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치러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러시아가 사이버 공격 등을 통해 개입했다는 미 정보기관의 수사 결과를 놓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와 집권당인 공화당의 갈등이 정면충돌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러시아의 선거 개입 의혹은 트럼프 당선자의 대선 승리 정당성과 직결된 문제인 데다 향후 미러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민감한 문제다.
초미의 관심사는 미국의 17개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국가정보국(DNI)이 미 의회에 제출한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 관련 기밀해제 보고서의 내용을 트럼프 당선자가 어떻게 판단하느냐다.
미국 언론들이 전한 보고서의 요지는, 정보당국이 조사한 결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미국 대선 개입을 지시했다는 확신이 있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푸틴 대통령이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개인적 원한 때문에 해킹을 통한 대선 개입이란 복수극을 폈다고 설명했다. 지난 2011년 국무장관 시절 클린턴이 "러시아 총선이 조작된 부정선거"라고 비판한 뒤 러시아에서 반정부 시위가 발생한 것에 푸틴이 앙심을 품었다는 내용이다.
복수를 위해 러시아는 위키리크스의 창립자 줄리언 어산지와 접촉해 민주당과 공화당의 자료를 해킹하는가 하면, 언론과 SNS를 통한 여론전을 폈다고 보고서는 주장했다.
그러나 보고서는 러시아의 대선 개입을 입증할 상세한 증거는 보안을 이유로 제시하지 않았으며 미국 정보당국이 이에 어떻게 감시와 대응 활동을 폈는지도 제시하지 않았다.
지난 6일 정보당국으로부터 이 같은 내용의 비밀 브리핑을 받은 트럼프 당선자는 성명을 통해 러시아의 해킹 시도는 인정하면서도 "외국의 사이버 공격이 투‧개표기를 조작하는 등의 방법으로 대선 결과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트위터를 통해서도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좋은 일이지 나쁜 일이 아니다. 바보들만 그게 나쁘다고 생각한다"며 "내가 대통령이 되면 러시아는 지금보다 훨씬 더 미국을 존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보당국의 조사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듯한 트럼프의 입장은 민주당은 물론이고 폴 라이언 하원의장 등 공화당 주류의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에 따라 트럼프 당선자가 러시아의 해킹을 기정사실화하는 공화당과 싸우고 있다는 분석까지 제기됐다.
실제로 대러 강경책을 주도하는 존 매케인, 린지 그레이엄 등 2명의 공화당 상원의원들은 미 대선에 개입한 러시아에 추가 제재를 촉구하는 법안을 제출키로 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그레이엄 의원은 8일 "현재 우리가 러시아에 가하고 있는 제재를 넘어선 초당적인 법안을 제출할 것이며 그들의 취약 분야인 금융과 에너지 분야에 타격을 안겨줄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트럼프 당선자가 러시아와 관계 개선을 추진할 경우, 대러 강경 노선을 고수하는 공화당 의원들이 장악한 의회와 끊임없는 갈등을 겪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 당장 이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면 법안 서명을 놓고 트럼프 당선자는 의회와 일전을 벌여야 한다.
공화당과 트럼프 당선자의 이견은 이번 주 시작되는 트럼프 행정부 고위직 인준 청문회, 특히 친러 성향으로 알려진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 지명자에 대한 청문회에서도 드러날 전망이다.
트럼프 당선자와 공화당의 갈등이 정면충돌 양상으로 치닫자 라인스 프리버스 백악관 비서실장 내정자는 이날 "트럼프 당선자는 미국 대선에 개입하기 위해 이메일을 해킹한 배후에 러시아가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면서 "다만 그런 해킹이 선거 결과에 중요한 이슈는 아니었다고 보고 있다"고 전했다.
이는 트럼프 당선자가 정보당국의 러시아 해킹 의혹 조사 결과를 인정하고 있다는 뜻으로, 지금까지 보여 온 트럼프 당선자의 태도와 크게 배치된다.
하지만 프리버스 비서실장 내정자가 전한 입장이 트럼프 당선자의 진의인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프리버스가 트럼프 당선자와 공화당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알려진 만큼, 정면충돌을 피하기 위해 조정자 역할 차원에서 내놓은 정치적 수사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트럼프는 오는 11일 뉴욕에서 공식 기자회견을 갖는다. 러시아의 대선 개입 인정에서 한 발 나아가 가시적인 보복 조치를 주문하는 공화당의 도전이 거세진 가운데, 트럼프 당선자가 이 문제에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 차기 행정부 대외정책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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