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4월에 발생한 ‘사북사건’은 36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무자비한 고문과 폭행의 후유증으로 고통받다가 요절한 이들의 사연이 잊혀지고 있다. 또한 억울하고 황당한 피해를 당하고도 명예회복과 보상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춥고 배고픈 시절, 몸뚱이 하나로 가족의 생계와 2세들의 교육을 위해 탄광에서 근무했던 당시 광부들은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며 관리자들에게 억압 받거나 무시 당하면서 살아야 했다.
때문에 근로기준법이나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 대부분 묵살되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면 주는 대로 받아야 광업소에서 해고 당하지 않고 광부로 살아 갈 수 있었다.
지난 1988년 2월 노동평론가 안재성씨가 출간한 ‘타오르는 광산’에는 사북광업소의 인권유린 행위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980년 광부들의 임금은 15만 5000원 으로 광산노련에서 집계한 최저생계비 24만 원의 64%에 불과했다. 그나마 저임금조차도 사북광업소는 생산량을 줄이는 이른바 ‘부비끼’(생산량 삭감)까지 이중으로 착취 당했다.
이러한 사실은 사북광업소 사무직이던 김종길(당시 42세)씨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노동부에 고발하면서 알려지게 됐다.
사북광업소 광부들은 소비과정에서도 3중으로 착취를 당했다. 지장산 사택단지의 경우 기업주의 친척이 운영하는 구판장이 유일한 점포였다. 말이 구판장이지 실제로는 시중의 물가보다 훨씬 비쌌다. 기업주측은 더욱이 구판장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외부에서 들어오는 행상차량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읍내로 나가는 시내버스의 개설을 방해하기도 했다.
당시 사북광업소는 국내 제1의 민영탄광이면서도 목욕탕조차 제대로 갖추지를 않아서 부녀자들은 밥하는 일만큼이나 목욕물 데우는 것이 중요한 일과중 하나였다.
특히 사북광업소는 이러한 악조건에 대한 광부들의 불만을 누르고 더욱 착취하기 위해 악랄한 정보원 조직까지 운영했다.
소위 ‘암행독찰대’라 불리는 이들은 1977년 기업주의 가까운 친척들로 알려진 5명의 방위과 직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특별한 근무시간이 없이 24시간 아무 때나 어느 곳이고 돌아다니며 광부들의 근무실태를 사찰하는 것이 임무였다. 이들에게 적발된 광부들은 징계를 받거나 모욕을 당하고, 심지어는 해고까지 당했다.>
당시 광부와 부녀자들은 ‘갑질’을 일삼아온 대다수 광업소 관리자들에 대해 억울해 하고 분개했지만 힘없는 자신들의 신세만 한탄해야 했다.
그러나 ‘사북사건’이 발발한 뒤 일부 광부들이 간부사택을 돌며 방화와 기물파괴를 한 것은 평소 관리자들에 대한 불만이 어느 정도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라는 지적이다.
사북광업소 새마을계장으로 근무한 박무선(당시 35세)씨는 전형적인 관리자로 알려졌다. 그는 ‘사북사건’이 발생하자 회사에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주모자를 카메라 앵글에 담는 작업을 했다. 시위 군중의 뒷 편에서 몰래 숨어 광부들의 움직임을 은밀하게 사진 촬영에 나섰다.
회사에 대한 공명심이 유달리 강했던 것으로 알려진 그는 다른 간부들은 광부들에게 붙잡히면 봉변을 당할까 두려워 모두 피신했는데 그는 경찰처럼 ‘사진채증’에 나섰다가 광부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광부들은 “야, 이놈이 새마을계장이다. 겁도 없이 우리를 밀고하려고 사진을 찍다가 붙잡혔다. 이런 놈은 그냥 두면 안 된다. 죽여 버리자!”라고 소리를 지르자 성난 광부들이 굶주린 야수처럼 달려 들었다.
광부들은 새마을계장에게 인정사정없이 각목을 휘두르거나 발길로 짓밟았다. 평소 관리자들에게 짓밟히고 억눌린 한을 푸는 것처럼 인정사정없이 분풀이 대상으로 삼았다. 흥분한 광부들에게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은 그는 피투성이가 된 채 축 늘어지고 말았다.
