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이뤄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 다시 논란거리다. 삼성물산 주주들이 손해 보는 합병이었는데, 국민연금이 손해를 무릅쓰고 찬성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순실 씨가 박근혜 정부를 조종해서 국민연금을 움직였다는 말이 나온다. 최 씨가 삼성으로부터 돈을 받은 대가라는 것.
삼성·국민연금·최순실의 적극적인 해명, 왜?
흥미로운 건, 삼성의 대응이다. 삼성은 앞서 제기된 미르·K스포츠 재단 출연금 문제 등에 대해선 소극적으로 대응했었다. 반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관련 논란에 대해선 적극적인 해명을 하고 있다. 삼성물산은 삼성그룹의 지주회사 격이다. 지난해 합병은 이재용 체제 삼성 지배 구조의 틀을 짜는 과정이었다. 따라서 삼성 입장에선 민감한 문제다.
국민연금, 그리고 최순실 씨 측 역시 발 빠른 대응에 나섰다. 국민연금은 최근 장문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최 씨 측 변호인인 이경재 변호사 역시 24일 최 씨가 삼성과 국민연금공단의 관계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밝혔다. 지난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그리고 국민연금과 최 씨의 역할을 둘러싸고 불거진 의혹에 대해 전면 부인한 것이다. 삼성과 국민연금 역시 비슷한 입장이다.
삼성이 최순실 씨에게 돈을 준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최 씨를 통해 총수의 민원을 해결했다는 점까지 드러나면, 뇌물죄 적용을 피하기 어렵다. 관계자들 입장에선 적극적인 방어를 해야만 한다. 하지만 해명 논리는 여전히 옹색하다.
시장은 합병을 찬성했다, 과연?
그들의 해명을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지난해 합병 당시 증권사 22곳 가운데 21곳이 찬성 입장을 내놨었다. 시장의 눈으로 볼 때, 합병 찬성은 이상한 결정이 아니었다.
둘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홍완선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을 따로 만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경영자가 대주주를 만나 설득하는 건 합법적인 경영 활동이다.
셋째, 이재용 부회장이 박근혜 대통령과 독대한 일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결정 이후였다.
넷째,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비율이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불리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제일모직 계열로 돼 있는 생명공학(바이오) 사업의 전망을 고려하면, 손해가 아니다.
다섯째, 합병이 민감한 사안임에도, 국민연금은 의결권 행사 전문위원회에 회부하지 않고 자체 투자위원회에서 결정했다. 그 때문에 비판 목소리가 있다. 하지만 전문위원회 회부가 의무 사항은 아니다.
"삼성물산 주가 일부러 떨어뜨렸다"
이런 해명은 과연 설득력이 있나. 대부분 근거가 약한 것들이다.
첫째,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대해 다수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이 찬성 보고서를 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삼성이 자본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당시 유일하게 반대 보고서를 낸 곳이 한화투자증권이었다. 당시 이 회사 사장이었던 주진형 씨는 24일자 <한겨레> 인터뷰에서 한화그룹 경영기획실의 외압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일가가 가깝다"라는 이유로 합병에 찬성하라는 압력이 있었다는 게다. 주진형 전 사장은 이에 굴하지 않고 합병에 비판적인 보고서를 냈고, 그 결과 사장 직에서 물러나라는 요구를 받았다는 게다.
주 전 사장은 <한겨레> 인터뷰에서 다른 증권사들이 합병에 찬성한 배경에 대해 "금융사들로서는 삼성이 최대 고객이다. 삼성이 운용하는 자금 규모가 대단히 크다. 또 삼성이 전방위 로비를 했다"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삼성이 이재용 부회장 일가의 지분이 많은 제일모직에 유리하게 합병을 성사시키기 위해 무리수를 많이 뒀다. 삼성물산의 실적을 일부러 나쁘게 해서 주가를 떨어뜨렸다. 당시 다른 건설사들의 주가는 연초 이후 평균 30% 정도 올랐는데, 유독 삼성물산만 10% 내렸다. 반면 이재용 부회장 일가의 지분이 40%가 넘는 제일모직은 어떤 식으로든 합병을 유리하게 추진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주가가 실제 가치보다 훨씬 높았다. 그런 상황에서 삼성물산 이사회가 제일모직과의 합병을 승인한 것은 최악의 행위다. 한화증권을 제외한 다른 증권사들이 모두 합병에 찬성하는 보고서를 낸 것은 너무 부끄러운 일이다. 외국인들이 한국 금융시장을 어떻게 보았겠나."
주 전 사장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또 고려할 대목이 있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 ISS(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 등 의결권 자문기관들은 증권사에 비해 중립적인 입장이다. 삼성과 이해관계가 덜 겹치는 탓이다. 이들 자문기관들은 한결같이 합병에 반대했었다. 중립적인 전문가들은 합병에 반대하는 의견이 우세했다.
합병 성공의 진짜 이유, 이재용이 몰랐을까
둘째, 이재용 부회장이 홍완선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을 따로 만나서 합병에 찬성하도록 설득했다. 합법적인 설득과 불법 로비 가운데 어느 쪽이었을까. 이 대목은 검찰 수사를 통해 밝혀내야 한다.
