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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대개혁 못하면 대선 패배 반복된다"

[김상준-유종일 대담 ②] 탄핵 이후, 촛불 민심은 어디로?

'박근혜'로 인격화된, 무능하고 부패한 권력과 그 권력을 떠받친 적폐 구조가 농성 중인 청와대를 매주 촛불이 에워쌌다. 탄핵이라는 제도화된 단두대에 시민들이 제 손으로 권력자의 목을 올렸으니 혁명이란 표현이 과하지 않다.

표면은 평화로우나, 촛불 시민들은 기실 어떤 제도도 감당 못할 불덩어리다. 청와대를 태우고 국회를 태운 불덩이가 이제 헌법재판소를 절단낼 기세다.

세월호 때 그랬듯이, 이제 그만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박근혜를 버리고 '제2의 박근혜'를 도모하는 기득권의 교언이다. 두 번은 통할 것 같지 않다.

헌재가 탄핵을 인용하면 이 불덩이가 소멸할까? 탄핵 이후, 광장의 촛불이 일상의 촛불 '직접민주주의'로 진화하도록 통로를 여는 이들은 한 목소리로 말한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주체는 시민이 될 것이다"라고.

2003년부터 '시민의회'를 연구한 이론가 김상준 경희대 교수와 12일 출범한 '시민주권회의'를 주도하고 있는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의 대담을 2회로 나누어 싣는다.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이 대담을 진행했다. (☞ 1부 대담 보기)


"대의제 한계 직접민주주의로 보완해야"

대의제에 익숙한 우리에게 직접민주주의는 아직 낯설다. 그 낯선 용어가 촛불 사이사이에서 자라났다. 권력을 맡긴 위정자들이 주권자 몰래 나라를 말아먹었으니 당연하다. 그런데 직접민주주의를 대체 어떻게? 김상준 교수는 시민의회의 제도화를, 유종일 교수는 시민 주권운동을 강조한다.

유 교수는 "대의제를 직접민주주의로 대체하자는 것이 아니라 대의제가 지금 제대로 기능하지 않기 때문에 보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일환으로 국민발안제, 국민소환제를 제안하며 유 교수는 "선출직 공직자가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면 국민이 파면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유 교수는 이어 "시민 주권을 세우기 위해서는 시민권 확장, 직접민주주의 제도화, 분권 이 3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시민주권회의'는 그런 운동의 일환이다. 대표성을 자임하지 않지만, 비슷한 흐름들이 모여 "직접민주주의를 확대하고, 정치권을 압박해서 제대로 된 정치틀을 만들고, 개혁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고 유 교수는 강조했다.

유 교수는 이어 "(촛불 주최측에 속한 단체들은) 정파별로 의견도 다르고, 여기에서 논의를 통해 단일한 뭔가를 만든다는 것은 수평적 네트워크로 진행된 촛불집회의 흐름과 맞지도 않다"며 "시민 주권 시대를 선포하고, 시민 주권을 확대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시민주권회의의 취지를 설명했다.

김 교수가 제안하는 시민의회는 "선거법 개정이나 개헌처럼, 기존의 의회 내에서 풀 수 없는 문제를 풀기 위해 소집하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사례에서 효과가 입증된 방법이라는 설명이다.

김 교수에 따르면 "시민의회는 선거가 아니라 무작위로 성별·연령 등을 고려한 비율로 추첨해 소집된다"면서 "이렇게 구성된 시민의회는 공개적으로 합리적으로 의제를 토론하면서 의견을 좁힐 수 있다"고 했다.

추첨 방식으로 선정된 평범한 시민들이 모여 집단 토론을 거친 뒤 국회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의제들의 공론적 해법을 도출하는 기구라는 것이다.

최근 촛불 민심을 대변할 시민 대표단을 꾸리자며 등장한 온라인 시민의회 '와글'의 시도가 논란을 빚었다. 그러나 이는 대표단 구성 과정에서 대표성의 문제로 결국 중단됐다.

김 교수는 "'와글' 사태는 '시민의회는 그런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시행착오 사례"라며 "그건 제가 주장해온 시민의회의 정신과는 정반대"라고 했다.

