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재생의 등장과 통합적 접근법
배웅규 : 잘 알려진 도시 만들기의 사례를 보면, 시작은 개발 중심으로 출발합니다. 어느 정도 개발이 되면, 있는 것을 잘 관리하다가 이후 과거의 개발이 낡고 쇠퇴한 것을 되살려 활용합니다. 우리 사회도 이런 성장 과정을 경험하는데, 특히나 선진국의 도시발전 경로가 가령 국을 비롯한 유럽에서는 1800년대부터 몇백 년을 걸친 것을 우리는 상대적으로 압축해 진행하다 보니, 조급하고 쫓기는 듯합니다. 개발과 정비 방식은 어느새 '도시재생 방법론'을 취했죠.
오늘의 관점에서 지난 시대의 급박한 물리적 환경 조성의 도시 만들기 방식에 어두운 면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여건에서는 충분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경제가 성장하고 삶의 질에 대한 기준도 높아짐에 따라 물리적 환경 조성만으로 사람들의 욕구를 해결할 수 없게 됩니다. 도시 만들기의 방식도 당연히 전환되지요. 전면 철거 위주의 개발 방식에 유지 관리도 가능한 '재생(再生)'의 관점이 제도적으로도 보완됩니다.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저성장, 고령화, 다문화 등 내가 사는 장소에 대한 가치가 새롭게 변하면서 도시 만들기도 개념이 변하는데, 이제는 '도시재생'의 관점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남진 : 저는 도시재생과 관련해 국가연구개발R&D 사업을 수행 중이고, '도시재생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약칭 '도시재생법')이 만들어지기까지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2013년에는 국회에서 이 법이 왜 필요한지 진술하기도 했습니다. 2006년에 국가R&D의 기획과제로 도시재생을 제안한 배경에는, 우리나라의 재정비 방법이 지금의 패러다임이나 가치관과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성장시대에서 저성장시대로 변하고 있습니다. 서울을 비롯한 도시민들은 현재 성장시대에서 성숙시대로 가는 단계인데, 앞서 말씀하신 대로 과거에는 이촌향도의 급변으로 국가나 지방정부는 기반시설 및 주택 공급에 열을 쏟고 효율성을 우선시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효율이나 합리성보다 형평성과 특수성, 지역 희귀성, 고유성, 정체성 등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도시재생'이라는 용어도 이러한 저성장·성숙시대에 맞는 도시정책인 것이죠. 2007년 국가R&D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당시 도시재생이라는 개념이 잘 잡히지 않으니 많이들 어려워했어요. 중앙정부의 각 부처나 지방정부에서도 지역 역량강화와 지역공동체의 활성화를 얘기하는데 이것이 국토부가 할 일인지, 마중물 사업으로 공공재원을 투입하는 것이 타당한 일인지 판단이 쉽지 않았죠. 그렇게 각 부처 간 이해가 다른 상황에서 어렵게 진행하다가 '도시재생법'이 탄생했습니다.
현재의 주택재개발 사업방식은 과거 무허가 건물이나 노후·불량주택이 밀집된 것을 전면 철거하는 방식을 여전히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의 대표 수단으로 인식합니다. 실제로 저소득층(월평균 가구 소득 200만 원 이하)이 사는 주거지에 600만 원대의 가구 소득을 가진 분들이 들어온 거예요. 그러니 기존에 살던 분들이 나가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금 서울에는 1962년 건축법이 제정된 이후에 만들어진, 즉 법의 기준을 지켜 만든 주택이 대부분이라 과거처럼 무허가건물, 흙담집, 슬레이트 지붕 집, 곧 무너질 위험한 집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저층 주거지에 1983년에 도입한 '합동재개발'2) 방식을 그대로 적용한다는 게 무리가 있죠. 이런 문제점을 국회에서 진술했고, 본회의를 통과해 '도시재생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습니다. 2013년 12월의 시행을 거쳐 2014년에 국가에서 13개의 선도지역을 선정하는데, 서울에서는 창신·숭인 도시재생 선도지역이 그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올해 지자체 공모를 거쳐 총 33개의 '도시재생 활성화 지역(일반지역)'이 선정되었습니다.
