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시에 소재한 1군사령부 검찰은 합동수사단 수사결과를 토대로 1980년 5월 20일과 6월 14일 이원갑 등 31명을 ‘사북사건’ 주모자로 구속했다.
이어 6월 17일 1군 검찰은 이원갑씨 등 31명을 재판에 넘기고 50여 명은 불기소처분하면서 사북사건의 수사를 공식 종료했다.
1군 검찰은 주모자인 이원갑씨에게 10년을 구형하는 등, 31명의 사북광업소 광부들에게 계엄포고령 위반, 소요죄 등을 적용해 ‘엄벌’에 처했다.
당시 지학순 주교의 지원으로 임광규 변호사가 ‘사북사건’의 피고인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변론했지만 막강한 군사법정의 장벽을 넘기에는 역부족 이었다.
군사법원의 최종 선고를 앞두고 원주 군사법정에서 이원갑씨가 최후진술을 위해 나섰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우리는 가진 것 없고 배운 것이 없어 광부가 되었습니다. 또 아무 빽도 없는 사람들이 광부들입니다. 우리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했고, 주면 주는 대로 받았을 뿐 입니다. 때문에 이 사람들은 아무 죄가 없습니다. 죄가 있다면 모두 제 잘못입니다. 나는 사형을 시켜도 좋으니 이 사람들은 모두 석방해 주시길 바랍니다.”
약 5분간에 걸쳐 최후 진술을 하면서 이원갑씨가 울먹이며 최후의 진술을 진행하자 재판정에 있던 피고는 물론 방청석에 있던 광부의 가족들은 모두 울먹였고, 일부 광부와 부녀자들은 “엉엉” 소리를 지르며 울기도 했다.
이윽고 8월 6일 제1군사령부 계엄보통군법회의 조광희 재판장(육군대령)은 “피고 이원갑과 신현이는 징역 5년에 처한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이틀 뒤 1군 계엄사령광 윤성민 대장은 사북사건 주범으로 5년형을 선고받은 이원갑 피고인에게 3년형으로 2년 감형을 확정하고 확인서를 발부했다.
이원갑씨의 진술.
“당시 계엄보통군법회의 1심 선고가 난 8월 6일 저녁 재판장인 조광희 대령이 1군 헌병대 유치장을 찾아와 나에게 ‘오늘 판결 결과에 서운한가?’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아닙니다’라고 답변을 하자 재판장은 ‘조금 기다려 보면 좋은 소식이 올 것’이라고 말을 한 뒤 유치장을 나섰다. 그리고 이틀 뒤, 1군 계엄사령관이 2년이 감형된 3년 형을 확인해 주었다.”
1심에서 총 32명의 피고인 가운데 이씨 등 7명에게 실형이 선고됐고, 박노연씨 등 나머지 25명은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이원갑씨 등 7명은 임광규 변호사가 대리해 항소했지만 1981년 1월 24일 육군 계엄고등군법회의(80고군형항제249호)는 항소를 기각했고 다시 대법원에 상고했다.
이러는 사이 이원갑씨 일행은 원주 군헌병대를 거쳐 서울 영등포구치소, 청주교도소로 이감됐다.
1981년 5월 6일 대법원 상고심(81도721)은 이원갑씨의 인장 위조와 동 행사 등에 원심 일부가 파기되자 계엄이 종료된 상황에서 진행된 서울고등법원의 1981년 9월 11일 판결은 이원갑씨에게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하고 석방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이원갑씨의 부인 조순란씨는 “서울고법에서 재판하는 날 재판장이 가족이 왔느냐고 물었다. 손을 들자 오후 9시에 서울 영등포 구치소 앞으로 오라고 했다. 당시 추석 명절을 하루 앞두고 열린 재판이라 식구들은 명절 음식도 만들지 못하고 남편이 석방될까하는 기대를 하며 재판장에 왔다. 석방되는 날 남편을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다.”고 말했다.
사북사건의 주모자로 낙인 찍힌 이원갑씨는 1980년 5월 6일 정선경찰서에 연행된 지 1년 5개월 만에 석방되었지만 그 기나긴 시간동안 부인 조순란씨는 9남매를 키우기 위해 남모르는 눈물과 한숨을 쉬며, 단 한 순간도 편안한 시간을 가질 수가 없었다.