김 교수는 시민의회의 원리로 추첨에 의한 방식을 거듭 강조하며 "누구나 주장을 할 능력을 갖추고 있고 그 기회를 공평하게 나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음은 대담 2부 전문.

"사회 대개혁, 주권자 시민이 주도해야"

프레시안 : 촛불집회 도중 '친박을 제외한 대한민국 비대위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문제는 촛불이 정치권에 그것을 강제할 수 있느냐다. 모든 정치 세력이 모여서 대한민국의 문제를 논의하고 해결해 보자는 뜻은 좋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할 것이고, 가능하냐는 문제가 있다.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개헌이 지금 되겠느냐. 헌법이 문제가 아니라 헌법 운용이 문제다. 현재는 선거구제 개편, 비례대표 확대, 결선투표제 도입 정도만 하고, 나머지는 제 정치 세력이 공정하게 싸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시민사회의 역할이지, 그 이상은 비현실적이다'라는 지적을 했다.

실제로 정치인들에게 '동력'으로 작용할 것은 차기 대선일 것이다. '지금 대선 레이스 할 때가 아니다. 시민사회와 함께 개혁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라는 주장을 현실적으로 정치인들에게 어떻게 강제할 수 있겠나?

김상준 : 꼬인 것을 푸는 게 먼저다. 개헌이 정략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 30년 만에 개헌특위가 처음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런 방식의 개헌특위를 국민이 봐 주겠나? 얼기설기 만든 개헌을 국민이 받아들이겠나?

유종일 : '개헌 안 해도 된다'는 주장은 말이 안 된다. 헌법을 고치지 않는 혁명이 어디 있나. 다만 개헌은, 개헌을 위한 개헌이 아니라 사회개혁을 위한 개헌이어야 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같은 황당한 일이 생기지 않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사회를 어떻게 바꿔야 하냐는 것을 국민이 참여하는 가운데 합의를 이루어야 한다.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면 헌법이 이렇게 만들어져야 한다는 논의를 하는 주체는 시민이 돼야 한다. 정치권에 갖다 주면 반드시 정략으로 흐르게 돼 있다. 새누리당이나, '제3지대'를 말하는 사람들이 정략적으로 접근하는 것도 볼썽사납지만, 이대로 가면 내가 대통령 되니 개헌은 안 된다는 식으로 하는 것도 정략적이고 무책임하고 반동적이다. 개헌을 정략으로만 대하니 우리가 정치권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국민이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 유종일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박인규 이사장 말은 '시민 주권을 제대로 세워야 하는데, 우리가 원해도 정치권이 안 하면 그만 아니냐'는 우려인 것 같다. '민주공화국'이라지만 이것이 허울뿐인 주권이었던 상황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본다.

첫째, 지금 정치적 자유, 언론·표현·사상의 자유, 정당 활동의 자유 등이 너무 제한돼 있다. 87년 체제는 대통령 직선제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가 있지만 실제 제대로 된 민주주의는 아니었다. 그래서 이젠 정치적 기본권의 확장이 필요하다.

둘째, 대의민주주의만 가지고는 안 된다, 직접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해야한다. 대의제를 직접민주주의로 대체하자는 것이 아니라 대의제가 지금 제대로 기능하지 않기 때문에 보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0대 총선에서 여소야대까지 만들어 줬지만, 총선 끝나면 그들만의 여의도 권력 게임에 몰두하고 당도 대선 주자 따라 갈라졌다 합쳤다 한다. 민심을 제대로 반영하는 정치 본연의 기능은 없다. 그래서 무력한 주권자가 되지 않기 위해 직접민주주의를 제도화해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민주권회의'가 국민발안제, 국민소환제를 제안하는 것이다. 또한 김 교수가 시민의회 주장을 하는 것도 그런 측면으로 이해한다. 최소한 국민소환제는 있어야 한다. 이번처럼 선출직 공직자가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면 국민이 파면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권력 분산이 필요하다. 분산된 권력이 상호 견제하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촛불 쥐고 나가도 잘못하는 것을 막기가 대단히 어렵다. 한국에서 권력은 너무나 집중돼 있다. 대통령이 모든 공무원을 다 임명하고, 대통령이 예산 편성·집행·감사까지 모든 것을 다 하는 나라, 이런 나라를 그대로 두고 민주주의를 한다는 것은 연목구어다. 세월호 특별조사위가 무력화돼도 국회는 여소야대 상황임에도 아무 것도 못했다. '너희는 뭐 했냐'고 하면 '권한이 없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제도를 안 바꿔도 된다거나 '내가 대통령 하면 민주주의 된다'고 하는 건 말도 안 된다. 사실 정경유착의 뿌리도 권력 집중이다. 제왕적 대통령과 제왕적 재벌총수는 서로 의지하게 돼 있다.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때는 안 그랬나?

