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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광부 애환

[홍춘봉의 광부아리랑] ⑰해외 인력송출 1호 파독광부 선발은 ‘하늘의 별따기’

지난 1960년대 외화벌이를 위해 독일(서독)과 월남(베트남)으로 떠나는 한국인들은 당시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파독광부 1진 파견은 1963년 12월 21일 김포공항을 통해서였다. 월남파병은 그 이듬해인 1964년 9월 부산항에서 시작됐다.

전후방이 없는 월남 전쟁에 참전한 당시 젊은 군인들은 현지에서 ‘따이한’으로 불리며 목숨을 담보로 달러를 벌어들였다.

▲서독 에센광업소. ⓒ아우어 히스토리

반면 독일로 떠난 ‘파독광부’들은 이역만리 지구 반대편 지하 막장에서 역시 목숨을 걸고 돈을 벌어야 했다.

당시 대학을 나와도 취업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워 파독광부로 선발만 되면 대기업에 취직한 것보다 부러워할 정도였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6·25전쟁을 거친 뒤 4·19와 5·16 등 격동의 시대를 지낸 20대 청춘들은 일하고 싶었지만 일자리가 없어 실업자가 넘쳐났다.


1963년 당시 통계에 따르면 인구 2400만, 실업자 250만, 종업원 200인 이상 기업 54개, 1인당 국민총생산 87달러의 초라한 성적표를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대학을 나온 고학력자들도 실업자 신세를 면치 못하자 해외개발공사를 통해 광부 경력자를 선발하는 파독광부 모집에 소위 ‘빽’을 동원해 독일 행을 찾을 정도로 혈안이 되었다.

서울대 법대를 나온 조립(75.독일거주)씨는 지난 1963년 12월 최초로 독일 땅을 밟은 파독광부 1진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사법고시에 잇따라 실패하자 파독광부 모집에 응시했던 사람이다. 사법시험에는 낙방했지만 ‘파독광부 고시’에는 합격한 셈이다.

이처럼 당시 파독광부들의 학력은 해외개발공사 통계에 따르면 85% 이상이 고졸 이상일 정도로 고학력자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해외개발공사를 통해 파독광부를 송출한 당시는 일자리를 구하기가 힘들어 모집공고만 나가면 실업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광부경력자를 선발한다고 자격요건을 명시했지만 광산의 ‘광’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파독광부를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는 고위 관료나 국회의원 등 든든한 ‘빽’이 있거나 힘 있는 사람에게 돈을 쓰면 파독광부로 선발돼 독일에 나갈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과정에서 취업알선 브로커가 판을 치게 됐고 선량한 파독광부취업 희망자들이 돈을 뜯기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1967년 10월 전북 김제가 고향인 최모(28)씨는 광부로 독일에 가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종로에 있는 해외개발공사를 기웃거렸다.

이렇게 며칠 동안 해외개발공사 근처를 기웃거리다 40대 초반의 말쑥한 신사를 만나게 되었다.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40대의 신사는 “이곳에 왜 왔느냐?”고 물었다.

순진한 최씨가 “파독광부로 독일에 가서 돈을 벌고 싶은데 아는 사람도 없고 특별한 능력도 없어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이 신사는 기다렸다는 듯 “젊은이 말을 들으니 남의 일 같지 않아 측은하게 생각된다. 동생으로 생각해 내가 도와 주겠다”며 인근의 다방으로 데려갔다.

그는 “파독광부로 나가려면 든든한 빽이 있는 사람에게 줄을 서야 한다. 당신 사정이 매우 딱한 것 같아 내가 방법을 알려 줄테니 시키는 데로 하라”고 말했다.


ⓒ김종환

최씨는 40대의 신사에게서 소위 말하는 ‘빽’이 있는 집안에 찾아가 부탁을 하라는 식으로 귀띔을 했다. 당연히 최씨는 중년 신사의 친절하고 자상한 설명을 들은 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다음날 최씨는 신사가 알려준 데로 한강변이 내려다보이는 마포의 한 2층 양옥집을 찾아갔다.

초인종을 누르자 식모인 듯 한 아주머니가 나왔다.
“누구세요?”

