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에 분노한 우리 국민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대규모의 평화적인 촛불시위로 박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을 이끌어내었다. 그러나 촛불시민혁명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우리 국민은 과거 4.19 학생혁명과 6월 민주항쟁 등을 통해서 불의와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시민 역량을 발휘해왔지만, 대통령 직선제 회복을 핵심으로 한 1987년 체제는 권위주의적 유신∙5공헌법의 잔재를 온존하여 제왕적 대통령의 군림을 가능하게 한 불완전한 민주주의였다.
대통령에게 막강한 헌법적 권한이 집중된 중앙집권체제에 국정원, 검찰 등 권력기관의 정치적 이용과 입법부와 사법부의 미약한 견제는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권력 남용을 허용했고, 박정희식 관치경제의 유산과 재벌 중심의 경제체제는 정경유착의 어두운 관행을 지속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비민주적인 선거법과 명예훼손법제의 정치적 남용은 자유로운 선거운동과 후보자 검증을 가로막아 대통령을 잘 못 뽑는 결과를 가져왔다.
촛불시민혁명의 완수를 위해서는 철저한 인적 청산 못지 않게 제왕적 대통령제와 재벌 중심 정경유착을 골자로 하는 박정희 체제 유산을 철저히 청산하는 제도개혁이 필요하다. 즉, 촛불혁명은 민주공화국 헌법을 파괴한 박근혜 대통령을 헌법 절차에 따라 탄핵하는 헌법 수호의 의미와 함께 제왕적 대통령제의 극복을 위한 개헌과 경제민주화를 위한 개혁입법을 요구하는 것이다. 일각에서 적폐 청산과 개혁이 먼저냐 개헌이 먼저냐 하는 식으로 개헌 논의를 개혁과 대립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개헌과 개혁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과제이다.
1987년 체제의 한계
1987년의 직선제 개헌은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이끄는 민정당이 과반수 의석을 지닌 국회에서 여야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다. 호헌을 고집하던 전두환 정권이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도록 한 것은 6월항쟁의 성과였으나, 그 외에 대부분의 헌법 조항들은 유신∙5공헌법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부분적인 수정에 그쳤다. 결국 1987년의 제6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에게 입법권, 예산권, 인사권 등에서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고 입법부의 권한과 사법부의 독립성은 미약한 박정희-전두환의 권위주의적 대통령제를 온존한 것이다. 입법권과 내각 인사권 등 각국 대통령의 헌법적 권한에 대한 아래 비교표(이동성 박사 제공)를 보면 한국 대통령의 헌법적 권한(총점 20.5)은 분권형 대통령제(준대통령제 또는 이원정부제로도 칭함)를 채택한 프랑스(7)나 타이완(15)은 물론 순수 대통령제의 미국(13), 인도네시아(9), 필리핀(19)에 비해서도 가장 강한 편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표에 포함되지 않은 대통령의 권한과 견제장치를 보면, 우리 나라는 감사권조차도 대통령에 속해 있고, 대법원, 헌법재판소, 중앙선관위 등 헌법기관의 인사에 대통령에게 지나친 권한을 부여하여 독립성을 침해할 소지를 안고 있다. 가령 유신 이전에는 대법원장은 "법관추천회의의 제청에 의해"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도록 했는데 유신헌법에서 법관추천회의의 제청 절차를 삭제해 대통령의 인사권을 강화했고 1987년 헌법은 유신헌법을 답습함으로써 대법원의 독립성을 저해하고 있다. 또한, 헌법재판소 중앙선관위 등 헌법기관의 위원중 3명은 대통령이, 3명은 국회가, 3명은 대법원장이 지명 또는 선출하는 현행 헌법조항은 유신헌법에 처음 도입된 것으로서 명목상 삼권분립의 정신을 구현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대통령 몫과 국회에서의 여당 몫을 합하면 과반수가 되기 쉽고, 더구나 대통령의 대법원장에 대한 인사권을 통해 대통령의 영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표. 각국 대통령의 헌법적 권한 비교