지방자치도 지금은 허울뿐이다. 지자체가 자기 예산으로 작은 복지정책 하나를 하려 해도 못 하게 하는 게 무슨 지방자치냐. 지금 우리나라 지방정부는 중앙정부 위임 사무만 하는 '시다바리 정부'다. 지방차지를 제대로 하고, 법원·경찰·검찰도 다 지방에서 뽑아야 권력 분산도 되고 통일 대비도 된다.

마지막으로 선거제도 개혁이다. 득표수에 의석수가 비례하도록 해야 한다. 기득권을 가진 과점 체제의 정당들이 잘못하면 혁신적인 신생 이노베이션 정당이 나와 경쟁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나라들에선 녹색당, 포데모스, 시리자, 오성운동 같은 정당들이 다 나오고 있는데, 우리는 지역주의에 기대고 정치 엘리트에 의해 장악된 시스템이 변하지 않는다.

시민 주권을 세우기 위해서는 시민권 확장, 직접민주주의 제도화, 분권 이 3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정치권이 이를 할 리가 없다. 자신들이 수혜자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대중의 개혁적 열기가 고조됐을 때 헌법을 바꾸어 한 줄씩 집어넣어야 한다. 그런데 저들이 여전히 인정하지 않겠다면 '촛불'처럼 스스로 권력을 조직해야 한다.

김상준 : 현실화에서 중요한 것은 방법이다. 지금은 '촛불 민의'가 무엇인지 아젠다 세팅이 중요하다. 하나의 의제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이렇게 설정된 의제를 어디서 바꿔줄 것이냐, 국회 안에서 할 수 있나? 우리나라뿐 아니라 다른 나라도 골머리를 앓았던 문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시민의회라는 방법이 도입된 것이다. 제가 2003~2005년에 이런 주장을 했을 때는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제도였지만, 지금은 여러 나라에서 도입하고 있다.

시민의회는 선거법 개정이나 개헌처럼, 기존의 의회 내에서 풀 수 없는 문제를 풀기 위해 소집하는 것이다. 시민의회는 선거가 아니라 무작위로 성별·연령 등을 고려한 비율로 추첨해 소집된다. 이렇게 구성된 시민의회는 공개적으로 합리적으로 의제를 토론하면서 의견을 좁힐 수 있다. 외국 사례를 보면, 공통점이 있다. 처음에는 의견이 서너 가지로 갈리다가 결국 '초(超)다수'를 형성하는 의견이 나온다. 이는 합의로 이어질 수 있는 가장 공정한 길이다. 시민의회에서 그런 안들이 정리되면 이것을 국회가 가져가서 의결하면 된다.

이렇게 정리된 국민 의견을 국회가 뒤집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다. 즉 국민적 주권 의지를 현실화하는 방법 가운데 헌법 개정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가장 현실적 방법이 시민의회다. 대선 역시 '누구 뒤에 줄을 설 것이냐'가 아니라, 대선 후보들이 이렇게 모인 국민적 의지를 보고 약속하는 방식의 선거가 돼야 한다.

