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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사건’ 비하인드 스토리

[홍춘봉의 광부아리랑] ⑭‘광부영웅’의 뒤바뀐 운명

1980년 4월 21일 강원도 정선군 사북광업소에서 발생한 ‘사북사건’은 무고한 광부와 부녀자들을 난동사건의 주모자로 몰아 ‘아비규환’의 참혹함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당시 ‘합수부’라는 무소불위의 공권력은 고문과 폭행을 자행한 수사관 책임자들에게 표창과 포상을 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결정문에 따르면 ‘사북사건’ 주모자들을 군 검찰에 넘기고 재판을 진행하던 1980년 7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과 겸 계엄사합동수사본부장은 사북사건 합동수사단 간부들을 표창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1981년 3월 장성광업소를 방문해 광부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대한석탄공사

계엄사합동수사본부장 표창을 받은 사북사건 합동수사단 간부는 부단장 김익상(당시 춘천지검 원주지청 검사), 1001보안부대 중령 박기학, 중사 박정환, 강원도경 경감 백모씨 등이었다.

이후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전두환 대통령은 1980년 10월 3일 사북광업소 노사체육대회를 개최토록 하고 극비리에 사북광업소를 방문해 지하 막장에 입갱하고 광부들을 격려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또 전두환 대통령이 방문한 뒤 곧장 지장산 사택단지 진입로를 포장하고 사북광업소에 목욕탕 신축을 지원하는 등 ‘깜짝’ 복지혜택도 제공했다.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보기에는 심각한 고통과 상처를 당한 ‘사북’을 달래기에는 많이 미흡한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따라 청와대는 ‘광부영웅’을 만들어 ‘사북사건’으로 위축된 광부들을 달래줄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당시 사북광업소 선산부로 근무하는 이호구씨는 광업소에서 저축을 가장 많이 하면서 누구보다 성실한 광부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원래 원주지역에서 주먹을 날리던 이씨는 주먹세계를 청산하고 소아미비를 앓고 있는 부인을 얻어 결혼했는데 어느 날 절친한 친구에게 전 재산과 빚까지 얻어 빌려준 당시로서는 거액의 돈을 떼이게 된다.

주먹을 날리던 시절에 의리를 중시했던 그는 절친한 친구에게 전 재산을 떼이고 배신을 당한 것에 복수를 결심했다.

수소문 끝에 자신을 배신한 친구가 삼척시 황지읍에 산다는 것을 알게 되자 1976년 늦여름 황지땅을 밟았는데 며칠 동안 친구를 찾지 못하고 헤매다 자살하기로 마음 먹었다.

친구를 죽이기 위해 준비한 과도를 들고 자살하려던 이씨는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광부들의 모습을 보고 자살하려던 마음을 돌리게 된다.

당시 퇴근하는 광부들은 목욕탕을 갖추지 못한 소규모 탄광에 근무한 탓에 씻지도 못하고 아프리카 검둥이처럼 시커먼 얼굴과 탄과 땀에 젖은 검정색 작업복을 입고 어깨는 도시락과 채탄용 톱도끼를 둘러맨 모습이었다.

더구나 그런 몰골의 광부들은 흰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으며 걷는 것이 아닌가.

“저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내가 이 나이에 자살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랑하는 처자식을 놔두고 그까짓 돈 때문에 자살하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구나. 나도 탄광에서 저 사람들처럼 땀 흘려 처자식 부양을 하며 행복하게 살아야지.”

1976년 자신을 배신한 친구를 죽이고 자신도 죽겠다며 탄광촌 황지에 왔다가 친구는 못 찾고 대신 황지의 조그마한 탄광에 입사하게 된 이호구씨는 이런 인연으로 광부가 되었다.

황지에서 탄광생활을 하던 이씨는 사글세 방 얻을 돈조차 없어 낡은 군용천막을 얻어 산기슭에 천막을 치고 광부생활을 했다. 그는 군용천막에서 혼자 잠을 자고 밥도 끓여 먹으며 1년을 버텼다.

