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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 광부’ 이희진씨의 인생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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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토종 광부’ 이희진씨의 인생유전

[홍춘봉의 광부아리랑] ⑳‘기러기 아빠’ 원조 파독광부

강원 태백시 통동의 이희진(85)씨는 ‘소년 광부’와 ‘파독 광부’를 거치는 등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토종 광부’이다.

함경남도 함흥에서 1931년에 태어난 그는 5살 어린 나이에 탄광촌인 장성으로 이주했고, 8.15해방을 경험했다. 또 부산에선 ‘보육원’생활로, 6.25전쟁이 발발해서는 ‘학도병’을 거쳐 광부가 된 뒤 파독 광부로, 광업소 관리자를 하다가 파산으로 깊은 수렁에 빠져 힘들게 살고 있다.

그의 인생은 태어나면서부터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는 운명을 타고 난 것일까? 그는 다섯 살 때,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함경도 함흥에서 강원도 삼척군 장성까지 무려 1000리길을 걸어서 이주했다.

▲파독광부 출신 이희진씨가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훈장증과 국가유공자증서를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있다. ⓒ프레시안(홍춘봉)

경북 봉화가 고향인 그의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함경도 함흥까지 갔다가 처자식을 남기고 집을 나간 뒤 생사를 알 수도 없었다. 때문에 그는 아버지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당장 어린 아들과 먹고 살 길을 찾기 위해 그의 어머니는 목숨을 걸고 고향을 찾아 ‘월남’을 단행한 셈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고향인 장성은 1936년 일제가 장성광업소를 개광하는 단계라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그래서 그는 장성초등학교에 다니다가 초근목피의 현실을 탈피하기 위해 12살 나이에 부산으로 ‘청운의 꿈’을 안고 가출을 하게 된다.

이희진씨의 회고.

“먹고 살길이 막연하고 장래에 대한 희망이 없어 부산으로 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는 교통편이 없어 100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경북 봉화로 갔다. 봉화역에서 열차를 얻어 탔는데 우연히 부산 대현동에서 학원을 한다는 소덕수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에게 집을 나온 동기를 말하고 부산에 가서 직장을 얻어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전했다. 부산 생활이 쉽게 잘 풀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부산에 도착한 그는 소덕수씨의 소개로 부산 영도에 있는 소규모 주물공장에 보조공으로 취업했다. 그러나 덩치 큰 어른도 힘든 주물공장 일을 12살 어린 나이에 하는 것은 너무 벅찬 일이었다.

측은하게 생각한 소덕수씨의 소개로 이씨는 주물공장을 그만두고, 당시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수용하며 학교를 보내준다는 당시 고아원이라 불리는 난관학원(보육원)에 입소했다.

난관학원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공업학교에 입학한 그는 2학년 때 어머니가 보고 싶기도 하고 부산생활에서도 희망을 찾기가 어려운 것으로 생각해 1949년 가을, 어머니가 살고 있는 장성으로 돌아왔다.

장성에 온 그는 다행스럽게도 장성광업소에 사환 형식으로 입사해 ‘소년 광부’처럼 권양기 운전을 하며 야간에는 태백중학교에 다니는 ‘주경야독’을 했다.
비록 15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집안에서는 가장이었고, 태백중학교 학생이자 장성광업소에선 소년 광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던 셈이다.

그러나 어머니와 오랜만에 행복한 생활을 하는가 싶었는데 이듬해인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지면서 그의 인생은 롤러코스트를 타게 된다.

전쟁이 발발하자 애국정신이 투철한 학교 교사와 선배들이 학도병으로 전쟁에 참여하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이희진은 16세 나이에 학도병이 되었다.

무더운 여름 코 흘리게 10대 후반의 중학생 127명은 장성 태백중학교를 출발해 경북 봉화군 법전리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3사단 23연대에 자원입대 했다. 12살 나이에 부산으로 가기 위해 봉화 대현재 고개를 넘던 이씨는 4년 뒤엔 학도병으로 걸어서 다시 대현재를 넘으며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어떻게 느꼈을까?

그는 학도병으로 참전한 뒤 법전리 전투와 가평 전투 등 10여 곳의 전투에 군인들과 참전했다가 1952년 5월 25일 귀가할 때까지 군번 없는 용사로 근무했다.

그의 회고담.