그런데,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제왕적 대통령제가 반드시 강한 정부를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통령의 소속 정당이 의회내 과반수를 차지할 때에는 견제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통치자로서 독재화와 권력의 남용 및 부패가 초래될 수 있는 한편 여소야대 국회를 맞이하거나 임기후반 대통령의 지지도가 하락하여 차기 유력대선후보에게 정치적 무게중심이 이동하게 되면 사실상의 식물정부가 되는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의회 다수파에게 권력을 전부 또는 일부 넘겨줘야 하는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에 비해 대통령이 의회 내 다수파의 반대 속에서도 대통령직의 유지는 물론 막강한 헌법적 권한을 계속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오는 혼란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우리는 5년 단임 대통령제로 인해 대통령선거와 4년 임기의 국회의원 선거의 주기가 맞지 않아 국회의원 선거가 대통령 임기 중후반에 실시될 경우 여소야대 국회를 초래하기 쉽고, 이 경우 대통령과 야당 주도의 국회간에 타협이 어려운 제도적 문제점이 노정되었다. 그리하여 임기의 전부 또는 거의 대부분을 여소야대 국회와 함께 해야 했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 하에서는 야당의 반대 속에 대통령의 개혁 어젠다를 입법화하기가 어려웠던 반면, 집권당이 의회에서 과반수를 차지한 이명박 박근혜 정권 하에서는 민주주의의 후퇴와 권위주의적인 제왕적 통치의 문제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1987년 헌법 개정에서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경제민주화 관련 조항이다. 그러나, 경제민주화는 추상적인 헌법조항 하나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고, 구체적인 개혁입법들을 필요로 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가 민주적 시장경제질서 확립을 내걸고 개혁을 하였으나 미완에 그쳤고, 신자유주의와 박정희식 관치경제가 공존하며 재벌 중심의 정경유착이 지속되어 왔다 (국가조합주의에 입각한 박정희식 관치경제에 대해서는 필자의 칼럼, "세월호와 최순실, 예고된 참사" (☞ 바로 가기) 참조). 노무현 정부도 삼성 등 재벌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않았으며, 이명박 박근혜 정부하에서 재벌에 의한 정부의 포획과 유착이 더 심화되었다. "재벌도 공범이다"라고 외친 촛불시민들의 함성이 재벌개혁과 양극화 해소, 공정한 시장경쟁등 경제민주화를 위한 실질적 개혁입법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개헌의 방향
개헌논의의 최대화두는 5년 단임 제왕적 대통령제의 극복으로 모아지고 있으며, 이를 위한 구체적 방안으로는 의원내각제, 국가수반과 정부수반을 분리하는 분권형 대통령제(이원정부제), 또는 4년 중임 대통령제로의 권력구조 개편이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제왕적 대통령제를 극복하는 데 있어 권력구조의 개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실질적 권한을 축소하고 입법부의 권한과 사법부의 독립성을 강화하며 지방분권을 강화하는 것이다. 위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동일한 정부형태를 취한 나라들 가운데서도 대통령의 실제 헌법상 권한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가령 분권형 대통령제를 택한 타이완(15)이 순수대통령제를 취하고 있는 미국(13)과 인도네시아(9)보다도 오히려 대통령에게 강한 헌법적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최신의 비교정치 연구들에 따르면 대통령이 권한이 상대적으로 약한 나라가 정치적 안정성이나 협치 및 민주주의 수준 등의 측면에서 우월함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원정부제 개헌시는 물론 4년 중임제로 순수대통령제를 유지하더라도 대통령의 예산편성권, 긴급명령권, 국민투표 부의권 등을 삭제 또는 약화시키고 국회의 입법권과 예산권을 강화하며 감사원은 국회 소속으로 이관하는 등의 개헌이 필요하다. 대법원장과 대법관 인사에 있어 법관추천회의의 제청 또는 동의를 요하는 유신헌법 이전의 조항을 되살리고, 헌법재판소와 중앙선관위의 위원을 대통령이 직접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삭제해야 한다. 분권형 대통령제를 택한다면 프랑스처럼 총리와 내각은 국회에만 책임을 지도록 하여 국가원수로서 외치를 담당하는 대통령의 간섭을 배제해야 할 것이다.