그는 “주인을 만나러 왔다”고 말하자 식모 아주머니가 그를 현관으로 안내했다.

최씨가 양옥집 현관에 들어서자 번쩍번쩍 빛이 나는 대령계급장이 달린 군복이 걸려있었고 집안 장식품도 고관대작의 집에서나 볼 수 있는 것처럼 으리으리했다.

이때 안방에서 40세쯤 되어 보이는 귀부인 티가 나는 중년부인이 나와 “무슨 일로 오셨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최씨는 “독일에 광부로 가고 싶은데 빽이 없어 몇 달째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다. 도와주시면 은혜를 잊지 않고 꼭 보답하겠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자 중년부인은 “우리 남편이 알면 큰일 나니 어서 나가라!”고 윽박질렀다.

그렇지만 그는 신사가 시키는 데로 현관소파에 이력서가 든 돈봉투를 부인 몰래 남겨 놓고 도망치듯 양옥집을 빠져 나왔다.

최씨는 집에 와서 ‘이제 빽이 든든한 분에게 돈봉투와 이력서를 맡겼으니 독일행은 틀림없다’며 기대에 부풀어 연락을 기다렸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자신에게 소식이 있을 줄 알았는데 3일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조차 없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마포의 양옥집에 찾아가 초인종을 계속 눌렀지만 아무도 나오는 사람도 없고 집안은 인기척도 없이 쥐죽은 듯 조용했다.

허탈하고 불안한 마음에 집주인이 외출했나 하고 집 앞에 주저앉아 기다리고 있다 보니 허름한 옷차림의 20세 후반의 남자들이 꾸역꾸역 몰려드는 것이 아닌가.

낫선 사람들이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모두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면서 한결같이 40대의 양복 입은 신사를 만나 사기를 당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 한 사람이 “여기에 있어봤자 아무 대책이 없으니 모두 해외개발공사로 가서 방법을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모두 40명 가까운 피해자들이 해외개발공사를 찾아가 간부를 면담했다.

“저희는 파독광부로 나가려다가 취업사기를 당했다. 파독광부로 나갈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이 말을 들은 해외개발공사 간부는 대뜸 “야, 여기에 있는 놈들도 모두 사기꾼과 똑같은 놈들이니 모조리 영창에 집어넣도록 해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혹을 떼러 갔다가 오히려 혹 하나를 더 붙일 것 같은 최씨 일행들은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이후 최씨는 공사판 근처에서 날품팔이로 생활하다가 파독광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고향의 논을 팔아 6개월 뒤 독일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관련 기관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 1963년부터 1977년까지 15년 동안 파독광부로 독일 땅을 밟은 광부는 정확하게 7936명에 달했다. 그러나 실제 경력 광부는 채 15%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파악됐다.

건국이후 해외인력 송출 제1호로 기록된 파독광부들은 정부에서는 ‘국위선양’을 명분으로 삼았지만 주된 목적은 ‘외화획득’에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정부는 파독광부 때문에 국가경제발전이 한층 수월해졌다는 농담까지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광부들이 지하에서 석탄을 캐내 비싼 외화를 절약케 했으며 8000여 명에 달하는 파독광부들의 외화송금으로 역시 외화난에 시달리던 당시 정부를 크게 도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종환

특히 파독광부들은 1965년부터 시작된 간호사 파독과 연결되면서 독일현지에서 많은 사연을 남겼다.

당시 독일에서는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탄광촌을 중심으로 한인회가 조직되어 있었는데 광부와 간호사를 연결해 주는 ‘중매여행’도 상당했다고 전해진다.

독일에 홀로 온 ‘기러기’처럼 외로운 광부에게 짝 지어주는 이른바 중매역할을 한인회는 물론 간호사와 광부, 여행사에서도 나섰는데 중매여행으로 많은 광부와 간호사가 결혼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간호대학을 나온 간호사들은 1976년까지 11년 동안 1만32명이 독일에 파견됐는데 절반정도가 현지에서 정착, 독일인이나 파독광부와 결혼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파독광부들도 4000여 명 정도만 귀국하고 나머지는 학업과 더 좋은 일자리를 위해 부모형제와 친지가 있는 고국을 등지고 독일에 눌러 앉거나 캐나다 등지로 이주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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