▲ 김상준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김 교수가 제안한 시민의회 등 시민사회를 아우르는 사회 개혁 기구 등에 대해 비관적 의견도 있다.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국회가 의제설정 권한 등을 내놓을 리 없다는 것이다. 민심이 정치를 강제할 수단이 있어야 하는데, 탄핵은 단순한 주장이지만 개혁은 복잡하다. 의약분업 사례만 봐도 서로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다원적 의제다. 개혁의 구심점이 누가 될 수 있나? 촛불집회를 주관한 1500개 시민단체 연대체가 할 수 있나?

김상준 : 시민사회 내에서도 다양한 논의가 있다. 결국 개혁 제안을 압박할 주체는 초정파적인 시민 대개혁 기구, 제도정당과 시민사회가 함께하는 기구로 해야 할 것 같다. 사회 개혁 기구는 지난 11일 문재인 씨가 제안한 것 아닌가. 그걸 정당과 시민사회를 포괄하는 범정파 개혁 논의 기구로 만들면 된다. 그런 것 없이는 이번 대선도 1987년의 재판이 될 가능성이 크다.

유종일 : 나는 최순실 게이트 초기부터 탄핵 뒤 대선 국면으로 가는 길에 촛불로 하나가 된 국민이 갈라지는 게 가장 우려된다고 했다. 그러기 전에 우리가 새 대한민국의 청사진을 만들어 내고 시민 주권을 확대해서, 시민 의견이 정치권에 작동하도록 하는 기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탄핵안 통과 이후 적폐 청산이나 체제 개혁 문제가 나올 것인데, 이 동력을 유지할 수 있는 뭔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해왔다.

'퇴진행동', '비상시국회의' 등은 사실 각론으로 들어가면 정파별로 의견도 다르고, 여기에서 논의를 통해 단일한 뭔가를 만든다는 것은 수평적 네트워크로 진행된 촛불집회의 흐름과 맞지도 않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 주권 시대를 선포하고, 시민 주권을 확대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본다. 시민 권력을 조직화하려는 여러 흐름이 다양하게 나오면서 '이 사람들은 우리랑 생각이 비슷하다'고 하면 연대해서 직접민주주의 세력의 힘을 키워가야 한다. 그런 것을 바탕으로 정치권을 압박하고 시민의회의 입법 운동도 하는 식으로 가야 한다.

프레시안 : 유 교수 얘기는 일종의 개혁 장전으로서 개헌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각 분야의 자발적 운동으로 시작하는 게 좋겠다는 취지인가?

유종일 : 그렇다. 제가 하고자 하는 것은 '시민 헌장' 제정이다. 3.1 운동 이후에도 임시헌장을 만들었다. 그때 우리가 무슨 민주주의를 해 봤겠나? 그런데도 장터에 모인 사람들이, 농민들이 '일본 몰아내자' 주장하면서 임시헌장도 나오고 임시정부로 이어졌다.

이번은 세계사적 사건이다. '우리는 어떤 나라를 원한다'는 시민들의 생각을 추출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누군가 만든 사회개혁 기구나 시민의회에서 그것을 전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여러 거대한 물결이 합쳐져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누구든 시민 권력으로서 해야 하는 일을 추진하는 흐름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저도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런 흐름들들을 모아 직접민주주의를 확대하고, 정치권을 압박해서 제대로 된 정치틀을 만들고, 개혁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프레시안 : 유 교수가 관여하고 있는 '시민주권회의'에는 어떤 분들이 활동하고 있고, 시민들 반응은 어떤가?

유종일 : 반응은 긍정적이다. 저와 서해성 작가, 선대인 소장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사실 '촛불'이 본격화되기 전인 지난 9~10월부터 시민 주권 얘기를 했다. 대선을 앞두고 지금 화두는 뭐냐, 시대정신이 뭐냐, 그런 차원이었다. 정치의 문제도 있지만, '헬 조선'으로 불리는 사회·경제 시스템의 대대적 실패 같은 것은 바로 87년 체제의 한계라고 봤다. 그 근본에는 투표하고 나면 권력에서 소외되는 허울뿐인 시민주권의 문제가 있다는 게 우리의 고민이었다.