배웅규 : 저는 도시재생이 만병통치약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시재생'이 대한민국의 사회 변화에 대응하고, 지역별 쇠퇴 문제에 부응하여 새로운 미래를 기획할 수 있는 희망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시범사업과 전국적으로 시작된 도시재생사업은 생각보다 더디고 많은 사람이 함께해야 하는 긴 여정입니다. 의욕적으로 만들어진 도시재생이 뭔가 특별한 것을 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다릅니다.
'도시재생 활성화 계획'을 보면, 선물(先物)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마중물 사업의 선정을 제외하면 독립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연계 고리를 마련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업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의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당 지역의 도시재생 활성화를 위해 공적자금 배분과 기존의 여러 부처가 추진해온 관련 사업을 장소통합적으로 연계해준 계획이지, 어떤 사업을 시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입니다. 개발과 공급자 중심의 시스템이 한계에 다다랐으니 수요자 중심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당연한 이야기 말고, 실제 장소의 민낯과 지역민과의 이해를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가 도시재생의 핵심 과제입니다.
종전 대표적인 정비 수단은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이하 '도정법')이었습니다. 구역이 정해지면 건축행위를 금지하는데, 전면철거 후 아파트를 짓는 방식이었죠. 결국 이 제도도 2010년경 변화된 여건을 고려해 관련법과 통합·재편하여, 기본법과 주거환경재생법, 도시환경재생법을 제정하고자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노력이 '도시재생법' 제정으로 이어지진 못했지만 ,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생활권 계획으로 정비 예정 구역을 지정하지 않을 수 있고, 가로주택정비사업과 주거환경관리사업에 의해 기존 환경을 살리면서 생활기반시설을 보완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남진 : 저는 배 교수님과 시각이 좀 다른데요. 당시 저는 '도시재생법'의 성격을 기존의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이나 '도시재정비 촉진을 위한 특별법'과 같은 절차법이 아니라, 지원법과 기본법의 성격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국가가 '이제는 신도시나 신시가지 개발을 하지 않겠다'는 정신을 이야기하는 기본법 말입니다. 신도시나 신시가지 개발은 도시재생이나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와 같이 기성 시가지를 정비하는 것보다 훨씬 쉬워요. 하지만 이제는 인구가 급증하는 시대도 아니고 신도시나 신시가지에 인프라를 재구축하는 것은 돈도 너무 많이 드니, 역사와 정체성이 담보된 지역을 우리가 버리지 말고 이미 있는 자원을 잘 활용하는 도시재생으로 가면 좋겠다는 것이었죠. 신도시나 신시가지 개발 같은 택지개발이 열려 있으면 그 어려운 도시재생을 누가 하려고 하겠습니까?
유럽이나 일본은 신도시나 택지개발을 접었기 때문에 기성 시가지의 재생 이외에는 수단이 없으니, 여기에 머리를 싸매고 있는 거죠. 미국에서는 도시재생이란 용어 대신 경제개발(revitalization)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어반스프롤(urban sprawl), 즉 도심은 고층빌딩이 들어서니 외곽을 계속 개발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쉽게 토지를 가지고 주택을 공급할 수 있는데, 뭐 골치 아프게 살고 있는 사람의 소유권을 건드리며 복잡한 일을 하겠어요. 그래서 저는 국가에서 신도시나 신시가지 개발보다는 기성 시가지의 도시재생을 우선시하겠다는 데에 큰 의미를 두고, 국가가 이제는 도시재생을 국가재정을 통해서 투입하겠다는 선언적인 법이 하루빨리 입안되길 바랐습니다. 