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누군가 "민주주의라는 것에 대해 언제, 어떻게 처음 접하게 되었나?"고 묻는다면. 아마 나는 "대학에 입학해서 '학습'을 하고, 데모를 나가면서부터"라고 답할 듯 하다. 재수를 한 92학번, 1972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45세. '주입식 입시 교육'의 총체인 학력고사를 거의 마지막으로 보았고, 이제는 사라진 특수한(?) 군인, '방위' 생활도 사실상 마지막으로 했다.
1991년 '5월 투쟁'을 직접 참여하지 못했지만 입학하자마자 그것의 1주년을 기념하는 각종 집회에 다녔어야 했고, 1992년 대선에선 '민중 후보 백기완' 선거운동원으로 골목을 누볐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민주주의에 대해 깊게 고민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저 교과서에 나오는 정치 제도의 하나였을 뿐. 대학에 들어와 집회와 시위, 각종 학습 모임과 뒷풀이에 참여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해 들었고, 말했고, 노래로 불렀다. 하지만 그것의 '실체'를 제대로 경험하진 못했다. 여전히 '어딘가'에 있고, '언젠가'는 경험할, 하지만 아직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였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후 밤 12시 이후 술집 영업 금지가 풀렸다. 경찰 단속 때문에 문 걸어 잠그고 밤새 술 마시고, 담배 연기 가득한 공간에서 '사투'를 어쩔 수 없이 새벽까지 벌이던 일상에 변화가 생겼다. 시간과 공간에 자유가 부여되었다. 1992년 대선 결과는 실패였고, 패배였지만, 새벽 늦게 술 먹고 노래 부르면서 자취방 들어갈 때 "이런 게 민주주의"라며 친구와 낄낄대곤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대중문화 전체를 강타하고, '신세대'니 'X세대'니, 이른바 '신인류의 등장'에 호들갑을 떨었던 시기였다. 하지만 민주주의와의 첫 만남은 그다지 강렬하지도, 구체적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2016년 초겨울, 나는 주말 밤마다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듣고, 말하고, 노래 부르고 있다. 낮이 밤이 되고, 달리기가 걷기가 되었다. '친구'와 '동지'가 아니라 '연인'과 '가족'이 곁에 있다. 최루탄도, 물대포는 없지만, 화염병이 아니라 촛불이지만 더욱더 강렬하고, 간절하다. 그리고 "이런 게 민주주의"라고 내 아이에게 말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 불리는 이 초유의 사건(아니 사태)에 국민들은 분노와 좌절, 참담함과 부끄러움을 토로한다. '설마'했던 모든 것들, '상상'했던 많은 것들이 실제였고, 현실이었다. 입에 담기조차 힘든 일들이 갖가지 매체를 통해 무한공급되고 있다. 이제 어떤 뉴스를 접해도 그 다음, 그 이상을 기대할 정도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이미 숫자로서의 의미를 잃었다. 지역과 연령의 차이도 없다. 외환 위기 직후 국민들은 집안에 있던 금붙이들을 '국난 극복'을 위해 앞 다투어 내놓았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국민들은 또 다시 '국난 극복'에 앞장서고 있다. 그 동안 숨겨 뒀던 '연설 실력'과 '노래 실력'이 연일 방출되고 있다. 패러디와 풍자 능력은 개그맨들의 생계를 위협할 정도다. 주말마다 도심은 축제와 시위가 구분키 어렵게 된 지 오래다. 박근혜 대통령이 내세웠던 '국민 대통합'과 '창조 경제', '문화 융성'이 이제야, 이렇게 결실을 맺고 있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우리 아이들'이다.
주말 촛불 집회가 열릴 때마다 전국 각지에서 뛰어난 연설 실력과 촌철살인의 한 마디로 어른들을 웃게, 울게, 부끄럽게, 기쁘게 만드는 아이들이 등장한다. 친구뿐만 아니라 가족과 함께 나오는 아이들도 많다. 추운 겨울 날씨에도 유모차를 끌고 나오는 젊은 부모들도 꽤나 있지만, 초등학생이나 중고등학생 자녀들과 함께 참여한 부모들이 확실히 많아 보인다. "아이들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체험해 봤으면 하는 마음에 함께 나왔다", "아이들에게 부끄러운 나라를 물려줄 수는 없어서 촛불 시위에 처음 나왔다", "박근혜, 최순실 같은 이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 가족들이 같이 나왔다"는 얘기가 곳곳에서 들린다.
