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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 받는 시민들을 위한 '法治'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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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지배 받는 시민들을 위한 '法治'란?

[법치의 표리(表裏)]<6> '정의로운 통치'를 위해 필요한 것들

군부독재가 적나라한 폭력을 행사하던 시절 이후 한국 국민들은 '법치주의'가 가장 중요한 헌법적 가치라는 점에 관해 일치된 입장을 견지해 왔다. 박종철을 죽게 만든 사람들에 대항하여 일어섰을 때, 우리 모두가 일차적으로 공감했던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법 앞의 평등'과 '적법절차'(due process of law)의 이념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최근 몇 달 한국사회에서 벌어져 온 일련의 사태를 되짚어 보면서 지금 시민들 가운데는 법치주의의 현재적 의미를 곱씹어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촛불집회의 사후처리과정, 미네르바 구속사건, 너무도 비극적인 용산 참사와 그 이후, 또 아직도 진행 중인 신영철 대법관사태 등 꼬리를 물고 이어진 법치의 문제 상황들 속에서 현재의 집권세력이 보여 준 모습이 솔직히 기대 이하였기 때문이다.

지배받는 시민의 '法'치 vs 지배하는 권력자의 법'治'

'법치'라고 할 때, 시민들은 보통 '정의로운 통치'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 정의로운 통치의 전제로서 상식에 입각한 합리적인 규칙들과 그 규칙들의 공평무사한 적용을 기대한다. 하지만 법치주의의 사상 전통 속에는 전혀 다른 흐름도 존재한다. 정의와 직접 결부되지 않는 '규칙 그 자체에 의한 체계적인 통치'가 바로 그것이다.

이 상반되는 두 흐름의 결정적인 차이는 법치를 바라보는 방향이다. 전자는 지배받는 시민들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법치다. 그렇기에 시민들 사이의 상식과 합리성, 그리고 그것에 근거한 정의와 공정성이 법치의 기준이 된다. 반면 후자는 지배하는 권력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통치의 효율성과 예측가능성의 확보, 그리고 무엇보다 통치 그 자체의 철저한 관철이 법치의 목표가 된다.

'법치주의의 실현'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데도 집권세력의 모습이 시민들의 기대에 못 미치고 있는 까닭은 그들이 법치를 후자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치를 구성하는 두 개념요소 중 '법(法)'이 아니라 '치(治)'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흥미로운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그렇다면 현재의 집권세력은 시민들이 전자의 의미로 법치를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말인가? 상식과 합리성, 정의와 공정성이 법치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시민들의 소박한 기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나는 현재의 집권세력이 그렇게 무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실은 정반대라고 본다. 현재의 집권세력은 법치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를 자기들의 방식으로 바꿔치기 하는 일종의 정치적 책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나는 판단한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정치적 책략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대한민국의 운전자라면 누구든 한 번 쯤은 불합리해 보이는 교통규칙에 의한 교통단속을 당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의례적인 거수경례를 한 뒤 딱지를 끊으려는 교통경찰관에게 교통규칙의 불합리성을 따져보려고 시도한 적도 있을 것이다.

그 때, 나름 호기롭게 문제를 제기한 한 운전자에게 곧바로 되돌아오는 대답은 무엇이었던가? "본관에게는 그 교통규칙의 불합리성을 문제 삼을 권한이 없으니, 이의가 있으면 절차에 따라 문제를 제기하고, 빨리 딱지를 끊는 일에 협조하라. 자꾸 시간을 끌고 귀찮게 굴면 경우에 따라서는 공무집행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니었던가?

교통경찰식 법치주의…'사법화'의 다섯가지 목표

▲ '법치의 사법화'와 임채진 검찰총장의 관계는? ⓒ프레시안
법치주의의 실현이라는 슬로건 아래 현재의 집권세력이 구사하는 정치적 책략은 교통단속현장에서 교통경찰관이 사용하는 위의 방식을 일반화, 전면화하는 것이다. 그 요체는 무엇보다 문제를 '사법화(司法化, judicialization)'하는 것이다.

지배하는 권력자의 입장에서 '문제를 사법화'하는 이 방식은 많은 이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급박한 정치적 대결구도에서 벗어나서 시간을 끌 수 있다는 점이다. 여론이 잠잠해질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것만으로도 통치에 상당한 여유가 생길 수 있다.

둘째는 시간을 끄는 과정에 정치적 반대자의 숫자를 줄이고 특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살아있는 권력과 싸우면서 기나긴 재판과정을 견뎌낼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셋째는 시간을 끌고 정치적 반대자를 줄이면서도 합리적 통치의 외관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어쨌든 적법절차를 통해 사실을 확인하고 옳고 그름을 따져보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는 종국적으로 집권세력 쪽의 승률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이다. 정부를 장악하고 있는 이상 재판과정에 동원할 수 있는 인적, 물적 자원의 규모는 궁지에 몰린 소수의 정치적 반대자들과는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최악의 경우 재판에서 패소하더라도 정치적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법절차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법언(法諺)을 제시하면 되고, 패소의 이유에 관해서도 변론준비의 부족이나 재판부의 편견을 탓하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지배하는 권력자의 입장에서 '문제를 사법화'하는 방식에는 이상의 모든 이점들을 능가하는 더욱 강력하고 매력적인 정치적 유익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시민들 사이에 서로에 대한 정치적 무관심, 보다 정확하게는 일종의 정치적 귀차니즘을 배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시간을 끌고, 정치적 반대자를 줄이는 동시에, 집권세력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전반적인 승률을 높여가는 합리적인 통치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긴절한 문제가 아닌 한, 점점 서로에 대한 무관심에 익숙해져 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집권세력의 통치가 일상적으로 관철되기 시작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법치의 회복을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투지와 인내

지배하는 권력자가 존재하는 한 법치주의를 권력자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는 근절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지배받는 시민들의 입장을 도외시한 채 지배하는 권력자의 입장에서만 법치주의를 이해하는 것을 정상이라고 볼 수는 없다. 나아가 그 수준이 '문제를 사법화'하는 정치적 책략을 구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면, 이것을 가리켜 법치주의의 타락이 시작되었다고도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법치주의의 타락 경향에 대하여 한국 국민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이에 관해서는 이제부터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심각하고 진지한 토론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법치주의'는 무슨 의미인가?'라는 이 질문을 집권세력에 던지고 말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하여 스스로 답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나 자신부터 그러한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다짐하면서, 여기서는 다만 한 가지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소론을 맺고자 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법치주의의 타락에 맞서 그 덕성을 회복시키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의가 필요하다. 지배하는 권력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지배받는 시민들의 입장에서, 그들 사이의 상식과 합리성, 그리고 그것에 근거한 정의와 공정성을 기준으로 법치를 바라보겠다는 공동의 다짐이 필요하다. 민주주의를 향한 투지와 인내가 필요하다.

끝까지 함께 버티고 애쓰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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