현재의 '도시재생법'이 완벽한 것은 아니고 도시계획 관련법들과의 연계에도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도시정책의 패러다임에 변화를 꾀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배웅규 : 도시 관리 체계가 국토법을 기준으로 다른 것도 연계되어 돌아가는데, 관계가 명쾌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각 사업들도 국비를 지원받는 수단인 것에 방점을 찍는 것으로 보입니다. 국비 지원이 없더라도 할 수 있지만, 그러면 지역에서 동기부여가 안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서울은 국비 지원에 조금은 자유롭다 하지만, 지방은 현실적으로 지원이 없으면 작동이 어렵지 않나요? 예를 들어, 서울 성수동은 국비와 무관하게 가는 경우고, 제가 맡은 가리봉 일대는 국비가 일부 매칭된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소방서에서 소화전을 설치하면 이 구역에는 중복지원이라며 다른 사업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제는 그와 다르게 어떤 장소를 중심으로 소방서에서 소화전도 설치하고 하수도와 노후주택도 개량하죠. 그런 협업 가능한 틀을 만들면서 같이 모이는 것에 대한 타당성도 필요하니, 공동체 육성의 일환으로 주민협의체라는 새로운 자생구조를 만든 게 '도시재생법'의 핵심이고 작동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남진 : 도시재생을 한마디로 말하면, '협업과 종합계획'이라고 생각합니다. 협업이라는 것은 부처 간의 지긋지긋한 칸막이 행정을 없애고, 도시재생이 필요한 장소(place)를 중심으로 중앙정부의 각 부처나 지방정부의 해당 국·과에서 각각의 일반회계사업을 집중하여 사회·경제·문화·물리적 환경의 개선을 종합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해당 지역의 유무형의 자산을 활용하고, 도시·건축·문화·역사·예술 등 다양한 분야가 협업하여 종합적 도시재생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죠.
두 번째는 종합계획인데요. 도로·공원·건물 등을 각각의 개별적 기능의 시설물로 보고 현재의 방식처럼 개별 설계 및 공사로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도로·공원·건물 그리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모든 액티비티(activity)가 별개로 기능하지 않고, 전체가 도시재생이라는 목적에 녹아들 수 있도록 통합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도시재생은 기존에 우리가 해왔던 기능적이고 개별적인 계획에서 벗어나 주민역량과 지역공동체를 고려한 종합계획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배웅규 : 주민들에게 도시재생을 설명할 때 '기존 방식이 100m 달리기다면 도시재생은 마라톤이다'라고 설명해요. 과거가 빠른 시간 내에 주택이나 인프라를 공급했다면, 이제는 수요자 중심에서 필요한 곳에 기성품이 아닌 맞춤형으로 공급해 도시를 정비하고 관리한다는 거죠. 이게 과거와 다른 점은, 단거리 달리기는 결승전에 선발된 6~8명만 출발선에 서지만, 마라톤은 적게는 수백에서 많게는 2~3만 명이 시작하거든요. 물론 마지막에 월계관을 쓰는 사람이 있어도 참가자 모두가 참가 자체에 의의를 가지죠. 도시재생도 참여하는 모든 분들이 나름의 보람을 느끼게 된다는 거예요. 그것에 관계하는 주최, 참여자 모두는 협업도 하고 칸막이도 없애고요. 그러면 방법론도 당연히 달라지겠죠.
옛날에는 신문에 공람공고 한 번 내고 나서 도시계획위원회 도장 찍고 끝났지만, 이제는 반드시 주민을 위한 설명회를 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지역 전체로 공지를 해서 모여서 주민모임도 만듭니다. 장소통합이 이루어지려면 해당 지역에 사는 분들의 생각을 모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 공동체역량강화의 측면에서 방법론을 가져가죠. 참가자들은 10초 만에 승부가 판가름나는 게임이 아니라, 꾸준히 더 멀리 긴 시간을 가지고 가면서 다 함께 보람과 혜택을 누리는 것이죠.