이후 그는 돈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소규모 탄광(조광)을 때려치우고 아연을 채굴하는 인근의 경북 봉화군 석포면 연화광업소로 옮겨 광부생활을 했지만 탄광보다 안전하고 깨끗한 것은 좋았지만 급여가 너무 적어 생활이 어려웠다.

그는 “기왕 광부생활을 할 바에는 고생이 되더라도 돈벌이가 나은 탄광에 가서 일하자”고 생각하고 1977년 국내 최대 민영탄광인 사북광업소에 입사했다.

사택을 얻은 이씨는 원주에서 처자식을 데려다가 이를 악물고 돈을 벌기로 했다.

이때부터 그는 좋아하는 술도 끊고 생활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저축을 하면서 오직 돈을 모으기에만 관심을 두고 살았다.

이씨는 “광산 생활 3년간 많은 것을 배웠다. 사북광업소에 입사해 사택을 얻은 뒤에는 동료들이 막걸리를 마시러 가자해도 이를 뿌리치고 집에 와서 냉수로 막걸리를 대신했다. 용돈도 단 한 푼도 사용하지 않고 악착같이 막장과 집을 오가며 버는 돈은 몽땅 저축했다.”고 말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던 이씨는 사북광업소에 입사한지 1년이 조금 지나 선산부로 진급했고 월급도 늘어났다.

1980년 4월 전국을 뒤흔든 ‘사북사건’이 발생했지만 그는 다행스럽게 주모자에 속하지 않아 경찰에 끌려가지도 않았는데 그는 자신도 모르게 사북사건의 확산을 막은 모범광부로 추대된다.

사북사건 이듬해 사북광업소에 직장새마을금고가 만들어졌고 그는 은행대신 새마을금고에 광업소에서 받은 월급 대부분을 적금 들었고 사북광업소 최초로 1000만원의 적금을 탄 광부가 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만기가 된 적금을 정기예금에 넣고 계속 새로운 정기적금을 붙고 하면서 저축액이 눈덩이처럼 불면서 1983년 12월 사북광업소 ‘저축왕’이 되었다. 또 이 소식을 들은 청와대는 이씨를 초청해 광부 최초로 동탑산업훈장을 수여했다.

이씨를 청와대로 초청한 전두환 대통령은 “당신은 모든 광부들의 모범이니 더욱 열심히 살아 달라”며 “당신은 자랑스러운 광부들의 영웅”이라고 칭찬했다.

또 전두환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이호구씨가 잘 될 수 있도록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달라”고 지시했다.

이어 1985년 9월 당시 MBC문화방송은 이호구씨의 일대기를 인간승리 드라마로 만들어 장장 2시간여에 걸쳐 방영했다.

광부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는 국내 방송사상 유례가 없는 전무후무한 일로 이씨의 인간승리 드라마가 방영되자 시청자들에게 뜨거운 눈물을 적시게 만들었고 탄광촌에서는 ‘광부영웅’이 탄생했다.

이 일은 당시 청와대가 사북이라는 지명에 대해 얼마나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특별한 사건으로 남아있다. 사북은 ‘민심이반’의 진원지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가 전두환 대통령의 사북광업소 극비 방문(1980.10.3.)과 ‘광부영웅’만들기 였다.

한편 ‘광부 저축왕’으로 동탑산업훈장을 수여받고 광업소로부터 평범한 선산부에서 하루아침에 ‘직원’으로 특진한 그는 청와대의 특별한 관심과 언론의 지원에 힘입어 광업소 직업훈련소(신입 광부 훈련소)교관으로 근무했다.

그의 급여는 광업소 과장급보다 더 많도록 특별호봉까지 부여 받았다. 사북광업소에서 광부출신이 직원으로 진급하고 훈련소 교관까지 된 것은 이씨가 유일했다.

당시 광업소 동료와 간부직원들은 “이호구씨는 청와대의 각별한 관심에 의해 특진은 물론 간부직원보다 많은 월급을 받도록 특별호봉까지 받는다”고 말했다.

인근승리의 주인공으로 드라마에 방영되고 나서도 이씨의 생활은 여전히 알뜰하고 검소했다.