이들 중에는 2008년 광우병 촛불 집회 때 유모차에 타고 있었던, 아니면 엄마아빠 손에 이끌려 영문도 모른 채 따라 나왔던 초등학생이었던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우리 아이도 그랬다). 그 아이들이 어느새 자라 '민주주의'에 대해 어른들과 함께 얘기하고 있다. 우리 아이들은 나보다 훨씬 일찍, 훨씬 강렬하게 '민주주의와의 첫 만남'을 경험하고 있다. 아이들은 그저 듣는 게 아니라, 스스로 "이런 게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행했다. 우리가 그들에게 배울 정도다.
가장 치열한 정치 세대라 불리는 이른바 '386 세대'조차 이렇게 일찍 민주주의를 만나지는 못했다. '일상의 민주주의'에 대한 체험이나 실천은 오히려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다. 가장 개방적이고, 풍요로운 세대라 불렸던 'X세대'의 만남조차 실은 초라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겪어야 했던 외환 위기와 '신자유주의' 체제의 광풍은 '정권 교체', '민주 정부'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비민주적 일상생활', '반민주적 시장 질서'로 우리를 내몰았다. 민주주의는 다시 교과서에나 있고, 국회의사당에나 있고, 대학 시절 기억 속에서나 있는 것이 되어 버렸다. '몽매(夢寐)'함과 '몽롱(朦朧)'함은 비단 박근혜 대통령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 때 촛불이 타올랐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효순이와 미선이를 추모하며,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를 외치며, 2008년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며, 2014년 세월호 참사에 슬퍼하고 분노하며, 그리고 2016년 겨울 '박근혜 퇴진'을 외치며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모였다.
시민들에게 촛불은 각성(覺醒)이고 반성(反省)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잠이 보약"인 사람은 촛불을 좋아할 수가 없다. 꺼릴 수밖에 없다. 추운 날씨와 차가운 바람, 온갖 꼼수와 갖가지 질척거림으로 꺼지기만 바란다, 아니 노린다. 하지만 이들은 모른다. 민주주의에 대한 빠른 선행 학습과 충분한 체험 학습으로 단련된 아이들의 힘을. 그런 아이들의 '물음'에 답해야 하는 부모들의 난감함과 책임감을. 아이들만 아니다. 11월 28일 일요일 성주에서 무려 138차 사드 반대 촛불 집회가 열렸다. "성주가 안 되면 딴 데도 안 된다. 김천, 칠곡 얘기될 때 우리 일 아이라고 가마이 있었던 게 잘못인기라"며 성주의 할매들은 매일 촛불을 들고 있다. 군청 앞마당에서 밀려 났지만 굴하지 않고 촛불을 들고, 구호를 외친다. 그러면서 밀양 할매들을 만났고, 세월호 가족들을 만났고, 미군 기지 반대 운동을 하는 일본 시민들을 만났다. 성주 할매들의 '민주주의와 첫 만남'은 많이 늦었지만 더없이 강렬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민주주의가 평생학습임을 깨닫게 해 준다.
11월 26일 토요일 밤 광화문 광장 한 켠에서는 박원순 서울시장, 박주민 의원, 김태동 교수의 시국 연설 행사가 있었다. 연사들은 '박근혜 퇴진 이후' 만들어야 할 '새로운 대한민국'에 대한 고민과 지혜를 함께 나누고자 했다. 다음으로 대전에서 올라온 청년이 나섰다. 그는 수백 만 개의 촛불이 한번 씩 모이는 주말 광장만이 아니라 각자 집 앞과 동네 곳곳에 날마다 열리는 '더 많은 마당'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청와대와 국회, 헌법재판소만 바라보며 '그들의 결정'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결정'과 '일상의 실천'으로 민주주의를 완성하자는 취지였다.
그렇게 된다면 '민주주의와의 첫 만남'은 교과서에서 거리로, 거리에서 광장으로, 다시 마당과 밥상에서 이뤄진다. 그리고 몇 년에 한번 주인 노릇하는 민주주의를 넘어, 주말에 한번 주권자임을 외치는 민주주의를 다시 넘어, 매일 스스로 '민주주의자'임을 실천하게 된다. 어렵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과 성주 할매들, 대전 청년은 이미 하고 있다. 우리, 아니 내가 아직 않고 있을 뿐. 대통령 퇴진은 내 손의 촛불을 끄는 이유가 아니라 우리 집의 촛불을 새로 켜는 계기가 될 것이다. 민주주의와의 '첫 만남'만큼, 아니 그보다 더욱 멋진 '오랜 만남'을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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