“남편이 경찰에 붙잡혀가자 동네 부녀자들이 몰려와 ‘당신 남편 때문에 우리 신랑이 붙잡혀 갔으니 책임지라’며 항의하는 등 이때부터 난생 처음 경험해보지 못한 고난이 시작됐다. 며칠 후에는 광업소 사택담당자가 찾아와 사택을 비우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런 소란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 되었다. 당시 2살 난 막내아들을 비롯해 큰 딸이 고 3을 막 졸업한 상황이었는데 9남매의 어린 아이들과 시부모 등 12식구가 방 2칸 짜리에서 살았는데 당장 갈 곳이 없었다. 울면서 광업소 관리자에게 사정해 보았지만 엄동설한의 한파보다 더 매몰차게 당장 집을 비우라고 쏘아 붙였다.
나가고 싶지만 갈 곳이 없다고 하소연도 하였다. 남편이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는데 여기저기서 혼을 빼 놓는가 하면 당장 쌀도 없고 연탄도 없었으며, 가족들은 굶어 죽을 위기에 빠졌다. 그래서 그의 부인은 새벽에 우유배달에 나섰고, 큰 딸에게는 아침 식사를 준비 시키기도 하였다. 다행히 황지에서 보험회사 소장을 하는 남편 친구의 도움으로 큰 딸은 제일생명 사북사업소 경리로 취직을 시켰다. 이후 큰딸의 돈벌이로 가정형편은 조금이나마 나아질 수 있었다.
대학을 나와 경찰관이 되겠다던 큰 딸의 꿈은 그녀의 아버지가 사북사건의 주모자로 구속되는 바람에 깨졌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것을 알게 된 천주교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의 도움으로 1군 계엄사령부에서는 관계자들이 사북광업소를 찾아가 이원갑씨의 집안을 도와주도록 지시했다.
이원갑씨는 영창에서 숙식이 해결될 수 있었지만, 남은 가족들의 생계대책은 어려웠던 만큼 광업소에 요청하여 나중에 이원갑씨의 퇴직금에서 공제하더라도 연탄과 쌀은 계속 배급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아니냐고 엄포를 놓은 덕분에 이후에는 매달 연탄 100장과 쌀 60키로그램을 지원받아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그해 크리스마스 때는 손인숙 수녀(당시 고한성당 수녀)가 지학순 주교의 간절한 부탁으로 1군사령부에서 지원한 내복 10벌(9남매 내복 포함)과 연탄 200장, 쌀 6포(60키로그램)를 지원하여 겨울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그 고마움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원갑씨는 서울구치소에서 석방된 뒤 곧장 지학순 주교와 손인숙 수녀, 임광규 변호사 등 ‘사북사건’ 피해자들에게 헌신적으로 도움을 준 은인들을 찾아가 인사했다.
또 1군사령부 계엄보통군법회의 1심 재판장을 맡았던 조광희 대령(당시 전역 후 춘천 순복여고 근무)에게도 찾아가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러나 이원갑씨의 석방을 두려워한 사람도 있었다.
그가 석방되자 사북광업소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사북사건을 배후조종한 인물로 알려진 이씨가 사북에 오면 사북광업소에서 제2의 ‘사북사건’이 재발할 것으로 우려한 때문이다.
1981년 9월 12일 이원갑씨가 사북에 도착하자 사북광업소 노조지부장 홍금종씨가 찾아왔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사북광업소장이 이원갑씨를 만나자고 하는데 함께 가보자”
웬일로 자신을 찾는지 궁금한 이씨는 노조지부장과 함께 소장실로 찾아갔다.
“이원갑씨, 우리 광업소는 4000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광업소에는 아직도 이원갑씨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회사와 지역사회 안정을 위해 (이원갑씨가)사북을 떠났으면 좋겠다. 광업소에서 500만 원을 주고 이사비용은 별도로 지원 할테니 사북을 떠나 달라. 부탁한다.”
황당해진 이씨는 “못 떠난다. 이곳에서 생활터전을 다지며 살았는데 다른 곳으로 떠날 수가 없다. 9남매나 되는 아이들의 나이도 어리고 떠날 수가 없다.”고 단칼에 거절했다.