스스로 궁리하고 참여하는 주민 주체
남진 : 이 부분에서 도시재생의 최종 목적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민참여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저는 성수동 도시재생시범사업의 총괄계획을 맡고 있는데, 초반에는 별 관심이 없는 주민들을 향해 주민 주체의 지역재생을 설명하기 위해 설명회, 아카데미, 주민워크숍, 마을탐방을 권장하며 많은 홍보를 했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죠. 그래서 무엇보다 주민들이 빨리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일반인과 전문가를 대상으로 맞춤 별 공모사업들을 추진했고 그것들이 지역에 자연스럽게 스미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통상 주민참여가 많아야 좋은 것이라는 강박을 갖고 무조건 일단 모으려 하죠. 하지만 도시재생 과정에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수단을 그동안 하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지역 활성화와 재생을 위해 주민이 자발적인 의지로 참여한다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그래서 비록 소수일지라도 주민이나 지역의 소상공인, 문화·예술단체, 사회적 경제조직들이 노력한다면 그 자체로도 충분합니다.
배웅규 : 사례로 좀 들어가면, '도시재생법'을 하기 전 '도정법'을 개정해서 철거 대신 유지관리형 주거를 만들어보자고 해서 2009년 '휴먼타운'이란 이름으로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상지 단위가 3~5만 제곱미터(㎡) 정도인데(참고로 지금의 재생활성화 구역은 30–50만㎡입니다), 아파트 단지에 있는 커뮤니티센터, 생활지원센터를 단독주택 지역에도 넣자는 것이었어요. 실제로 당시의 사업들은 작동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생지구는 워낙 크다 보니 '앵커시설'이란 이름으로, 몇 곳에 마중물 개념을 도입해 문제 해결 중입니다.
주민에 대한 정의도 지역마다 달라집니다. 성수와는 다르게 가리봉은 '뉴타운사업' 지구로 묶여 있었습니다. 추진세력과 반대세력의 갈등이 심하고 주민을 정의하는 것부터 논란이 컸습니다. 일부는 가리봉을 생활권으로 하는 이들 모두가 주민이 아닌, 토지 소유자로 국한하려는 의견도 있었어요. 물론 이곳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주민협의체 회원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특히나 가리봉에는 이주민이 많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등록된 외국인이나 중국 교포가 40%인데, 주민센터가 추정하는 수치는 75% 수준입니다. 오히려 더 넘을 수도 있겠죠.
도시재생을 위해 주민참여가 필요한 수단인데, 그러면 그게 만병통치약이냐?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주민참여가 필요한 것도 있지만, 잘못하면 집단이기주의가 될 수도 있거든요. 워낙 많은 사람이 모이다 보면 생각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를 슬기롭게 해결하려면 주민역량 강화가 중요한 것이고, 실제로 도시재생 활성화 계획에는 '주민역량강화'를 핵심 사업으로 고려합니다. 명칭은 구역마다 '마을학교', '재생학교' 등으로 조금씩 다르지만 이를 통해 '주민참여'라는 중요한 수단을 효과적으로 선하게 활용하면서 과거 개발사업과 차이를 두어야 하죠.
남진 : 주민 스스로 깨어 있지 않고 우리 역량을 키우지 않는다면, 또한 우리 지역을 위해 주민 스스로가 궁리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도시재생은 먼 이야기일 수밖에 없어요.
배웅규 : 저는 가리봉을 맡고 제일 처음 한 일이 매일 방문해 곳곳을 걸으며 생소한 음식도 먹고 낯선 냄새에 취해보고, 이곳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직접 자주 보는 것이었어요. 가리봉은 뉴타운 해제를 두고 워낙 갈등이 많았던 곳이어서 주민들이 우리와 한국퇴주택공사(LH)가 하는 이 사업에 참여 여부를 두고, 2013년 상반기에는 주민투표까지 했어요. 결과는 반대고, 시가 뉴타운 해제 후 어떻게 도시재생을 유도해나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측면에서 용역이 발주되고, 제가 그 일을 총괄계획가로서 참여한 겁니다. 가리봉 주민들은 관과 공공에 대한 불신이 매우 팽배해서 섣불리 용역회사든 구청이든 시청이든 얘기하기 힘든 상황이에요. 이곳은 특히나 일용직이 많다 보니, 새벽에 인력시장을 나가면 오후 5시 반쯤 돌아와 그날의 피로를 씻는 동네였습니다. 이들은 매일 일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 1970, 80년대 동네 어른들이 장기를 두듯이, 마작하고 노래하는 것을 즐겨요. 하지만 술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니 사건사고도 있고요. 그래서 소통공간이 필요했고 폐쇄된 마을 마당에 컨테이너 박스를 넣었습니다.
