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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기러기 아빠’…파독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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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기러기 아빠’…파독광부

[홍춘봉의 광부아리랑] ⑱‘자린고비-천방지축’ 천차만별 현지생활

‘자린고비-천방지축’ 천차만별 현지생활

당시 독일에 진출한 파독광부들은 대부분 근검절약하며 자린고비처럼 알뜰하게 생활했다.

탄광일을 마치고 나면 술 한 잔 생각이 간절했지만 고향의 부모나 처자식을 생각하면 돈 한푼 허투로 쓸 수 없다는 생각에 냉수로 술을 대신했다. 휴일인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휴일근로수당을 더 벌기 위해 악착같이 출근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파독광부 가운데 기혼자들은 머나먼 타국에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일부는 현지 독일인 과부들이나 간호사와 재혼하는 일도 가끔 벌어졌다. 당연히 고국의 가정에는 송금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저축하는 돈도 줄어 들었다.

▲파독광부들이 작업 도중 쉬는시간에 물을 마시고 있다. 이 사진은 파독광부의 상징이 되고 있다. ⓒ파독광부기념관

고국에 남은 부인들도 일부는 자녀들과 알뜰하게 생활하며 남편의 귀국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일부는 다른 남자와 놀아난 경우도 일어났다.

태백에서 지난 1973년 파독광부로 진출했다가 10여년 만에 귀국한 박모(72)씨는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에서 광부로 근무하던 박씨는 독일에 가서 3년만 고생하면 목돈을 만질 수 있다는 소리를 듣고 어렵게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당시 태백에서 결혼해 자녀 넷을 둔 박씨는 독일 땅을 밟은 뒤 6개월 도 안돼 한국인 간호사와 사귀게 되었다.

호남형의 잘생긴 얼굴에 말주변도 좋은 30대 중반인 박씨는 역시 이국땅에서 외로움을 겪는 20대 중반 처녀 간호사와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그는 사귄지 2개월 만에 동거에 들어갔다.

이어 혼인신고까지 마친 그는 그래도 처음 1년 동안은 고국의 처자식에게 생활비를 보내줬으나 이후에는 생활비 지원을 뚝 끊었다.

남편의 생활비 지원이 끊기자 박씨 부인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근처 식당에 돈벌이를 나갔고 얼마 뒤 다른 남자를 사귀면서 독일에 나간 남편의 존재를 잊어가고 있었다.

“남편이라고 독일에 나가 처녀와 결혼하고 생활비조차 보내주지 않는데 이제는 남편도 아니다. 나도 다른 남자와 호강하며 살고 싶다”

독일에서 간호사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고 맞벌이를 하며 알콩달콩 살던 박씨는 10년의 세월이 지나자 고향의 자식과 친지 등 가족생각에 독일생활이 매일 바늘방석 같았다.

고민하던 그는 간호사 부인에게 이제까지 번 재산을 모두 물려주고 10년 넘게 정들었던 독일 땅을 뒤로 하고 1983년 7월 대한민국으로 귀국해 처자식이 살고 있는 태백으로 돌아왔다.

부인은 10년 넘게 연락도 없었던 남편을 내쫓고 싶었지만 자녀들을 생각해 받아 주기로 했다. 남편 역시 부인의 탈선에 기가 막혔지만 자신이 먼저 가정을 파괴한 행실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파독광부로 독일에 진출하면 계약기간 3년을 채우고 당사자에게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서 본인이 원하면 1년 단위로 체류기간을 연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젊은 남자가 낯선 이국땅에서 3년 동안 홀로 지내는 일이 무척이나 외롭고 힘든 일이다.

과거 한국의 탄광촌도 그랬지만 독일에서도 탄광촌은 남편을 잃고 홀로 사는 ‘과부’들이 많았다.

파독광부 가운데 일부는 독일 현지의 홀로 외롭게 사는 과부와 사귀거나 동거를 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있었는데 고국에 부인이 있으면서 독일여자와 사귀는 광부를 ‘물새’라고 부르기도 했다.

탄광에서 일과시간이 끝나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기숙사로 직행하는 경우도 있지만 맥주홀에 들리는 사람들도 있다. 맥주홀에는 현지 과부가 앉아 있다가 파독광부가 찾아오면 반갑게 맞아준다.

술자리가 이어지다 보면 외로운 남녀가 파트너를 이루기도 하고 ‘이심전심’ 마음이 맞으면 독수공방에 찌든 과부의 집으로 직행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이국땅에서 정에 약한 파독광부는 고국의 처자식에게 송금하는 것을 잊는 사례도 있었다.


ⓒ아우어 히스토리

당시 파독광부들은 독일이라는 나라와 독일인들에게 신사적이라는 사실을 많이 배웠다.
비록 후진국에서 온 ‘막장인생’들이지만 독일인과 동등하게 대우(임금은 독일인의 60~70%수준)를 받았고 주 5일 근무에 8시간 근무가 칼처럼 지켜졌다.

