활동을 하는데, 최근에는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학교에 작품 여러 개를 기부하고 강연한 이하 작가도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기에 더욱 관심이 갔다. 우리는 블랙리스트를 작성하는 한국 사회와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에 대해 공부했다. 밥 딜런의 노랫말에서 민주주의를 찾아내고, 우리 삶을 돌아봤다. 날마다 조금씩 글을 읽으며 '민주사회'에 대해 자연스럽게 토론하는 문화에서 나는 조금씩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으로 변한 것 같다.
사실 혼자여서 무서웠던 날도 있다. 10억 엔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을 덮으려고 했던 한일협상에 반대해 추운 겨울, 포항시청과 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했다. 경상도의 보수적인 시선에 겁을 좀 먹고 피켓 뒤에 얼굴을 숨기고 서 있었다. 어떤 아저씨는 "학생이 그런 거 하는 거 아니야"라며 집에 가라고 손짓했고, "저게 뭐야?"라고 묻는 아이에게 "저런 거 보지 마, 빨리 가자"며 손을 잡아당기는 엄마도 있었다. 하지만 춥다며 핫팩을 쥐여 주고, 따뜻한 음료를 전하며 격려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세상이 다 그런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피켓 뒤로 숨겼던 얼굴을 용기 내 들어내고 한 사람이라도 더 알아주길 바라며 1인 시위를 이어갔다.
내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이 이 세상에서 진실이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끝까지 지키고 밝히고 싶다. 이제 나는 더 당당하게 엄마에게 이야기한다. "엄마는 엄마의 세상을 살아. 나는 내가 살아가고 싶은 세상을 만들게." 엄마와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기도 하다. 나는 청소년으로서 입시 경쟁 폐지와 대학등록금 무료, 아르바이트 최저시급 인상을 요구하고, 엄마는 노동자로서 임금피크제, 비정규직 철폐, 성과퇴출제 폐지를 요구한다. 사드배치 철회, 한일군사정보협정 폐기, 원전 중단, 한반도 평화 같은 사안들은 엄마와 내가 한목소리로 외치기도 한다.
처음엔 걱정만 하던 엄마도 조금씩 내 생각을 존중해주었다. 이런 딸을 이해하려는 긴 고민의 과정을 거친 것 같다. 내가 뉴스를 보며 "저건 이렇게 하면 되잖아"라고 이야기하면, 엄마는 "그럼, 이렇게 차별받는 사람들이 또다시 생기지 않을까?"라고 질문하며 새로운 관점을 알려준다. 얼마 전엔 엄마와 같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읽고, 한국의 언론 구조와 빈부 격차에 접목시켜 비교하고 비판했다. 엄마와 소통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고 때론 비판하며, 각자 다른 그러나 같은 길을 함께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엔 아무것도 모르고 엄마를 따라 집회에 갔다. 멋모르고 따라 부르던 민중가요는 내겐 그저 동요였고, 광장은 놀이터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 광장은 나에게는 다른 공간이 되었다. 놀이터 같던 광장은 이제 나를 자연스럽게 되돌아볼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정의를 실현하겠다고 약속하며 광장에 설 때면, 마음을 다시 다잡게 된다.
나의 꿈은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사람들에게 "진실이 침묵 되는 사회에서 진실을 말하고 싶은 이새해입니다"라고 나를 소개하곤 한다.
한때 겁쟁이였던 나는 민주 시민의 길로 한 발짝 나아가고 있다. '대학생'이라는 푯말을 달고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 모르겠다. '책임'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아직 몸소 느끼지는 못 하지만, 내가 살아갈 세상을 내 목소리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사실 하나는 분명히 안다. 때론 좌절도 하겠지만, 내가 보고 느낀 연대의 힘으로 또 한 걸음 내디딜 것이다. '언젠가는 내가 원했던 세상이 한 발짝 앞에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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