또한 선거구제의 개편이 병행되지 않고서는 권력구조 개편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다. 가령 소선거구제 중심의 현행 선거제도를 유지하면서 의원내각제를 도입하면 제왕적 대통령제가 제왕적 수상제로 바뀌는 것에 다름 아닐 수가 있다. 소선거구제는 과반수에 훨씬 못 미치는 유권자의 지지를 받은 정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에 소선거구제에 의원내각제를 결합하면 대통령제에서와 같이 소수에 의한 승자독식을 허용하게 된다.
더구나, 의원내각제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중심으로 하는 대통령제와 달리 의회와 정부가 한 몸이 됨으로써 그야말로 견제받지 않는 제왕적 수상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의원내각제 또는 이원정부제 개헌을 함에 있어서는 국민의 의사가 보다 잘 대표되고 연정과 협치를 가능하게 하는 비례대표제로의 개혁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또한 순수대통령제를 유지하더라도 대통령선거에 결선투표를 도입함과 동시에 선거구제를 비례대표 중심으로 개혁하면 연정과 협치를 촉진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선거구제는 헌법 개정사항은 아니지만, 권력구조 개편 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개헌 논의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개헌에 있어 권력구조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지방분권과 국민주권의 실질적 강화를 위한 내용들이다. 실질적인 지방분권을 위해서는 지방의회가 해당 지역에서 법률과 같은 효력을 가지는 자치법률을 제정할 수 있는 자주입법권, 지역의 특성에 따라 지방정부의 형태를 선택할 수 있는 자주조직권, 그리고 자주입법권의 실효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자주재정권을 부여해야 한다. 국민주권의 실질적 강화를 위해서는 국민발안권과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소환제도 등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 등 기본권 보장을 강화하는 것도 필요하나, 기본권의 실질적인 보장은 구체적인 입법을 통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개헌 논의의 주체와 과정
개헌의 방향과 내용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개헌 논의의 주체와 과정이다. 정치권의 이해관계나 정략에 의한 개헌이 아니라 국민의 민주적 총의가 반영되는 개헌이라야 하며, 촛불시민혁명의 완수를 위한 개헌이 되어야 한다. 사실 1987년 체제의 한계, 특히 제왕적 대통령제의 극복을 위한 개헌에 대해서는 과거에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해 여러 차례 대선후보들이 공약을 하기도 했으나, 번번히 무산되었다.
일단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면 개헌을 할 유인이 없어지고 또한 임기말이 되면 차기 유력 대선주자들이 개헌을 반대하여 무산되는 악순환을 반복해온 것이다. 따라서 개헌 논의는 대통령이나 대선 후보들의 이해관계에 좌우되지 않고 국민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져야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국회에 개헌특위가 설치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 다만, 국회의원들이 국민을 대변하기보다는 유력 대선주자나 대통령의 눈치를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국회가 국민의 뜻을 제대로 대변해서 개헌작업을 하도록 시민사회가 능동적, 조직적으로 개헌논의를 주도하고 참여할 필요가 있다.
개헌 시기에 관해서는 예상되는 조기대선 일정상 대선 전 개헌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보인다. 1월초부터 국회 개헌특위가 개헌안을 마련해나가는 한편 대선 후보들이 임기초 개헌 완료에 동의하도록 하면 대선 이후 1년이면 국민 다수가 합의할 수 있는 최종적인 개헌안 마련이 가능하다고 본다. 2018년 6월 지방선거시에 개헌안 국민투표를 함께 하는 방안도 좋을 것 같다. 또한 개헌에 따른 임기 단축으로 2020년 4월에 차기 국회의원 총선거와 대통령 선거를 동시에 실시하도록 하는 방안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새 헌법이 의원내각제를 취한다면 당연히 대통령이란 걸림돌을 제거해야 하며, 대통령제(순수 또는 분권형)를 취한다고 해도 제7공화국을 새롭게 출범시킴에 있어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를 동시에 실시하여 향후 두 선거의 주기를 일치시키는 것이 대통령 소속정당과 의회 다수당을 일치시킬 가능성을 증대시켜 정국의 안정과 책임정치 실현에 도움이 될 것이다.
