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넘게 진행된 '신영철대법관사태'는 13일 나온 대법원장의 유감표명과 경고조치라는 '솜방망이' 처분으로 인해 오히려 심하게 뒤틀려버린 형국이다. 신 대법관은 기다렸다는 듯 '진심으로 송구하다'면서도 '굴레와 낙인을 지고' 그대로 가겠다고 입장을 표명했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장 판사들의 반발은 신 대법관의 사퇴를 요구하는 연판장으로 번질 기세다.
언론 보도들 중에는 이미 헌정사상 다섯 번째 사법파동이 발생할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는 것도 적지 않다. 곧 시작될 각급 법원의 판사회의가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굴레와 낙인을 받은 신 대법관이 그 자리에 남아 있는 한, 법원 내부의 균열은 쉽사리 봉합되기 어려울 것 같다.
폭주할 '기피신청'을 어찌할 것인가?
▲ 법원의 신뢰가 위기에 처했다ⓒ뉴시스 |
그 와중에 법원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는 끝도 없이 추락하고 있다. 이미 신 대법관에 대한 기피신청이 여러 건 이루어졌고, 앞으로 그 숫자가 폭증할 것은 누구라도 전망할 수 있다. 대법원의 최종판결에 운명을 걸고 있는 당사자들은 '재판 내용이나 진행에 관여한 것으로 인식될 수 있는 부적절한 행동'을 했고, 그로 인해 대법원장에게 경고조치를 받은 신영철 대법관에게는 재판받지 않겠다고 요구할 권리가 있다. 공정성을 의심받지 않는 판사에게 재판 받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당사자들의 기피신청에 대하여 대법원은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기피신청을 받아들이면 대법원 스스로 공정성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기피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최종판결에 대한 심정적 불복의 논거를 당사자들에게 미리 제공하는 꼴이 된다. 어느 경우든 대법원 전체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추락하는 사태는 막을 수 없다.
신 대법관에 대한 기피신청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대법원과 그 판결의 권위는 땅에 떨어질 것이고, 그에 따른 정치적 부담은 고스란히 이용훈 대법원장의 몫이 될 것이다. 아울러 그에게는 촛불재판의 배당 등을 둘러싸고 재판개입논란이 진행 중임을 알면서도 신영철 대법관후보자를 임명제청한 것에 대한 정치적 책임문제도 여전히 남아있다.
하지만 이상과 같은 법원 내부의 균열과 국민들의 신뢰 상실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민심이 악화되면 악화될수록 이용훈 대법원장은 더욱 미묘한 정치적 위기상황에 몰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집권세력은 꽃놀이패?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은 그가 이미 의존할 만할 정치적 보호막을 모두 상실했다는 사실이다. 2005년 9월 그를 대법원장으로 임명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검찰청에 조사를 받으러 다니고 있고, 그 임명을 앞장 서 동의했던 당시의 집권여당(열린우리당)은 오래 전에 사라지고 없다. 보수 언론들이나 재야 법조가 신 대법관을 두둔하는 듯한 태도를 견지해 온 것은 관료적 법원조직 그 자체에 미련이 있어서이지 결코 이용훈 대법원장을 지지해서가 아니다. 지난 3년 반 동안 보수 언론이나 재야 법조는 오히려 지나치리만큼 대법원장에게 신경질적으로 대해 왔던 것이 아닌가?
지금은 사태파악을 제대로 못해 뒷짐을 지고 있지만, 사법부와 이용훈 대법원장에 대한 민심의 악화가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되면, 청와대와 현재의 집권여당(한나라당)이 움직이기 시작할 가능성도 있다. 현재의 집권세력은 법률개정, 탄핵소추, 검찰수사, 여론몰이 등 사법부와 이용훈 대법원장을 압박할 수 있는 모든 법적, 제도적, 사실적 수단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은 법원 내부가 극심하게 분열되고 민심이 바닥을 찍을 때까지 이번 사태가 악화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재의 집권세력이 오매불망 바라는 것은 2년 반 남은 이용훈 대법원장의 임기만료까지 기다리지 않고 사법수뇌부를 재구성할 기회를 잡는 것이라는 전제에서 하는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사건에서 이용훈 대법원장(당시 변호사)이 노무현 대통령의 변호인이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잊어버렸을 리가 있겠는가?
