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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육, 생각보다 더 크레이지!"

[민들레] 10대들에게는 삶의 '틈'이 필요하다

3년 내내 야근하는 10대

고등학생들을 만난 자리에서 "요즘도 개근상이 있느냐?"고 물었다가 부모 성토대회로 이어진 적이 있다.

"축구하다가 발을 다쳤는데, 자고 일어나니까 퉁퉁 부은 거예요. 아파 죽겠는데 엄마가 수업 빼먹으면 안 된다고 해서 부은 발에 슬리퍼 끌고 겨우 학교 갔어요. 나중에 보니까 발가락 세 개가 부러졌더라고요."

"공부 못해서 학력우수상 이런 거 못 받는 애들은 엎드려 잠만 자면서도 결석은 안 해요. 엄마가 나중에 사회 생활하려면 개근상이라도 받아 오라고 했대요."

개근상은 '틈'을 허락하지 않는 한국 교육의 표상이다. 3년, 6년, 혹은 12년 동안 결석 한 번 하지 않았다는 건 그들이 병치레 한 번 없을 만큼 건강했다는 게 아니라 아픈 몸을 이끌고도 꾸역꾸역 학교에 갔다는 뜻이며, 집안의 어떤 대소사도 '학교 출석'에 우선하는 건 없다는 걸 의미한다. 예로부터 학교의 절대 권력을 숭배하던 많은 부모들이 아파 죽겠다는 아이에게 '죽어도 학교 가서 죽어라'는 진리를 설파하며 등을 떠밀지 않았던가. 심지어 2년 전 경기도교육청에서 '아이들 아침밥 좀 먹고 학교 오게 하자'며 9시 등교를 시행했을 때, 일부 부모들이 반대한 이유는 '공부할 시간이 줄어든다'였다(8시 30분에서 9시로, 겨우 30분 늦춰지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개근상이 없어진 학교도 많고, 체험학습이란 명목으로 공식적 결석이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개근상이 상징하던 '근면 성실'의 위력까지 사라진 건 아닌 듯하다. 아이 문제를 상담할 때 걱정하는 부모들의 첫마디는 "학교에 안 가려고 해요"다. 본디 아이들이란, '학교에 있어야 하는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학교 밖 공간을 두려워하는 부모를 탓할 수도 없는 것이, 여전히 사회는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에 대한 편견이 심하고, 학교 말고는 갈 곳이 없는 빈약한 현실마저 이 두려움을 무한 재생하니 말이다.

ⓒ연합뉴스

잡지 마감을 하기 위해 야근할 때면, 자주 대한민국 고등학생을 떠올린다. 며칠 무리해서 일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밤마다 야근하는 10대들이라니. 그것도 3년 내내. 청소년단체 '아수나로'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지금도 인문계 고등학교 98퍼센트가 야간자율학습을 실시하고, 학생들은 하루 평균 12시간 학교에 머무른다. <길들여지는 아이들>(오필선 옮김, 민들레 펴냄)의 저자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늦은 밤 야간 자율학습(야자)을 마치고 우르르 건널목을 건너는 고등학생들을 보고는 한국 교육이 생각보다 더 "크레이지(crazy)!"라며 깜짝 놀랐다고. 그러나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는 걸, 학원가고 독서실 갔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귀가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크리스는 뭐라고 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호기심 많고 궁금한 것투성이일 아이들이 가야 할 곳, 갈 수 있는 곳이 학교밖에 없다는 것은 참 슬픈 현실이다. 세상에는 신기하고, 아름답고, 재미난 곳이 얼마나 많은가. 인생의 꽃다운 시절을 답답한 공간에서 시들시들한 배춧잎처럼 보내고 있는 것이 가엾지도 않은지, 부모들은 수시로 "어디냐?"며 잠시도 딴짓을 하지 못하도록 아이의 동선을 추적한다. 잔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말 잘 듣는' 것으로 불안한 부모를 안심시켜야 하는 아이들은 과연 어떤 꿈을 꾸면서 살고 있을까.

삶의 '틈'이 필요한 청년들

유럽에서는 자기를 돌아보고 세상을 배우는 '틈새 교육'이 보편화되어 있다. 1년 동안 전환의 시간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전환 학년(Transition Year)', 혹은 1년의 틈새 시기를 보낸다고 해서 '갭이어(Gap Year)'라고도 하는 이 교육 시스템이 한국에 알려진 것은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딸 덕분이다. 하버드 대학에 합격한 오바마의 큰딸이 바로 진학하지 않고, 갭이어 시간을 가진 것이 화제가 되면서 미국의 갭이어 상황도 함께 조명 받았다.