당시 인터뷰에 나선 이씨는 “내 인생은 친구에 의해 180도 바뀌었다. 나의 전 재산에다가 빚까지 얻어 돈을 빌려 줬는데 사기를 당한 것이 아닌가. 그때 나는 친구를 죽이고 나도 인생을 팽개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나 탄광촌 황지에서 탄가루에 범벅된 광부들의 얼굴을 보면서 마음이 바뀌었다.

저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처자식을 놔두고 혼자 죽는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면서 가슴에 품고 있던 과도를 버렸다. 그러나 처음 광부생활을 할 때는 참으로 막막했다. 돈을 한 푼도 없지 처자식은 빚더미에 담보처럼 붙잡혀 원주에 있으니 힘들고 위험한 막장생활도 적응이 안 돼 무척 고생을 했다.

사북광업소에서 빚을 모두 갚고 처자식을 데려온 뒤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았다. 이때부터 매월 받는 월급 모두를 적금에 넣고 3개월에 한 번 나오는 상여금으로 생활했다. 한 눈 팔거나 술 한잔 마실 여유가 있을 수 없었다.”

이렇게 열심히 악착같이 광업소에서 근무한 이씨는 지난 1994년 3월 사북광업소를 정년 퇴직했다. 당시 그는 적금으로 모은 돈이 1억 원에 달했고 퇴직금 5000만 원을 합쳐 사북광업소에서 1억5000만 원의 거금을 손에 쥐게 되었다.

광부생활 17년 만에 적금으로 1억 원을 모은 것도 광부로서는 이호구씨가 최초였다. 대학을 졸업한 아들 둘이 터를 잡고 사는 강릉으로 터전을 옮긴 이씨는 집에서 놀기가 답답하다며 종이공장에 다니다가 너무 무리를 하는 바람에 과로로 쓰러져 투병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주변을 안타깝게 했다.

▲사북사건 당시 사북광업소 무기고를 지킨 박노연씨가 사면복권 관련 자료를 보여주고 있다. ⓒ프레시안(홍춘봉)

월남전에 백마부대원으로 참전했던 박노연씨는 사북광업소 선산부로 근무하다가 ‘사북사건’을 몸소 체험했던 인물이다.

당시 사북광업소는 4000명이 넘는 광부가 근무했기에 예비군 연대가 편성된 가운데 칼빈 소총 890정, 엠1 소총 472정을 비롯해 실탄 10만 발이 무기고에 보관돼 있었다.

또 사북광업소 굴진과 채탄을 위해 화약창고에는 다이너마이트 60여 톤이 보관된 상태였다. 1979년 11월 11일 발생했던 이리역 폭발사고당시 화차에 실렸던 다이너마이트는 30톤 규모였다.

월남전에 3년 간 참전한 실전경험을 가진 박씨는 사북사건이 발생하자 이원갑씨 등과 협의를 거쳐 무기고와 화약고를 지키는 책임을 맡고 동료들 10여 명과 22일부터 사건 종료일인 24일 오전까지 현장을 지켰다.

그리고 박씨의 이러한 사실이 1980년 4월 26일 동아일보 사회면에 게재되어 ‘사북사건’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던 1등 공신으로 소개되었다.
다음은 <동아일보>가 1980년 4월 27일자로 보도한 박노연씨의 기사.

<동료에 뭇대 맞으며 무기고 사수-난동 속 사태악화 막은 박노연씨-
연 4일째 계속된 광부들의 난동속에서도 무기고와 탄약고를 사수, 사태악화에 결정적인 쐐기를 박은 광부는 역적의 용사 박노연(33. 710갱 선산부)씨였다.