프레시안 : 김 교수가 주장하는 '시민의회'는 최근 한 웹사이트(와글)가 비슷한 주장을 했지만 난타를 당했다. 그 웹사이트가 추진하는 방식은 김 교수가 주장해온 것과는 많이 다르지만, '시민을 대표하는 시민'이 누구이며, 어떻게 뽑아야 탈이 없느냐 하는 대표성의 문제는 비슷하게 지적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김상준 : '직접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쓰지만, 최근 민주주의 이론에서는 피라미드 같은 구조의 4개 층위 민주주의를 많이 얘기한다. 가장 밑바탕은 참여민주주의, 그 위는 결사체 민주주의, 그 위가 심의민주주의, 가장 위가 선거민주주의다. 이런 피라미드가 안정적 형태일 때 그 사회의 민주주의가 안정돼 있다고 평가받는다. 예를 들어 '민회' 운동은 직접민주주의고, 4개 층위에서는 참여민주주의에 해당된다. 만약 마을별로, 동네마다 민회라는 조직이 생긴다면 '결사체 민주주의'가 될 것이다.

제가 말하는 시민의회는 선거가 아닌 추첨이라는 선출 방식이라는 점에서 다들 낯설어한다. 사실 민주주의의 기본이 되는 두 가지 근거는 선거와 추첨이다. 추첨으로 뽑힌 시민의회는 '심의민주주의'에 특장점이 있다. 어떤 의제를 충분히, 합리적으로,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데 가장 좋은 제도다.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뽑는 가장 높은 층위의 민주주의는 이 같은 참여민주주의, 심의민주주의의 기초 위에 올라가 있을 때 불안하지 않고 독재로 흐르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선거'만 한다.

사실 이번 '와글' 사태는 '시민의회는 그런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시행착오 사례다. 아니, 인터넷 공간에 이름 올리고 거기에 투표하면 인기투표같이 되지 않겠나? 그건 제가 주장해온 시민의회의 정신과는 정반대다. 누구나, 평범한 아저씨 아줌마도 와서 참여하는 정치가 시민의회다. 이번에 '온라인 시민의회'를 추진했던 분들의 선의나 진심을 오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더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고 본다.

유종일 : 대표성 관련한 의구심이 '시민주권회의'는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는 대표성을 자임하지 않는다. 그냥 특정한 하나의 모임이고, 우리가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하면 같이 하자는 수준이다.

프레시안 : 결국 시민주권회의든 시민의회든 요체는 '촛불 민심'을 어떻게 대변해서 사회를 어떻게 바꾸는가에 있다. 그런데 사실 이게 바로 '정치'와 '정당'의 기능이다. 국회가 욕을 먹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기존의 정당 정치를 두고 새로운 운동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무엇인지 의아해 하는 반응이 있을 수 있다. 마치 시민주권회의나 시민의회가 우월적 위치에서 기존의 정당정치를 대체하자는 듯한 뉘앙스로 들릴 수도 있다.

▲ 박인규 협동조합 프레시안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유종일 : 정당이 기능을 잘 하면 그런 것을 할 필요가 없다. 대의제가 잘 작동하면 이런 게 왜 필요하겠나? 정치권이 자기들이 잘못해서 그런 건데 '오죽하면 시민들이 그러겠냐'고 반성해야지 '그런 거 필요없다'고 하면 국민들에게 버림받을 일밖에 없다. '시민들의 요구를 반영하기 위해 이런 것이 필요하다'고 보완하는 것인데, 정치가 자기들의 부족한 점은 인식하지 못하고 '정당이 있는데 너희가 뭐라고 나서냐'고 한다면 역사의 물결에 휩쓸릴 거라고 본다.