광부들은 박 계장이 죽은 것으로 판단하고 볏짚으로 만든 빈 쌀가마니로 박계장을 덮었다. 이어 동원보건원 영안실로 후송시켰는데 어떤 광부는 가마니에 덮힌 박계장을 보고 “잘 죽었다”며 어른 머리크기의 돌을 그에게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의 목숨은 때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끈질기다.
병원에 옮겨진 박계장을 영안실로 옮기기 전 응급실에서 의사가 사망진단서를 발급하기 위해 진찰을 하다가 맥박이 가늘게 뛰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곧장 응급처치를 했고 그는 지옥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사경을 헤매다 입원 1주일 만에 의식을 찾은 박 계장은 3개월 이상 병원생활을 하다가 퇴원해야 했다.
이어 박 계장은 폭행으로 망가진 몸을 치료하기 위해 보약을 지어 먹는 것은 물론, 심지어 골병 든 몸에 최고라는 말을 듣고 악취 나는 인분까지 구해 마셨다.
이렇게 악착스럽게 몸을 추스린 그는 다시 광업소에 출근했다.
얼마 후 새마을계장보다 벅찬 업무라 할 수 있는 산재계장으로 영전해 근무하게 됐다.
그러다가 1982년 11월 12일 그는 영월지방노동사무소에 산재환자 문제로 출장을 떠났다가 회사로 복귀하지 않으면서 행방불명이 됐다.
사북광업소측은 직원들을 동원해 광업소 주변과 역전 근처는 물론 증산역까지 샅샅이 뒤졌다. 오리무중인 산재계장을 찾기 위해 광업소는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가자 “함백산 골짜기에 죽은 시체로 변해 있다”는 점괘를 듣게된다.
그러자 광업소측은 무당의 말에 따라 직원들을 동원해 함백산 만항재 일대를 수색했지만 오리무중이었다. 그러다가 행방불명 5개월 가까이 지난 이듬해 4월 26일 나물을 뜯으러 갔던 주민에 의해 함백산 만항재 인근, 영월 상동방면 골짜기에서 박씨의 사체를 발견했다.
사체는 심하게 부패되어 있었지만 손목에 찬 시계와 바지, 지갑 등이 그대로 있어 신분확인이 가능했다. 경찰은 숨진 박씨가 산재계장을 맡고 있어 보상금이나 산재처리에 앙심을 품은 사람이 박씨를 유인, 살해한 것으로 추정하고 광범위한 수사를 펼쳤으나 용의자를 특정하지 못했다.
당시 경찰은 박씨가 실종된 1982년 11월 12일 영월지방노동사무소에서 일을 마친 뒤 황지 대밭촌(사창가)에 들렸던 것까지는 확인을 했다. 그러나 박씨가 어떻게 함백산까지 오르게 되었는지는 목격자가 없어 확인하기가 불가능했다.
결국 경찰은 몇 개월에 걸친 광범위한 탐문수사에도 불구하고 박씨 피살사건은 미제사건으로 남겨 놓고 말았다. 사북사건의 최대 피해자 가운데 한 명인 박무선씨의 말로는 이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사북사건’이 종료된 뒤 주모자 검거령이 내려지자 경찰과 합수부는 주모자 검거에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검거 과정에서 엉뚱한 사람이 주모자로 몰려 붙잡혀 갔다가 숱한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특히 700여 가구가 밀집한 지장산 사택단지에서 주모자를 검거하려고 한밤중에 출동한 경찰과 합수부 군인들은 주모자 사택을 확인할 때 동수만 확인하고 호수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 2차 주모자 검거과정에서 10여 명은 엉뚱한 사람이 붙잡혀 갔다.
이렇게 엉뚱하게 잘못 끌려간 광부들은 며칠 동안 고초를 겪다가 막상 무고한 사람으로 밝혀져 풀려나면 다행이지만, 아예 주모자로 몰려 수십일 동안 모진 고문과 폭행에 시달린 경우도 많았다.
사북광업소 삭도공으로 근무했던 신현일씨는 평소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할 줄 모르고 고지식할 정도로 착하고 성실한 광부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렇게 순진한 사람인데 재수가 없이 경찰 채증사진에 찍히면서 운명이 바뀌게 된다.