박씨는 흥분한 광부들이 출동한 경찰들과 맞부딪쳐 돌팔매와 몽둥이질로 350여 명 경찰들을 격파(?)하던 22일 오전 10시께 광업소 본관 뒤 무기고와 탄약고로 달려갔다. 이미 피흘린 광부들이 흥분하며 무기고를 뜯고 총을 탈취할 것을 염려한 것.
박씨가 무기고에 도착했을 땐 경비를 맡고 있던 청원경찰이 혼비백산, 차를 타고 도망친 뒤였고 예비군 간부들도 누구 하나 무기고를 지키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부터 동료 김을수(46)씨 등 5명과 함께 무기고를 지키며 3박4일동안 밤을 새우며 꼬박 무기고를 지켰다.
박씨가 가장 힘들었던 시간은 23일 밤 8시께.
“경찰이 포위망을 압출해 들어오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술에 만취, 이성을 잃은 동료광부 50여 명이 “무기고를 뜯고 우리도 무장하자”며 달려왔다.
무기고 입구에서 이들과 마주한 박씨는 “우리가 김일성이와 동조자는 아니다. 경찰과 총부리를 맞대면 공산당과 무엇이 다르냐”며 철조망에 매달린 광부들을 떠밀며 소리 쳤다.
그러나 광부들은 “너는 광부가 아니냐. 경찰과 광업소를 비호하고 나서냐”며 몽둥이질을 하고 닥치는대로 뭇매를 때렸다. 피투성이가 된 박씨는 다시 일어나 눈물을 흘리며 “만약 총을 꺼내 들고 나서면 사태가 수습된 뒤에도 우리는 모두 살길이 없을 것이다. 살려고 발버둥치는데 깊이 생각해 보라”고 하소연했다.
그러자 광부들은 “화사에 잘 보이려면 너 혼자 무기고를 지켜라”는 등 폭언을 계속했다. 그러나 박씨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무기고에서 지키기로 했다.
그는 “지금 생각해도 무기고를 버리고 달아나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고 목숨을 걸고 무기고를 지킨 당시를 회고했다.>

이처럼 언론에서는 사북사건 유혈사태를 막은 일등공신으로 소개됐지만 계엄사 합수부는 박씨를 ‘사북사건’ 주모자 가운데 한 명으로 판단하고 정선경찰서에 연행했다.

박노연씨는 “나는 사북사건 당시 소총과 실탄이 보관된 무기고를 동료들과 함께 밤낮으로 지킨 사람이다. 당시 동료 15명 가량이 동참했고 밤에는 한기를 덜기 위해 장작불을 피우고 외부인들의 접근을 막았다.

평소 안면이 없던 사람들이 찾아와 무기 탈취를 위해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부 광업소 동료들은 술 냄새를 풍기며 ‘총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며 무기고를 점거하는 일도 있었다.

당연히 몸싸움 과정에서 주먹이 오가고 험한 욕설이 터저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사북광업소 쟁의부장이 경찰에게 사북사건 당시 폭력을 행사했다고 밀고했다. 또 사북광업소 사택 부녀회장인 전모씨가 사북광업소노동조합 광장에 집결하라는 방송을 했다는 허위 진술을 하는 바람에 주모자로 검거되고 말았다.

나중에 그 부녀회장은 울면서 경찰의 고문에 못 이겨 박노연씨를 주모자로 허위 진술하고 말았다고 용서를 구했다. 그 때문에 3개월 이상 정선경찰서와 원주 1군 헌병대에 잡혀가 억울하게 고문과 폭행을 당했다. 또 사북사건 주모자로 몰려 군사재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고 말했다.

박노연씨는 보통군법회의 재판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그해 8월 6일 동료들과 함께 석방됐다.

박씨는 “원주계엄사령부 군법회의에서 재판결과 집행유예로 석방되자 광업소 버스 2대가 부대 연병장에 대기했다. 당시 23명이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는데 윤석민 1군사령관이 1만원이 든 봉투를 들고 버스에 타는 광부들에게 격려금으로 지급했다.

사북광업소에 도착하자 당시 유환규 광업소장이 고생이 많았다며 15일간 유급휴가를 줄테니 지친 몸과 마음을 쉬도록 했다. 광업소 광장에는 가족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고 3개월 만에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나 재회할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 그동안 쌓였던 긴장이 풀리면서 온 몸이 심하게 아파왔다.

경찰서에서 고문과 구타를 당한 어깨와 허벅지, 허리, 무릎 등이 특히 심하게 아팠다. 보름간 집에서 쉬면서 보약 10여 첩을 계속 달여 먹었다. 집에서 보약을 먹으며 10 일 넘게 쉬자 몸이 많이 회복되는 것 같았다. ”고 회고했다.