“부산에서 다시 장성에 온 뒤 태백중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고 장성광업소 사환으로 입사했다. 나이가 어려 탄 캐는 일은 못하고 대신 기계를 만지는 권양기 운전공으로 근무했다. 낮에는 광부로 일하고 밤에는 태백중학교에 다니는 주경야독을 하며 꿈을 키웠다. 그러다가 1950년 6월 전쟁이 터지면서 학도병으로 2년 이상 전투에 참전했다. 1952년 5월엔 어머니가 계시는 장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전투에 참전한 나는 군번도 없는 학도병이라는 신분 때문에 육군에 다시 입대해야 했다.”

이씨는 국가의 징집영장을 받고 논산훈련소에 입대 하였다. 논산훈련소에서 군사 훈련을 받은 뒤엔 수송학교를 거쳐 505수송단에 배치되어 근무했는데, 질병이 생겨 부산 3.1육군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몸이 회복되질 못하자 의병제대 했다.

군에서 제대한 그가 장성에 왔을 무렵, 1950년 11월 1일 창립한 대한석탄공사는 일본인이 개발한 장성광업소와 도계광업소 등을 중심으로 무연탄 생산에 주력하고 있었다.

전쟁 후 인력과 장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씨는 과거 권양기 운전공으로 일한 경력을 인정받아 장성광업소에 채탄부로 입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내 최고라는 장성광업소 조차 당시 작업 조건은 매우 원시적 이었다.

이씨의 회고담.
“탄을 캐는데 홋 노미라는 철과 나무를 이어 만든 파이프 같은 작업도구로 구멍을 파서 화약을 장전했다. 그런 다음엔 다이너마이트로 발파해 채탄을 하는 아주 원시적인 방법으로 탄을 캤다. 착암기로 구멍을 뚫어 발파를 했지만 삽으로 탄과 돌을 광차에 실었다. 노보리라고 부르는 경사진 좁은 갱도를 두더지처럼 오르내리며 탄을 캐고 동발 같은 자재를 날랐다.”

그는 광부가 된지 1년 만에 어머니의 주선으로 태백 통리에 사는 처녀와 맞선을 보고는 곧 조촐한 결혼식을 치렀다.
신혼여행은 꿈도 못 꾸고 곧장 장성광업소 사택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신혼살림을 시작하였다.
가정과 일 밖에 모를 정도로 워낙 성실한 그는 4남매를 두었고, 7식구로 불어나자 생활은 매우 궁핍해졌다.

광부로 열심히 근무했지만 생활에 쪼들렸던 1964년 초, 장성광업소에 파독광부 모집공고가 났다.
파독광부는 1963년 12월에 1진으로 123명이 출발했다. 이후 5진까지 파독광부는 광부 경력자가 아니라 대학을 졸업하거나 고등학교를 나온 고학력 실업자들이 대부분 이었다. 광부경력이 없는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 광부근무를 하면서 시행착오를 일으키자 해외개발공사는 1964년 3월부터는 100% 경력광부로 선발하기로 했다.

1963년 말 기준 당시 대한민국의 인구는 2400만에 그쳤지만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해 실업자가 250만에 달했다. 종업원 200명 이상의 대기업은 전국에 54개에 불과했고, 1인당 국민총생산은 87달러였다.

장성광업소에 파독광부 모집공고를 본 그는 한국보다 최소 5~6배 가량 급여가 많다는 말을 듣고 독일행을 결심했다.

“어머니를 포함해 7식구가 내 월급으로 살기에는 너무 생활이 빠듯했다. 파독광부 모집공고를 보고 3년간 돈을 벌어 오자고 결심했다. 심사조건이 매우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졌지만 모범광부로 표창을 받은 경력을 인정받아 동료 64명과 선발되는 행운을 얻었다.”

그는 서울 수유리의 파독광부 교육기관에서 장성광업소 동료 64명을 포함하여 각지에서 선발된 120명과 함께 간단한 독일어, 독일에서 지켜야 할 상식, 독일현지 광산의 보안지식 등에 대한 합숙교육을 받았다.

고향 태백 땅에는 어머니를 포함, 부인과 4남매를 남겨두고 1964년 4월 1일 김포공항에서 생전 처음 비행기를 타고 일본과 캐나다를 경유하여 독일로 향했다. 이씨는 결혼 7년 만인 32세의 나이에 ‘기러기 아빠’의 신세가 된 것이다. 당시 이씨와 함께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광부들의 평균연령은 30세였다.

태어나서 강원도 첩첩산중 탄광촌에서만 살던 그가 바라본 독일은 별천지 였다.