이 지역은 아픔과 갈등이 너무 많아요. 그것을 해소하는 작업이 제일 중요한 것 같더라고요. 게다가 이미 LH와 주민협의체가 서로 불신이 깊어, 저도 '주민협의체'라는 용어보다 '마을 일꾼'을 모집한다고 했고, 그분들이 애향심을 가지고 함께 할 수 있도록 6개월 이상 '마을학교' 일환으로 교육을 했고 마음을 여는 데 1년 가까이 걸린 것 같습니다. 그 이후에야 '재생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까요?' 하는 이야기를 교육 커리큘럼 중 하나로 꺼낼 수 있었죠. 프로그램 중에는 구역별로 나누어 직접 돌아보고 아이디어도 얻었습니다. 지금은 도시재생 활성화 계획의 틀과 내용은 마련되어 세부조정 중입니다.
남진 : 성수동에서는 무엇보다 도시재생이 무엇인지 지역주민에게 전방위로 알리고자 교육과 홍보를 했습니다. 그다음에 '마중물' 예산 100억 원을 어떻게 활용할지 주민들과 모의실험을 했는데 주민이 스스로 사업 기획을 해보니 돈이 부족한 것을 깨달았어요. 구청에도 사업비가 부족하니 각 국·과의 일반회계 사업비를 장소 중심의 도시재생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동네에 집중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수시로 행정협의회를 여는 등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성동구와 시가 행정 간 원활한 소통을 도모하고 어떻게 마스터플랜(Master Plan)을 구성할지 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다음으로 주민역량 강화를 위해 아카데미, 설명회, 마을탐방, 축제 등을 열고 소식지와 SNS도 운영하고, 도시재생 주민기자단이 주민의 이야기를 직접 전하기도 하고 지역의 역사와 자원을 조사하기도 합니다. 특히나 성수는 주거지뿐 아니라, '서울숲'도 있고 '수제화'라는 산업생태가 보존된 지역입니다. 따라서 주거환경 개선뿐만 아니라, 일자리도 중요해 일터환경과 생활환경 모두 개선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소프트웨어를 소개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동안 주민이 직접 지역사회와 지역문제를 개선한 사례와 경험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시재생 활성화 계획에는 시대적·지역적 정신과 철학, 그리고 이념들을 담은 물리적 계획들이 있는데, 이런 계획들은 주민의 의견과 주민협의체의 활동을 전적으로 반하여 수립되고 있고, MP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실행 방법과 장단점을 알려주는 조력자 역할을 수행하는 거죠. 이러한 역할 분담이 수반되어야 도시재생이 성립된다고 봐요. 지금 정확하게 지적하신 바와 같이 주민활동과 참여만이 너무 강조되다 보면 도시재생의 목적이 주민참여가 되는 셈이 되는 것이죠. 도시재생을 위한 수단, 즉 플랫폼이 목적처럼 보이게 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것이지요.
배웅규 : 가리봉에는 독특한 것이 구로공단이 한창 전성기일 때 만들어진 '벌집'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는 점입니다. 1.5평 정도 되는 방에 주간조와 야간조가 나눠 살아요. 작은 방이 빼곡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요. 이러한 주거형태를 이제는 가리봉의 중요한 자신이라고 보고 기록 중인데, 이와 동시에 주민공모사업으로 연결해 '벌집 지킴이'를 운영했습니다. 처음에는 벌집에 익숙한 주민들이 이곳의 가치에 의문을 가졌는데, 지금은 인식이 많이 달라졌죠. 특히 벌집 두 채를 사서 앵커시설로 활용할 예정입니다. 이 안에서 지금은 전시도 하고 지역 문화단체와 연계해서 공연도 했어요. 그러다 보니 이곳의 역사적 가치도 발견하면서 보존 가치 인식도 생깁니다.