셋째, 이 부회장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결정이 이뤄진 뒤에 박 대통령과 독대했다. 이런 사실이 삼성이 합병 성사를 위해 박근혜 정부에 로비를 하지 않았다는 근거는 될 수 없다. 이 부회장이 합병 관련 구체적인 사안을 놓고 대통령에게 직접 로비를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합병 관련 로비가 있었다면, 삼성과 정부의 실무자 선에서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 합병 이후 이 부회장과 대통령이 만난 자리에선 감사 인사와 함께 다른 거래가 있었다고 보는 게 상식적이다.
만약 합병 관련 로비가 실무자 선에서 진행됐으므로, 이 부회장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봐야 하나. 이 부회장은 최근 검찰에 출석해서 관련 내용을 모른다고 했다고 한다.
지난해 합병의 최대 수혜자가 이 부회장이었다. 이런 사안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면,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 거짓말이 아니라면, 그 역시 심각한 문제다. 삼성그룹의 최대 현안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총수라면, 경영자 자격이 없다.
삼성의 전망을 근거로 결정한 국민연금
넷째, 제일모직의 바이오 사업 전망은 지난해 합병을 앞둔 시점에서 어떤 평가를 받았나. 그 결과에 따라, 국민연금의 결정이 얼마나 합리적이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문제는 당시 국민연금이 제일모직의 바이오 사업의 전망에 대해 독립적인 판단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삼성의 입장을 그대로 따랐다. 이에 대해 경제개혁연대는 24일 논평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당시 국민연금은, 합병 비율이 삼성물산에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바이오 부문의 미래가치 등 합병의 시너지 효과가 크기 때문에 합병에 찬성하는 것이 이득이라는 입장을 취했는데, 이 바이오 부문의 미래가치 평가는 삼성이 제시한 낙관적인 전망에만 기초한 것으로 그 근거가 매우 부족했다.
예컨대, 제일모직은 2014년 말 상장(IPO) 당시에는 바이오 부문의 사업에 대해 위험이 많아 자금 조달을 확신하기도 어렵다고 기재하였으나, 불과 6개월 후인 삼성물산과의 합병 당시에는 그 가치를 크게 과장하는 등 오락가락하는 행보를 보였음에도, 국민연금은 이 부분에 대해 면밀한 검토를 하지 않았다.
이는 합병의 시너지 효과에 대해 '충분한 정보에 기초하여 신중하게 판단'해야 하는 수탁자의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
SK 합병 안건은 전문위원회 회부, 삼성에 대해선 왜?
다섯째, 국민연금은 지난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안건에 대해 논의하면서 의결권 행사 전문위원회를 열지 않았다. 투자위원회 자체 결정으로 처리했는데, 투자위원회 위원들은 사실상 홍완선 기금운용본부장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외부 전문가가 참가하는 전문위원회와 달리, 독립성이 약하다. 국민연금이 민감한 사안에 대해선 의결권 행사 전문위원회를 열도록 한 내부 규정을 둔 것은 그래서다. 국민연금은 해당 규정이 전문위원회를 반드시 열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설득력은 약한 주장이다.
국민연금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안건보다 2주일 전에 논의됐던 SK그룹 계열사 합병 건에 대해선 의결권 행사 전문위원회를 열었었다. SK 합병보다 훨씬 규모가 큰 사안인 삼성 합병 건에 대해 전문위원회를 열지 않은 까닭은 설명하기 어렵다.
아울러 합병 찬성 결정을 내린 투자위원회의 판단 근거가 이상하다는 주장도 있다. 경제개혁연대는 "국민연금은 합병 찬성 여부를 재무적 관점에서만 판단"한 점이 잘못이라고 했다. 누가 봐도, 당시 합병 사안은 삼성그룹 지배구조 문제였다. 이 부회장이 삼성전자에 대한 장악력을 키우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경영권 승계의 핵심 과제였던 것.
따라서 합병 관련 의사 결정은 보다 폭넓은 고려 속에서 이뤄져야 했다. 그런데 최근 언론과 정치권에 공개된 투자위원회의 회의록을 보면, 당시 국민연금은 오로지 재무적 관점에 따라서만 판단했다. 경제개혁연대는 "만일 삼성물산 합병 건이 투자위원회가 아닌 전문위원회에서 논의됐더라면 좀 더 다양한 관점에서 합병 문제를 다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재무적 관점'에 비춰봐도 불합리
국민의 노후 자금을 관리하는 국민연금이 '재무적 관점'을 따른 게 왜 잘못이냐는 반론도 있다. 그렇다면, 국민연금은 '재무적 관점'에 충실하기라도 했나.
그 역시 아니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합병 당시 삼성물산의 대주주였다. 삼성물산이 손해 보는 합병에 찬성한 대가로, 큰 손해를 입었다. 손해 규모는 산정 시기를 어느 때로 잡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대개 수천억 원대 손해를 봤다고 한다. 하지만 특정 시기 주가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이익이 나기도 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설령 이익을 봤다고 해도, 만약 국민연금이 다른 결정을 했다면 더 큰 이익을 볼 수 있었다는 게 일반적인 판단이다. 기회비용 측면에선 확실히 손해였다.
재무적 관점에선 손해지만, 길게 보면 이익이라는 반론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국민연금 투자위원회 회의록을 보면, 논의는 재무적 관점에서만 진행됐다. 장기적인 이익을 고려한 흔적이 없다. 요컨대 국민연금은 거시적인 고려에도, 단기 이익에도, 모두 충실하지 않았다. 국민의 노후 자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은, 어떤 식으로도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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