사실상 주 7일 근무에 익숙한 그는 주5일제 근무, 철저한 근로기준법 준수, 호텔 같은 기숙사(2인 1실, 침대와 냉장고. 세탁기) 시설 등 다양한 후생 복지제도가 그랬다. 식사는 기숙사 공동식당에서 했지만 부식도 훌륭했고 탄광에 가져가는 도시락은 빵과 우유, 혹은 밥을 싸갔다.

ⓒ태백석탄박물관

총각 광부는 별거수당으로 매월 500마르크를 지급했지만 이씨는 기혼자라며 1000마르크를 별거수당으로 받았다. 자녀수당도 나왔다. 한 달에 별도의 저축을 하면서도 1200마르크를 부인에게 송금하였다.

또 놀란 것은 광부 인종의 다양성 이었다. 독일 현지인 외에도 유고, 이태리, 일본 등에서 온 다양한 나라의 청년들이 돈을 벌기 위해 독일 탄광막장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독일탄광은 기계화가 잘 되어 있었지만, 근무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서독 크루크루 광산은 작업장이 해저 1500미터였다. 지열이 30도 이상에 달했다. 장화에 땀이 흘려 내려 근무시간 틈틈이 장화를 벗어 땀방울을 쏟아 내야만 했다.

완전 자동화로 채탄작업을 하는 독일의 탄광은 안전에 관해서는 최고였다. 갑방(주간 근무)과 을방(오후 근무)시간에는 석탄채굴이 주를 이뤘지만 야간작업을 하는 병방 근무자들은 채굴하고 난 갱도를 보수하고 보완하는 일을 했다. 무리하게 생산을 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워낙 성실한 그는 주말과 휴일에도 돈을 더 벌기 위해 휴일근무를 자원했다. 벽돌 나르는 일은 1시간에 5마르크를 받았다. 또 평일에도 주간근무를 마치면 인근 중소기업에 아르바이트생처럼 취업해 돈을 더 벌었다.
또 휴일근로를 못하는 날에는 공사현장에 찾아가 벽돌을 나르거나 건축기사 심부름 등의 일을 하며 악착 같이 돈을 벌었다.

일부 파독광부는 휴일마다 인근 유원지나 도시로 놀러 다니는 경우가 많았지만 오직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한 이씨는 한 달에 하루, 이틀 정도만 쉬는 정도였다.

그의 회고담.
“대부분의 파독광부들은 성실하게 근무하고 돈 쓰는 일을 자제 했다. 그러나 일부 파독광부는 도박을 하는 경우도 있고, 술집을 전전하거나 현지 여성들과 사귀느라 유흥비가 부족해 동료들에게 돈을 빌리는 경우도 있었다. 라인강 주변의 맥주홀에서 술을 마시거나 라이브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시는 카페가 많았다. 술을 마시면 고향의 어머니와 처자식 생각이 사무쳤다.”

3년간 파독광부를 마치고 귀국한 이씨는 장원광업소 덕대인 덕흥탄광의 총무과장으로 근무하면서 자신이 독일에서 벌어 온 돈과 이웃 친지의 돈까지 몽땅 털어 넣으면서 알거지가 되었다.

동발 등 자재가 부족하고 탄이 팔리지 않거나 인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회사를 위해 1978년부터 1981년 8월 부도가 날 때까지 무려 3억 원에 달하는 돈을 집어 넣었다.

▲자신을 태워 사람이 필요한 불을 만들어 내는 연탄. 평생 연탄을 사용하고 있는 이희진씨는 연탄 같은 인생을 살아 왔다. ⓒ프레시안(홍춘봉)

이씨는 한숨을 지으며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 했다.


“당시 덕흥탄광은 230명 규모에 달했다. 탄광살림을 하는 총무과장 3년여 간 독일에서 벌어 온 돈, 자녀들이 모아 놓은 돈, 친지들의 돈을 몽땅 털어 넣었는데 부도가 나고 말았다. 이후 평생 자녀들과 친지들에게 죄인이 되고 말았다. 남을 속이고 도둑놈 소리 듣는 사람의 집에 가보면 알부자처럼 잘 사는데 성실하고 착한 사람들은 대부분 어렵게 산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그런 세상이다. 김대중, 이명박 대통령에게 표창도 받고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지만 평생 찌든 생활은 면할 수가 없었다.”

그의 기나긴 인생여정은 대한민국 역사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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