남진 : 저희도 예전에 만든 도시재생 활성화 계획에 있던 문제제기들, 가령 성수고가 하부의 열악한 환경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 일터환경을 어떻게 개선할지, 생활자전거와 지역문화특화거리를 어떻게 조성할 것인지 등 주민 스스로가 낸 아이디어들이 그대로 지금의 도시재생활성화 사업에 담겨 있습니다. 주민의 역량 강화와 참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죠.
배웅규 : 젊은 층의 활력을 좀 끌어내는 게 상당히 중요하다고 봐요. 이런 재생지역 대부분이 고령화되고 낙후되다 보니 젊은 층은 잘 찾지 않습니다. 과거 구로공단 시절에는 공단 배후의 중심 지역으로 역할하면서 늘 젊은이가 가득했던 것과 다른 모습이죠. 지금은 뉴타운 개발 제한으로, 주변은 구조고도화로 인해 첨단산업단지로 바뀌지만 여기는 도시의 섬이 되었어요. 첨단산업단지에 다니는 이들은 소위 말하는 창조계층으로 젊은이입니다. 그들은 이곳이 무섭고 생활과 맞지 않다며 피하고요. 그래서 젊은 층이 함께 하는 방안을 모색 중입니다.
남진 : 성수동에서는 주민으로부터 아이디어를 받아요. 도시재생 활성화 계획의 결과만 놓고 보면 과거의 다른 사업계획과 비슷해 보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내용의 구성과 과정은 전혀 다릅니다.
배웅규 : 계획의 방법론이 달라졌죠. 과거에는 전문가가 먼저 작업 후 의견을 듣는 방식이었으니까요. 이제는 계획수립의 주체가 달라졌고, 총괄계획가도 그래서 '총괄코디네이터'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남진 : 선진국에서는 공무원이 같은 업무를 10년, 20년 동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역주민들과 친구처럼 지내면서 도시재생을 함께 도모하는데, 우리나라는 2~3년마다 공무원의 보직이 바뀌잖아요. 그럴 때마다 왜 이런 계획이 세워졌고 주민의 바람이 무엇인지 공감해서 중·장기 도시재생을 실현하기가 어려운 환경이죠. 도시재생센터와 주민, 주민과 주민 사이의 갈등이나 딜레마를 중립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또한 정치적, 행정적인 외압으로부터 독립적인 활동을 수행하여 오롯이 지역 주민의 순수한 의견대로 도시재생사업이 수행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죠.
외국에서는 재단법인이나 민간법인들이 그 일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의 도시·건축·엔지니어링 회사들이 도시재생지원기구나 도시재생으로 추진되는 사업이나 시설들을 프로그램하고 운하는 형태도 있을 수 있죠. 개발시대, 성장시대의 제한적·고정적 역할에서 탈피하여 도시재생에 맞는 형태로 거듭날 수도 있다고 봐요.
배웅규 : 새로운 형태의, 엄밀히 말하면 마을환경에 적합한 커뮤니티 비즈니스가 만들어지고 그게 일상화되어야 건강한 활력을 찾을 수 있겠습니다.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가 뒷받침되어야 하니까요. 과거에 집장사가 집을 짓고 분양해서 집주인에게 넘겨주는 자력 정비의 시스템이 작동했던 것처럼, 도시재생형 자력재생 모델도 커뮤니티 비즈니스로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봅니다. 주민들은 피부에 와 닿는 게 없으니 떠나게 되죠. 환상을 좇다가 좌절하고 불신만 커갑니다.
그래서 도시재생지원센터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해당 기초지자체의 역할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모든 행정서비스 제공의 주체로서 역할이 분명해야 합니다. 가리봉은 특히나 중국에서 처음 한국에 오는 이들의 기착지가 되었습니다. 가방 하나만 들고 오면 여기서 다 해결이 돼요. 잠자리와 일자리 찾는 게 어렵지 않고, 바로 날품시장에 갈 수 있어요. 새벽에 일하고 일당을 벌어와 여인숙비를 내고, 몇주 일하면 저렴한 월세를 얻죠. 이러한 생활구조를 담보하려면 저렴한 주거가 있어야 하고, 비자문제, 기술교육문제를 해결하는 시스템도 살아 있어야 해요. 이렇게 구축된 구조가 도시재생에 의한 급격한 변화로 교란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양과 질 모두 중요하지만, 속도도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지요.