'시민주권회의'가 누구를 대표하는 조직은 아니지만, 예컨대 한 3000명이 모인다고 하면 사실 정치권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정치에서도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김상준 : 공론화가 되면 정치권도 그렇게 얘기하지 못할 것이다. 민주당도 며칠 전 정책위의장이 시민의회법을 도입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다른 나라에서는 의회가 시민의회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스스로 도입했다. 대표성 얘기가 아까 나왔는데, 대의정치의 '대의'는 영어로 '리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다. 사람들의 주장(presentation)을 선출된 공직자가 다시(re-) 되받아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 반대쪽에는 '내가 직접 프레센테이션을 하겠다'는 개념이 있다. 그게 민회 같은 직접민주주의의 정신이다. 시민의회의 원리인 '추첨'은 그 중간적인 성격이다. 당사자가 직접 주장하는 것도, 선거를 통해 대변자를 뽑는 것도 아니지만, 누구나 주장을 할 능력을 갖추고 있고 그 기회는 공평하게 나눈다는 것이다. 선거와 추첨은 충돌하는 개념이 아니다. 두 개의 정당성 원리가 병존하는 것이다. 국회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교착 상황,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것을 보완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프레시안 :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개혁은 반드시 필요한데도, 지금 '1%'가 여전히 기득권을 쥐고 농성하는 상황이다. 황교안 총리(대통령 권한대행)의 행보를 보면, 대행을 맡자마자 북한 위기, 경제 위기 얘기를 하고 있다. 경제나 안보 위기가 커졌을 때, 이런 외부의 위협을 이유로 개혁을 좌초시키거나 나중으로 미루는 '반동'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 죽고 사는 문제가 급하다면서 개혁은 한가한 소리로 밀어낼 수도 있다.

유종일 : 사실 경제 위기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 지금 민생 경제는 이미 위기고, 소비 심리는 얼어붙었고, 가계 부채는 규모도 규모이지만 점차 악성으로 돼 가고 있다. 시중 금리는 이미 오르고 있고 미국 금리 인상도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그 여파가 어떻게 미칠지도 걱정이다. 집값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금리 인상까지 겹치면 대책 없이 집 샀던 사람들이 원리금 감당이 안 돼 급매물로 집을 내놓고, 그러면 집값은 더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수출도 상황이 안 좋다. 전반적으로 경제 전망이 안 좋은 건 맞다.

여기에 사실상 식물정부 상황에서 불안감이 증폭되면 IMF 외환위기 때 겪었던 것과 유사한 정도의 위기로 치달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황교안 대행 체제는 아무 권한이 없으면서 '농성'을 하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경제 위기를 헤쳐 나갈 효과적 리더십은 나올 수 없다고 본다. 만약 그런 위기 상황이 온다면, 국회에서 IMF 때 했듯이 비상경제대책위원회 같은 것을 만들거나 해야 하지 않겠나 싶다. 야당도 '우리가 책임지기 싫다'고 안 하면 안 된다.

김상준 : IMF 때 비상경제대책위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주도한 것이다. 이번에는 여야 합의에 따라 비상 팀을 꾸려 대응하는 것 정도는 필요하지 않나 한다. 사회 대개혁 기구가 만들어진다면 경제 문제 역시 개혁 과제로 다뤄져야 할 것이다. 안보 위기 문제도 차기 개헌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대한민국 안보 위기가 존재하는 건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문제가 '종북' 논리 등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도록 하는 헌법적 장치가 있어야 한다.

프레시안 : 경제나 안보 위기 역시 사회 개혁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집권세력이 아닌 다른 주체'를 형성하는 게 문제다. 국회, 특히 야당이 탄핵 이후 국면을 주도해야 하는데 아직 그게 안 되고 있다.

유종일 : 야당이 좀 더 책임적인 자세로 나왔으면 좋겠다. 물론 '국가가 비상한 상황에 처했지만, 국회는 행정부 견제하라고 뽑은 것이지 너희보고 행정 하라고 했느냐'는 지적도 있을 수 있다. 그게 한계이기도 한데, 지금 상황에서는 정당성이 부족한 부분은 '촛불 시민'과 함께함으로써 메우고, 이미 '식물'이 된 정부를 대신해서 야당이 더 열심히 해야 한다.

프레시안 : 오랜 시간 유익한 말씀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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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구 기자
곽재훈

프레시안 정치팀 기자입니다. 국제·외교안보분야를 거쳤습니다. 민주주의, 페미니즘, 평화만들기가 관심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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