미국에서는 우수한 학생들의 대학 중도 포기가 심각해지자, 갭이어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최근 수요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그 1년 동안 학생들은 주로 여행을 떠나거나 여러 가지 직업 체험의 시간을 갖는데, 2016년에는 전년 대비 20퍼센트 이상 증가한 4만여 명이 갭이어를 선택했다. 갭이어를 보낸 청년들이 진로와 전공이 뚜렷해지고 학업에서도 좋은 결과를 나타낸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많은 대학들이 입학할 학생들에게 갭이어를 권장하고 있다. 갭이어가 부유층 학생들의 전유물이라는 비판이 나오자, 일부 대학들은 저소득층 학생들의 갭이어를 위한 재정 지원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질주를 강요하는 촘촘한 교육시스템에 균열 조짐이 일고 있다. 최근 교육부에서는 의무교육 단계에 있으나, 학교에 다니지 않는 학생의 안전과 교육을 국가가 책임지겠다고 나섰다. 그동안 학교 밖 청소년의 지원 방향은 '다시 학교로 돌아오게 하는 것'에 초점이 있었는데, 이들의 학교 복귀가 사실상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학교 밖에서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경로를 제도적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지정된 기관에서의 학점은행으로 학력을 인정하는 정도의 시스템이지만, 더 이상 학교시스템 안에 아이들을 가두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한계를 인식했다는 점에서 교육과 학교의 기능을 재고해볼 수 있는 고무적 정책이기도 하다.

공교육 안에서 중학교 '자유학기제'나 '방과후학교', '마을학교'처럼 기존 과정을 운영하면서 부분적으로 교육의 빈틈을 해소하는 프로그램도 있지만, 좀 더 과감하게 '획일화된 교육으로부터의 탈주'를 선언한 것은 서울시교육청이 작년부터 시행한 고교 자유학년제 '오디세이학 교'다. 비록 두 해째지만, 이 제도가 비교적 빨리 안착된 것은 교육감이 적극적인 의지를 갖추고 추진하고 있으며 민간 대안교육현장들이 그 역할에 부응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복교(復校)를 전제로 하고 있어 기본 교과를 이수해야 하고, 통학형이어서 획기적인 변화를 꾀하기 어렵다는 한계도 있지만, 1년간의 갭이어 경험도 학력으로 인정되어 유급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다시 돌아갈 곳이 보장되어 있다는 점도 부모나 아이들 입장에서 안심할 수 있는 요소다.

또 다른 청소년 갭이어의 움직임은 덴마크 애프터스콜레처럼 1년간의 자유학교가 비인가 형태로 생기고 있다는 것. 올해 문을 연 강화도의 '꿈틀리인생학교'나 함께여는교육연구소가 일산과 용인에 마련한 '열일곱인생학교' 같은 곳이 대표적인데, 16~18세 학생들에게 자기를 돌아보고 삶을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어주고자 생겼다. 딸아이의 경험을 사회적으로 확대한 '꽃다운친구들'처럼 '방학이 1년'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하는 유연한 갭이어 프로그램도 학교 밖에서 1년 정도 지내보고 싶지만 혼자서는 막막한 청소년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1년은 아니지만 틈새 시간을 활용해 청년들의 삶을 지원하는 좋은 사례로 '21세기청소년공동체희망'이 매년 수능이 끝날 무렵 진행하는 '열아홉, 스물'라는 프로그램이다. '내 인생의 한 뼘 성장, 스무 살을 준비하는 고3 프로그램'은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3개월 동안 '노동 권리 배우기' '인생 선배 만나기' '사회심리학' 같은 다양한 강좌와 여행, 연탄 배달, 사회참여 등 이웃과 사회에 대한 체험활동이 준비되는데, 참가자들의 만족도가 무척 높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청년들에겐 그동안 어디서도 배울 수 없었던 삶의 철학뿐 아니라 사회인으로서 필요한 상식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달 전 '세월호 세대'를 취재하며 막 스무 살이 된 청년을 만났다. 그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성인이 되는 마음가짐을 준비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열아홉 살에서 스무 살로 들어서면서 하룻밤 사이에 공식적 성인이 되었는데, 어디서도 가르쳐주지 않던 것을 배웠으며, 특히 노동의 권리를 공부한 것이 아르바이트를 할 때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다고.