신씨는 사북사건 당시 시위대에 한 번도 끼인 일이 없었는데 이틀 만인 22일 시위대의 한 켠에서 구경하다가 그만 경찰관의 망원렌즈에 포착됐다.
사진채증반의 작업에서 주모자로 찍힌 신씨는 정선경찰서에 주모자로 연행되었다.
“나는 시위에 한 번도 참여한 일이 없었다. 그날은 동료들 옆에서 구경만 했는데 억울하다”
신씨의 하소연을 듣던 합수부 수사관은 “이 새끼가 웬 말이 이렇게 많아. 이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제대로 혼 좀 나봐라!”하며 다른 사람보다 심한 폭행이 이어졌다.
정선경찰서에서 18일 동안 모진 폭행과 고문을 당한 그는 원주 1군 헌병대로 이감돼 석방될 때까지 폭행 등으로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불법 구속 수감된 지 1개월여 만에 사회에 나가 계엄군과 경찰에게 당한 고문과 폭행사실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석방됐다.
석방된 그는 그러나 무자비한 폭행과 고문을 당해 간단한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불구가 되었다. 그는 석방된 지 2년도 안 된 1982년 5월 초 45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모범 공무원도 경찰에 ‘찍히는’ 바람에 면직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당시 사북읍 부읍장을 했던 김원대씨(북평면 번영회장 역임)에게 정선경찰서 수사과장이 협조를 요청했다.
“사북사건 주모자 검거령이 떨어졌는데 경찰은 부읍장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주모자 검거에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한다”
그러나 매사가 합리적이며 철두철미한 김원대 부읍장은 경찰의 협조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데모 주동자 검거야 경찰에서 할 일이지. 우리 읍사무소 공무원이 할 일이 아니다. 협조해 줄 수 없다”
그러나 수사과장은 “당신! 공무원 그만두고 싶어 말 함부로 한다”며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주모자 검거에 도와 달라”고 말했다.
그는 “나는 협조해 줄 수 없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반발했다.
김원대 부읍장은 당시 정선군에서 모범 공무원으로 소문난 사람이고 특히 사북사건 당시 광부들에게 큰 곤욕을 치른 노조지부장 부인 김순이씨를 탈출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김성배 도지사가 표창까지 했던 사람이다.
경찰은 김씨가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부읍장 근무 100일 만에 강제로 옷을 벗게 만들었다. 그는 결국 노태우 정부가 들어선 1989년 복직과 함께 명예회복이 되었다. 이후 그는 1995년 4월 북평면장을 마지막으로 공무원에서 정년퇴직했다.
경찰관들도 ‘사북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일이 많았다.
당시 장성경찰서(1981년 7월 1일 태백경찰서로 명칭 변경) 홍응수 총경은 사북광업소 객실에서 ‘사북사건’의 현장을 파악하고 지휘하기 위해 광업소 간부들과 자리를 하고 있었다.
원래 사북광업소 관할지역은 정선경찰서가 맡고 있었지만 당시 정선경찰서장은 암으로 투병중이라 강원도경 국장의 지시에 따라 인근 경찰서장인 홍응수 장성경찰서장이 지휘책임을 맡은 것이다.
1980년 4월 21일 오후 사북광업소 노조지부장 이재기를 찾던 성난 시위대는 광업소 객실에 경찰서장이 회의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100여 명의 광부들이 몰려갔다.
이들은 전투복을 입고 있던 홍응수 장성경찰서장을 집단 폭행하면서 “이재기를 찾아내라”고 소리쳤다.
당시 홍응수 총경은 전투복 계급장이 모두 뜯겨져 나가고 권총까지 분실했는데 갈비뼈 3대가 부러지고 온 몸에심한 부상을 당했다.
그는 사건 종결 후 3년간 치료를 받다가 그 후유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4월 22일 사북광업소 진압작전에 투입됐던 홍범 순경은 ‘안경다리 전투’에서 광부들에게 붙잡혀 몰매를 맞고 고생하다가 3년 후 자살하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사북사건 때문에 홍응수 총경은 3년 뒤 폭행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홍범 순경도 폭행 후유증으로 자살했는데 모두 성씨(홍씨)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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