며칠 후 광업소장이 다시 이씨를 불렀다.
“이원갑씨에게 1000만 원과 이사비용을 지원하겠으니 사북을 떠나 달라. 그 돈을 갖고 가면 다른데서 정착하며 살 수 있지 않겠느냐.”
화가 치민 이씨가 반박했다.
“절대 사북을 못 떠난다. 나는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사람이 아니다. 회사에서 주는 돈을 못 받는다. 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돈을 받으면 내가 어떻게 사느냐. 앞으로 내가 사북광업소 욕을 안 하겠다. 그러니 회사도 내가 살아가는데 방해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
이씨는 평생 직장으로 안 탄광에서 해고된 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친구의 도움을 받아 1981년 10월 제일생명 영업사원(보험모집인)으로 취업해 근무를 시작했다. 당시 탄광촌 사북지역의 보험 모집인은 모두 여성이었는데 이씨가 남성 보험 모집인으로는 최초였다.
사북광업소 광부들은 자신들로 인해 해고당한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보험에 가입해 주고 싶지만 낮에 이씨를 만나면 광업소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 밤에 사택에서 만나 보험가입을 계약했다.
이씨는 사북광업소 동료들의 뜨거운 성원으로 보험 모집인 생활 1년도 안 돼 신규 모집실적이 워낙 출중한 탓에 전국 1등을 차지했다. 이런 영향을 받아 그는 보험 모집인 생활 2년만에 제일생명 사북영업소 소장으로 특진을 하였다.
이씨는 ‘사북사건’주모자로 낙인 찍히는 바람에 광부생활을 타의에 의해 접고, 보험 모집인으로 새 인생을 시작한지 12년 만에 보험회사를 그만두었다.
이씨의 회고.
“1981년 9월 교도소에서 출감한 뒤 사북광업소에서 돈을 받아 다른 곳으로 떠났다면 사북사건이 민주화 운동으로 명예회복을 받을 수가 없었다. 특히 그 돈을 받고 사북을 떠난다면 돈에 팔린 사람으로 나는 동료들에게 손가락질 받았을 것이다. 보험회사에 다니며 9남매를 키우고 열심히 살았다.
그러다가 2001년 9월 사북사건 피해자들 가운데 몇 명이 주도해 ‘사북사건 명예회복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사북사건이 폭도들에 의한 폭동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나섰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2005년 사북사건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자녀들이 사북사건 주모자의 2세들로 빨갱이 자식이라고 놀림을 받았는데 이게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이씨는 ‘사북사건’의 명예회복을 위해 함께 피해를 당했던 동료 10여 명과 함께 사북사건동지회를 결성한 뒤 사북사건 명예회복운동을 추진했다. 다큐멘터리 감독 이미영씨가 제작한 ‘사북 먼지를 묻다’를 가지고 각 지역 대학교, 사회단체를 찾아갔다. 또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부산에 찾아가 인권영화제에 출품해 사북사건의 진실을 알리는 노력을 펼쳤다.
‘사북사건’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은 뒤 이씨는 정부로부터 보상금 2300만 원을 받는데 만족해야 했다.
지난 6월 김부겸, 김경진, 김태년, 김경협, 원혜영, 이석현, 이해찬, 이재정, 한정애 의원 등 야당 국회의원 10여 명이 연명으로 이원갑씨 등 사북사건 피해자들에게 응분의 피해보상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서울고등법원에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법원은 2300만원의 보상금을 국가로부터 받았기에 더 이상의 보상을 해줄 수 없다고 판결했다.
이씨는 “사북사건 당시 젖먹이 막내를 비롯해 9남매 모두 속 썩이지 않고 잘 자라준 점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또 하나 같이 가정을 꾸리고 나름대로 행복하게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여덟이나 되는 딸들은 10만 원씩, 막내 아들은 20만 원 등 매월 100만 원씩 생활비를 지원받고 있다. 또한 기초연금으로 32만원 정도를 지원 받는다.
이 돈으로 공과금 납부하는 등 생활하고 있다. 사북사건이 뒤늦게 나마 폭도들의 난동이라는 누명을 벗은 점에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매년 4월 21일 사북사건 기념일을 잊지 않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