중고 과정에서 틈새의 시기를 갖는 것은 조금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삶의 한 매듭을 짓는, 게다가 성인기에 접어들며 급격한 변화를 겪는 스무 살 청년에게는 더 적극적 의지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다. 이런 틈새의 시간이 더 다양해지고 많아질 필요가 있다. 덴마크의 시민 대학 폴케호이스콜레는 그런 시간을 보장해주는 좋은 모델이다. 자신에게 전환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껴 휴학하거나 직장을 그만두어도, 주변의 눈치를 보느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20대 청년들에게서 이런 틈새 시간에 대한 절실한 요구가 생겨나고 있다.

삶에서 중요한 것들은 어디서 배울 수 있을까

한 지인은 내년이면 초등학생이 될 일곱 살 아이를 보면서 '학교 가서 적응을 못 하면 어쩌지? 왕따 당하면 어쩌지? 선생님 잘못 만나면 어쩌지?' 등 벌써 걱정이 한 짐이다. 한날은 잠든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자기 인생에 무게를 더하는 '걱정덩어리'로 보여 흠칫 놀랐다고 한다.

많은 부모들이 자식의 미래에 대해서 걱정부터 하게 되는 것은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 조금만 뒤지거나 늦어도 도태된 삶으로 인식하는 사회의 뿌리 깊은 경쟁의식에 길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은 속도전!'이라는 구호가 익숙한 부모세대는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게 하고 싶은 마음과 그래도 남들 속도에 맞추어야 할 것 같은 불안한 마음 사이에 자식을 놓고 언제나 팽팽한 줄다리기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불안은 전염된다. 부모의 불안을 등에 지고 어린 시절부터 삶을 견뎌내야 하는 과정으로 여기게 만드는 일은 살아 있는 존재의 '생기'를 꺾는다. 성장기란 고정되지 않고 시시때때로 변하고 움직이며, 그 방향과 가능성이 무한한 시기라서 '성장기'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게 되기까지는 실패해도 괜찮다는 것, 실패한 인생이란 없다는 것을 몸으로 익힐 수 있는 연습의 기회가 필요하다.

"아무리 오래 학교에 다녀도 정작 삶에서 중요한 것들은 알려주지 않는다"는 한 청년의 목소리가 가슴에 남아 있다. 어른이 된다고 저절로 알아지지 않는 것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질주하며 멈추기를 두려워하는 한국의 교육에선 더욱 그 속도에 브레이크를 거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삶의 전환과 변태의 시간을 사회적 시스템으로 보장하는 것은 '천천히 가도 괜찮다'는 인식을 사회적으로 용인하는 것이고, '옆을 살피는 것'이 낙오나 도태가 아니라 새 길을 찾는 시도란 걸 인정하는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와 같은 말이 청년들의 냉소를 산 이유는 '헬조선'을 살아가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값싼 위로의 말이 아니라 삶의 기쁨과 고통, 협력과 자치의 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는 안전한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담임으로 아이들을 만나던 시절 내가 첫 번째로 했던 일은 '제 삶의 주권을 되찾는' 연습이었다. 학기 초가 되면, 명령과 지시에 익숙해져 있던 신입생들은 끊임없이 물었다. "화장실 다녀와도 돼요?" "자리 바꿔도 돼요?" "이거 가져가도 돼요?" "기숙사 올라가도 돼요?" 그들이 어른들에게 허락을 받아야만 행동할 수 있었던 영역이 생각보다 넓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돼요? 안 돼요?"는 질문이 아니라, 자기 삶의 결정권을 타인에게 양도한 채 허락을 구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반복해서 알려주어야 했다. "네 행동을 허락할 권한은 담임인 내게 없으며, 그 행동이 교실 안에서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주는 일이라면 함께 의논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자신의 자유의지는 누군가의 허락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라고, 다만 그 행동에는 책임이 따를 뿐이라는 것을 아이들 스스로 인식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과정에는 '실패를 다그치지 않고 지켜봐 주는 따뜻한 시선'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본다.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조차 몰랐을 뿐 아니라, 작은 것 하나도 스스로 결정하길(책임지길) 두려워했던 아이들에게 '실패할 수 있는 용기'와 '방황해도 괜찮은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인생이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저만의 몫이다. 그것은 축복이기도, 부담이기도 하다.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이 성인들을 위해 만든 인생학교가 세계적으로 번지며 인기를 끄는 것은 제 인생을 제대로 살아보고 싶은 욕구는 아이어른 할 것 없이 누구나 갖고 있기 때문 아닐까?

더 많은 아이들이 천천히 자기를 들여다보며 사람을 이해하고, 세상을 궁금해하며, 제 안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시간을 갖기를. 시들시들한 배추 잎이 아니라, 새벽이슬 품은 토란잎처럼 생기 넘치길. 성장기를 놓쳤지만 성장이 필요한 어른들도 부디, 그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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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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