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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인권도 '잃어버린 10년' 대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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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인권도 '잃어버린 10년' 대상인가?

인권위 축소 논란, 본질은 헌법 제1조다.

한국방송영화공연예술인노동조합이 대중문화예술인에 대한 인권침해 실태를 조사한다. 고 장자연 씨 사건이 계기다. 조사 참여 대상은 전체 탤런트의 95%에 달하는 2000여명이다. 김응석 노조위원장은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국가인권위원회에 대중문화예술계의 인권침해 실태조사를 정식으로 의뢰하겠다"고 했다.

왜 굳이 인권위원회일까? 경찰도 있고, 검찰도 있는데.

인권, 정권 교체와 상관업시 지켜야할 가치

인권위원회를 둘러싼 최근의 논쟁은 우리에게 뻔한, 하지만 나라와 인권의 본질을 묻는다.

국가와 권력기구는 왜 존재할까. 헤어촉(R, Herzog)의 '봉사적 국가관'이란 헌법이론이 있다. 국가는 인간 공동생활 과정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도구다. 봉사의 수단이다. 그래서 국가의 권력기구 또한 오로지 시민의 공동생활과 인간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 쓰일 때만 그 의미가 확보된다. 권력기구는 결코 자기만족적이어서는 안 된다. 인권위원회의 존재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어느 나라 건 집권세력이 갈리면 지난 정부의 정책이 부정되곤 한다. 지난 부시 미 행정부의 ABC(Anything But Clinton) 정책이 한 예가 될 것이다.

영국 정치에는 버츠켈리즘(Butskellism)이라는 용어가 있다. 보수당의 재무장관이었던 버틀러와 노동당의 재무장관이었던 게이츠켈의 이름을 합성해서 만든 말이다. 1951년에서 70년대 중반까지 보수당이 집권하든 노동당이 집권하든 비슷한 정책이 유지되었음을 상징하는 말이다.

정부의 교체와는 상관없이 꼭 지켜야 될 나라의 근본가치가 있을 것이다. 경제정책이야 차라리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헌법 제1조 '민주공화국' 조항을 가진 나라에서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그리고 이러한 이념과 가치의 근본인 시민의 기본권, 인권보장 만큼은 결코 '잃어버린 10년'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

인권위원회야 말로 이러한 정권교체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인권위의 인권도 침해당하는 국가라면?

공화주의는 '정의와 공공선에 기반을 두고 시민들이 자유로운 정치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공화제는 공론을 전제한다. 물론 공론의 최종 목적지는 기본적 인권과 공공성이다. 둘의 조화다. 공론은 다원성을 전제한다. 다원성은 관용성과만 공존할 수 있다. 나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나와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더라도, 결코 무시하거나 깔보지 않는 방식이다. 나의 인권과 나의 권리가 소중한 이상, 타인의 인권과 타 기관의 권리 또한 존중되어야 한다.

우리가 절대적 명제로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체제의 전체화를 막기 위해 자기 안에 제도적인 견제장치를 마련하고 자기 안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들리도록 허용하는 성찰적인·반성적인 정치체제이다. (공진성, 폭력)"

더구나 "인권위는 국가의 잘못과 인권 침해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조직이다. 태생적으로 국가와 갈등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국가와 갈등이 없는 인권위는 더 이상 인권위가 아니다." 안경환 인권위원장의 말이다.

민주주의를 채택한 이상, 그리고 공화주의를 대한민국의 헌법이념으로 규정한 이상 국가권력기구 사이에서도 견제와 균형, 다원주의와 관용의 정신은 허용되어야 한다. 인권을 목표를 내건 인권위마저 자신들의 인권과 권한을 주장할 수 없는 사회라면, '인권위는 더 이상 인권위가 아니'라 대한민국은 더 이상 '민주공화국이 아니'라고 해야 된다.

소유의 자유와 존재의 자유

인권의 뿌리는 '자유'에 있다. 더구나 이 정부의 기반인 보수 세력은 여느 단어보다도 '자유'라는 말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 '자유'는 결코 절대적이지 못하다.

"자유는 너무나도 상하기 쉬워서 약간의 그림자만으로도 그 색이 어두워지고, 살짝만 입김이 닿아도 뿌옇게 그 투명함을 잃는다.(프란체스코 마리오 파가노 Francesco Mario Pagano의 말. 모라치오 비롤리, <공화주의>에서 재인용)"

존재의 자유를 강화해야 한다. 소유의 자유만을 강조해선 안 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토지소유권 절대주의에 기반을 두고 물적 규제의 완화를 통해 소유의 자유, 재산의 자유만을 꿈꾼다.존재의 자유에 대한 규제강화를 통해, 법과 질서라는 하드웨어적인 방식을 통해, 소유의 자유만을 강화하는 방식은 위험하다.

백걸음을 양보해서, '경제살리기'를 위해 설령 소유를 좀 더 보호할 필요가 있다 하더라고 그 힘은 "완력(might)이 아니라 권리(right), 즉 사적소유를 합법화하는 법적 구조(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다중)"여야만 한다. 소수자의 자유, 사회적 약자의 자유, 보다 근본적으로 존재의 자유를 보호하는 데 인권위의 존재가 있는 것이다.

관습헌법도 인정하는 헌재, 헌법1조 무시하겠나

30일 열리는 국무회의가 헌법기관들 사이에서 인권위의 직제를 결정하는 마지막 기회였다. 헌법기관인 인권위의 직제를 대통령령이나 행정안전부가 좌우한다는 것 자체가 '반헌법적'이다. 물론 행전안전부는 처음부터 자신들의 권한이나 영역과는 상관없음을 내밀하게 얘기하곤 한다.

국가인권위는 30일 오전 10시 30분 헌법재판소에 직제개정령안에 대한 권한쟁의 청구심판과 대통령령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이 문제는 헌법재판의 문제로 옮겨간다. 헌법기구 사이의 갈등이야 두려운 일은 못 된다. 더구나 헌법재판의 최고정신이야말로 시민의 기본적 인권보호에 있는 만큼 그 결론을 예상하는 일쯤은 염려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제1조만으로도 충분하다. 관습헌법도 헌법의 법원으로 인정하는 나라인데, 하물며 헌법 제1조의 정신을 부정할리는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최근의 인권위원회 조직을 둘러싼 정부내의 논란을 두고 다들 이토록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래서 문득 생각나는 시 하나로 대신코자 한다. 나치시대를 살았던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oeller)가 나치의 횡포에 침묵하던, 글깨나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을 위해 쓴 시다.

"나치는 우선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사민주의자를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민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노동 조합원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유대인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다.
그런데 아무도 나서 줄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르틴 니묄러, 그들이 처음 왔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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