이용훈 대법원장은 자기 자신이 사면초가에 몰려 있으며, 그 정치적 위기가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신영철 대법관을 법관징계위원회에 회부하지 않고 유감표명과 경고조치라는 '솜방망이' 처분을 내린 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법관의 독립'과 '법원의 독립'을 양자택일해야 하나?
나는 이용훈 대법원장이 일종의 정치적 줄타기 곡예를 시작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신대법관에 대한 '솜방망이' 처분으로 인해 단기적으로 법원 내부가 균열되고 국민들의 신뢰를 잃게 되더라도 대법원장은 일단 그 사태를 감수하기로 작정한 것 같다. 그러면서 소장 판사들이 법원 바깥의 정치적 환경이 매우 불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까지 버틸 심산인 것 같다.
만약 소장 판사들이 그런 정황을 공유하게 된다면 집단적인 반발 움직임 속에도 수위조절이 필요하다는 주장들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어떤 경우든 정치권력에 의해 관료적 법원조직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낯익은 방어논리로 이번 사태를 넘길 수 있다고 이용훈 대법원장은 판단한 것 같다. 요컨대 그는 자신의 진퇴여부를 법원의 독립 여부와 연결시키는 곳에서 정치적 묘수(妙手)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용훈 대법원장의 이 은밀한 승부수가 효과를 발휘할 가능성이 많다고 전망한다. 그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이 아니라 사법정치학의 메커니즘 상 그렇다는 말이다. 문민정부 이후 발생한 두 번의 사법파동은 모두 민주화를 추진하는 집권세력이 법원에 대하여 개혁을 요구하는 정치적 맥락에서 발생했다.
작금의 상황이 그와 같지 않다면, 현재의 집권세력이 사법수뇌부의 재구성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앞서의 전제가 판사들 사이에 공유되는 정도에 따라, 적어도 법원 내부에서는 이번 사태가 용두사미처럼 끝나게 될 공산도 없지 않다. 그렇게 되면 소장 판사들이 내세웠던 법관의 독립론도 이용훈 대법원장의 법원의 독립론에 의해 단번에 제압당하게 될 것이다.
이용훈 대법원장의 '묘수'가 성공한들…
그러나 여기서 우리 모두가 반드시 상기해야 할 질문들이 있다. 자, 그렇게 해서 법원 내부의 내홍이 정리되고, 이용훈 대법원장이 줄타기 곡예에 성공하게 되었다고 치자. 현재의 집권세력이 사법수뇌부를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가 2년 반 뒤로 미루어졌다고 치자. 그러나 끝도 없이 추락한 국민들의 신뢰는 어떻게 되는가? 땅에 떨어진 법원의 권위는 어떻게 되는가? 법관의 독립과 법원의 개혁과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는 다 어떻게 되는가? 굴레와 낙인을 짊어지고도 자리를 지키겠다는 신영철 대법관과 그 앞에 쌓여 갈 기피신청서들은 어떻게 되는가?
신영철 대법관사태가 공론장에 불거졌던 지난 3월 초 신 대법관이 자진사퇴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더라면, 그리고 그로부터 법원의 근본적인 개혁을 위한 계기를 잡았더라면, 국민들이나 법원이나 이용훈 대법원장이나 심지어 신영철 대법관에게도 가장 좋았을 뻔 했다.
그러나 법원의 수뇌부가 미적거리다 실기(失機)하는 바람에 이제부터 우리 국민들은 보지 않아도 되었을 이용훈 대법원장의 줄타기 곡예를 구경하게 되었다. 오늘(5월 14일) 오후에 개최될 서울중앙지방법원의 판사회의에서 소장 판사들은 어떤 대응책을 내놓게 될 것인가? 지켜보는 마음이 착잡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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