또 근무 중에 조금만 다쳐도 충분한 휴식과 보상 및 치료가 제공됐고 신체 일부에 장해가 남으면 충분한 보상을 제공했다.

지난 1974년 5월 독일 루르탄광에 채탄부로 근무하는 김호철(26.가명)씨는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공휴작업에 나갔다.

그러나 그는 교통법규를 잘 준수하는 독일인과 달리 성질이 급한 한국인 특유의 성격처럼 출근길에서 교통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다 교통사고로 현장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교차로에서 신호가 바뀌는 것을 무시한 채 교차로에 진입하다 직진하는 대형트럭과 부딪치고 만 것이다.
소속과 신분을 확인한 경찰은 김씨가 소속한 탄광에 연락했고 탄광에서는 현장소장이 교통사고 현장에 즉시 달려왔다.

사고를 낸 김씨의 오토바이에 도시락이 실려 있었고 숨진 김씨의 숙소에서 탄광방향으로 오토바이가 진행한 것을 확인한 현장소장은 업무상 재해로 인정했다.

김씨 가족에게 탄광에서는 당시로서는 거금인 수천만원의 유족보상금을 지급했다.

‘민간외교사절’의 일환이기도 한 광부들은 처음 교육을 받은 것처럼 대부분 현지에서 모범적인 생활을 한 사람이 많았지만 일부 파독광부들은 망신살 뻗치는 일을 저지르기도 했다.

1973년 10월 독일 딘서라겐에서 있었던 일.

공원이 워낙 잘 가꿔져 있는 독일은 동네어귀까지 산토끼가 뛰어 놀 정도였다.


고향에서 올무를 이용해 산토끼를 자주 포획했던 파독광부 이기만(30.가명)씨는 수시로 공원 주변에서 산토끼가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을 보고 오랜만에 산토끼 고기맛을 보고 싶었다.

독일에서는 동물보호운동이 잘 되어 있고 밀렵이 법으로 엄격히 금지돼 누구도 산토끼나 야생동물 포획에 관심이 없었지만 이씨는 과거 고향에서의 산토끼 포획실력을 점검해볼 생각이 들었다.

철물점에서 가는 철사를 구입한 이씨는 산토끼를 잡기 위한 올무 수십 개를 만든 뒤 산토끼가 자주 출몰하는 공원 일대에 설치했다.


그러나 재수가 없으려니 올무에 산토끼는 걸리지 않고 공원을 순찰중이던 청원경찰의 발에 올무가 걸리고 말았다.

청원경찰은 공원에 설치된 올무를 수거한 뒤 한인회(당시 파독광부들이 거주하던 지역은 지역별로 한인회가 조직되어 있었다)에 찾아갔다.

“공원에 야생동물을 포획하기 위해 불법으로 올무를 설치한 범인을 찾아내 한국으로 강제 귀국시키겠다”

한인회 간부들은 갑작스러운 청원경찰의 방문과 올무를 설치한 한국인을 찾아내 강제 귀국시키겠다는 말에 당황했다.

특히 한인회는 어렵게 돈을 벌기 위해 이역 멀리 독일까지 왔다가 올무 설치 때문에 강제로 귀국까지 당하는 일은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매우 죄송하다. 앞으로 이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한인회가 책임지겠다. 또 당사자를 반드시 색출해 각서를 받은 뒤 자체 징계를 내리겠다. 그러니 한 번만 용서해 달라!”

이렇게 청원경찰에게 손발을 숲하게 빈 한인회 간부들 덕분에 ‘올무 사건’은 무마할 수 있었다.

또 어떤 파독광부는 도박으로 한밑천 잡으려고 김포공항에서 출국할 때 화투 수십여 통을 휴대하고 독일에 온 사람도 있었다. 실제로 일부 파독광부들은 도박에 빠져 출근시간도 잊은 채 밤새워 화투를 치는 일도 있었다.

▲1960년대 파독 간호사들이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손에는 짐보따리를 든채 대기하고 있다. ⓒ아우어 히스토리

1973년 파독광부로 나가 한인회장을 했던 김진태씨의 회고.

“어려웠던 시절 많은 사람들이 돈벌이를 위해 머나 먼 이국땅에 파독광부로 자원했다. 열심히 돈 벌어 귀국한 사람도 있지만 여자와 도박에 빠져 타락의 길로 접어든 사람도 여럿 보았다. 당시 지역별로 조직된 한인회에서는 도박을 근절하기 위해 근무시간이 끝나면 자취방에 찾아가 도박에 빠진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이 주요 일과중의 하나였다. 또 때로는 밀렵꾼과 절도범으로 인해 한인회가 나서 사건을 무마하기도 했고 물새가 되지 않도록 하는 일도 한인회 일과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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