도시재생과 젠트리피케이션
남진 : 성수동은 젠트리피케이션 조례를 처음 만들었습니다. '도시재생법' 내에는 젠트리피케이션의 부작용 방지 내용을 담지 않아서 R&D 연구에서 이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도권 이외 지역에서는 젠트리피케이션이 되면 임대료가 오르니 수도권의 행복한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시재생 사업이 온전히 실현된다면, 지역 활성화로 인한 젠트리피케이션의 부작용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겁니다.
저 또한 젠트리피케이션이 무조건 부정적인 것은 아니라고 보는데, 다만 매출액 증가에 준하는 임대료 상승이 아니라, 그것을 능가하는 급격한 상승이 토착 소상공인을 쫓아내고 새로 들어온 특색 없는 대형 프랜차이즈로 인해 지역의 고유성과 정체성이 없어지는 것은 우려되는 것이죠. 이러한 문제에 대해 이미 주민과 소상공인, 그리고 사회적경제 조직과 많은 논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도시재생 활성화 계획에도 젠트리피케이션의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한 방안들을 담았습니다. 가령, 주민이나 건물주와 임차인의 상생협약, 혹은 임대주택처럼 임대산업공간 확보, 그리고 계약 갱신 시에 5% 이하의 임대료 상승을 유지하는 임대인에게는 재산세 감면혜택을 주는 겁니다.
배웅규 : 이런 상업 활동은 비교적 주기가 빨리 나타나요. 그런데 가리봉동은 '교포사회(동포사회)'거든요. 이곳이 대표적인 기착지 역할을 하고, 여기가 안정되면 대림동, 구의동, 연희동 등 전국으로 가요. 이곳이 첫 출발로 가능한 구조는 저렴한 임대료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게 가능할 수 있었던 건 과거 구로공단이 한창 개발될 때 세워진 벌집 때문이죠.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주거지역에 방 30~–40개씩 들어가는 게 있을 수 없잖아요. 그 벌집이 살아 있고 그 주인이 다 고령화되어 있고 새로운 집을 짓기에는 어렵고 자녀들도 나가 있으니, 특별히 유지관리를 하지 않아도 중국 교포들은 조금은 허름해도 큰 불만 없이 월세 꼬박꼬박 잘 내고 생활하고 있어요.
남진 : 대학교 주변의 하숙집 같은 거네요.
배웅규 : 네. 최근에 건축 제한이 해제되고 난 후 신축이 늘고는 있는데, 분양은 안 돼요. 다행히도 젠트리피케이션의 부정적인 향이 가리봉에는 아직은 없습니다. 그런데 'G밸리(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 인접한 곳에서는 집을 리모델링한 경우 주변 젊은이들이 들어와 서서히 임대료가 올라가고 있는데, 아직까진 절대다수가 그런 구조에 있다 보니 내국인하고 교포들하고 호혜 관계가 있어 그 관계가 아직은 유지되고 있어요. 그곳에 살고 있는 내국인들의 재산권 행사를 충분히 하면서 지역이 달라질 수 있는 공존의 지혜가 도시재생 과정에서 필요하다는 겁니다.
앞서 남 교수님이 임대산업단지를 말씀하셨는데, 그와 비슷하게 가리봉에서도 공공이 벌집을 매입하고 사회적기업을 통해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거나, 더 나아가 서울주택도시공사(SH)나 LH가 개입해 주변 시세보다 저렴하게 유지되는 식의 관계가 젠트리피케이션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피해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요한 주체가 교포단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분들의 역할이 없으면 결국에는 상가 임대료가 확 올라갈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지역에는 여러 교포단체들을 연합하는 '재한동포연합회'라는 가장 큰 단체가 여기 있고, 교포를 대상으로 하는 신문사도 있어서 그런 구조를 잘 활용하면서, 또 내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어려운 점들, 그동안 재산권 행사를 하지 못한 것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게 필요합니다.