덧붙여 필자가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것은 대선 후보들이 당선되면 실제로 국정운영을 자신이 공약한 개헌안에 최대한 근접하도록 할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가령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을 주장하여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헌법개정 이전에라도 청와대 비서실을 외치 관련으로 축소시키고 내치 권한을 총리에게 이양하며 국무총리에 대한 국회의 불신임 결의(독일처럼 건설적 불신임을 적용할 수도)가 있으면 반드시 따르겠다고 약속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국무위원 해임도 반드시 총리의 제청에 따라 하도록 하면 된다.
이렇게 하면 우리 국민은 개헌 이전에도 총리와 내각이 실질적으로는 국회에 책임을 지는 이원정부제를 실험적으로 운용해볼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만일 4년 중임제라도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개헌을 약속한다면 집권시 헌법상 주어진 권한을 스스로 다 사용하지 않고 사전에 국회의 의견을 들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대통령이 헌법재판소나 중앙선관위 위원 임명권을 행사하기 전에 국회로 하여금 추천을 하도록 요청하고 국회 추천 위원을 형식적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으로 하면 사실상 국회추천 6인, 대법원장 추천 3인으로 인적 구성을 바꾸어 독립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일단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면 누구도 스스로 임기단축을 하거나 헌법상 권한을 내려놓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대선 과정에서 국민적 요구로 대선후보들의 약속을 받아내야 할 것이다.
시급한 공직선거법 개정
끝으로 개헌논의보다 급한 입법과제가 있다. 조기 대선에 앞서 30%대 지지로 당선되는 대통령을 예방하고 자유로운 선거운동과 후보자 검증을 가능하도록 선거법을 개정하는 일이다. 최근 결선투표제 도입여부가 정치적 쟁점이 되고 있는데, 대통령제를 취하고 있는 나라들의 대다수가 도입하고 있는 결선투표제를 도입하지 않은 것도 1987년 체제의 한계였다.
당시 야권 후보의 분열로 인한 반사이익 외에는 정권연장의 가능성이 없었던 민정당은 결선투표제 도입을 당연히 반대했고, 그 결과 노태우 후보가 36%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이번 대선은 신4당체제 하에서 헌재의 탄핵 결정 후 60일 이내에 치러지기 때문에 범야권이든 범여권이든, 범진보든 범보수든간에 후보단일화를 이룰 수 있는 시간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따라서 그 어느 때보다 결선투표제 도입이 절실히 요구된다. (결선투표제 도입이 헌법개정 없이 선거법 개정만으로 가능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서복경, "결선투표제와 헌법" 참조(☞ 바로 가기))
우리 국민들이 2012년 대선처럼 후보자 검증이 없는 선거, 후보자에 대해 겉으로 포장된 이미지만 보고 투표장에 나가는 선거를 또 다시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 후보자와 유권자의 자유로운 접촉과 토론을 제한하는 비민주적인 선거법을 고쳐 선진민주국가들처럼 선거운동을 자유화해야 한다. OECD 국가중 한국에만 유일한 후보자비방죄의 폐지와 민주주의 국가들에 유례가 없는 허위사실공표죄의 남용방지를 위한 폐지 또는 개정으로 2007년 박근혜 후보의 최태민-최순실 관련 의혹을 제기했던 김해호 목사나 이명박 후보의 BBK 관련 의혹을 제기했던 정봉주 전 의원처럼 후보자에 대한 근거있는 의혹을 제기하고도 사법처리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필자의 관련 칼럼 바로 가기: "후보자 검증 막는 비방 및 허위사실공표죄 폐지해야")
또한 세계적 추세에 발맞추어 선거권 연령을 18세로 낮추는 일도 더 이상 미룰 이유가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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