남진 : 성수동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주거지만 있는 게 아니라 일터가 함께 있는 지역으로서 종합적인 도시재생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피터 로버츠(Peter Roberts)는 <도시 재생 핸드북(Urban Regeneration: A Handbook)>에서 도시재생을 '물리적·환경적·사회경제적 모든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재생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제가 생각하는 도시재생은 좀 더 적극적인 것입니다. 즉, 먹을거리와 일자리, 그리고 지속적인 혁신이 일어날 수 있는 원동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없이는 도시재생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마중물을 대야만 합니다.
성수동은 수제화 산업과 사회적 경제조직의 메카이며, 덧붙여 문화·예술산업이 공존합니다. 이탈리아 볼로냐의 가죽산업이 세계 명품이 되었듯이 이곳도 지역 고유의 수제화 장인들과 제품을 만드는 기능을 유지·발전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좀 더 많은 젊은이가 수제화 산업에 관심을 가지고 모일 수 있도록 수제화 산업 생태계를 발전시키는 노력이 도시재생 활성화 계획에 녹아들어 있습니다. 삶 터뿐만 아니라 일터, 쉼터, 그리고 공동체 활성화를 성수 도시재생의 목표로 정하고 우리 지역의 혁신이 지속해서 일어날 수 있도록 주민협의체를 중심으로 도시재생 활성화 계획을 수립하고 있습니다.
배웅규 : 끝으로 재생이라는 게 만병통치약이나 도깨비방망이 같은 특별한 게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다만 과거에 했던 성장 방식이 좀 전환되었을 뿐입니다. 그것도 과거에는 우리가 공급자 중심이라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지만 그 당시에 공급을 하지 않으면 최소한의 생활이 안 되었기 때문에 공급을 했던 것이거든요. 그러면 수혜자 방식이 새로운 대안인가? 그것도 아니라는 거죠. 그보다는 생활자의 관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반하는 게 새로운 성장 방식인 거죠. 가리봉의 경우 뉴타운의 아픔으로 주변과 단절되었지만, 그런 가운데 새로운 가치들은 계속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그곳을 근거로 해서 삶의 터전을 가진 사람들을 존중하면서 거기에 조금 뒤처진 시간대를 보완해 주고, 부족한 공간들도 채워야 하죠. 과거에 내 집, 우리 동네만 생각했던 것을 이웃도 생각하고 주변 지역도 생각하는 관점, 그리고 내가 잘 되면 이웃도 잘 될 수 있다는 주변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다양한 삶이 공존하는 사회를 만드는 구조와 이를 조력하는 개발의 모습이 필요한 때입니다.
1) 이번 지면에서 도시재생 대상 중 주로 논의되는 성수동과 가리봉동의 정확한 위치와 유형은 다음과 같다.
- 가리봉
위치 : 구로구 가리봉동 일대(재정비촉진지구 해제지역)
면적 : 약 330,000㎡
유형 : 근린재생 일반형(노후 주거지역)
- 성수
위치: 성동구 성수1가 1동, 성수1가 2동, 성수2가 1동, 성수2가 3동 일대
면적 : 890,000㎡
유형 : 근린재생 일반형(노후 주거지역)
2) 합동재개발 : 주택재개발 사업의 초기 형태. 합동재개발 방식은 사업지역 권리자인 가옥 및 토지의 소유자가 조합을 구성하여 법정 시행자의 자격을 갖추어 자율적으로 주택재개발을 시행하는 방식이다. 이 개발방식으로 1984년부터 1990년 사이 서울 내 2만3000여 호의 불량주택이 철거되고 5만2000여 호의 아파트가 건설되었는데, 이로 인해 도시의 팽창으로 60년대 변두리던 많은 무허가 주택들이 도시 내 주거 적격지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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