보름 후에 광업소에 출근하자 박씨는 이전 710갱 근무 대신 650갱으로 근무처가 바뀌었다.

박씨는 광업소에 출근한지 5일 만에 항장의 호출을 받았다.

김필하 항장은 “박씨는 내일 대한적십자사 총재 표창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오늘 퇴근해 가족과 함께 서울에 올라가야 한다. 장소는 남산에 있는 숭실여대 체육관이니 오전 10시 전까지 참석해야 한다”며 빨리 열차를 타고 서울로 상경하라고 독촉했다.

그는 임신한 부인과 어린 아들과 함께 완행열차를 타고 청량리 근처 여관에서 하루를 묵었다.
1980년 8월 27일 남산 기슭 숭실여자대학교 체육관에서 열린 대한적십자 유공자 표창식장에는 이호 총재와 전두환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 여사를 만났다.

박씨는 ‘사북사건’ 당시 무기고를 목숨을 걸고 지켜 대형 유혈사태를 방지한 공로가 뒤늦게 인정됐고 전국에서 뽑힌 다른 2명과 함께 표창을 받고 이순자 여사가 하사하는 금일봉 100만 원을 받았다.

그는 금일봉으로 받은 100만 원 가운데 20만 원은 사위집을 찾은 장모에게 전달하고 고향의 부모님에게 20만원, 고생을 한 부인에게 옷을 사 입으라며 10만 원을 주고 나머지는 통장에 넣었다.

그해 박씨는 광업소 창립기념일에는 유공광부로 추천돼 치마저고리 옷감 1필, 쌀 40키로 그램, 밀가루 1포 등을 부상으로 받았다. 이듬해 5월 1일 노동절에 박씨는 동원탄좌 이연 회장의 표창장을 받고 특별장려상도 받았다.

또 박씨는 사북사건 당시 사북광업소 무기고를 지킨 공로를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와 관련 자료 및 관련자 진술서 등을 첨부해 국방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사북사건의 유혈사태를 막은 1등 공신에게 1980년 8월 계엄사가 3년의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등 사북사건 주모자로 전과자를 만든 것은 잘못이라는 탄원에 대해 국방부는 1982년 3월 3일 사면복권을 결정한다고 복권장을 발부했다.

박노연씨는 말한다.

“하루아침에 광부영웅으로 부각된 이호구씨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알뜰한 광부였다. 그러나 사북사건 당시 그는 무기고 근처에 얼씬한 일도 없는 사람이다. 청와대의 지시를 받은 사북광업소가 합작으로 광부영웅을 만든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사북사건 당시 현장에 나타나지도 않았고 어떤 역할도 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 그 사람을 권력의 힘으로 사북사건 당시 사북광업소 무기고를 지킨 광부로 조작하고 나아가 위대한 광부영웅으로 탄생시켰다. 이런 사실은 광업소 관리자도 알고 사북사건 현장의 동료들도 모두 알고 있다.

내가 사북사건 주모자로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풀려난 뒤 동료 7명이 무기고를 지킨 공로로 내무부장관, 강원도지사, 도경국장 표창을 받은 것을 알게 됐다. 뒤늦게 무기고 사수의 일등 공신이 박노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광업소 측과 정선군청, 경찰서 등에서 (나를)추천해 대한적십자 유공 표창을 받게 됐다. 그리고 국방부도 뒤늦게 사북사건 주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사면복권을 처리했다.”

한편 1986년 10월 한 많은 사북광업소를 퇴직한 박씨는 탄광에서 익힌 선산부 기술자 경력을 바탕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쌍용건설 도쿄 신주쿠 도로와 교량건설현장에서 3년 넘게 목수로 근무했다.

▲1980년 4월 27일 동아일보는 박노연씨의 사북광업소 무기고 사수당시 절박했던 상황이 보도되었다. ⓒ박노연

또 귀국한 뒤에는 쌍용건설 소속으로 탄광에서 딴 발파기사 자격증을 가지고 대구지하철 공사장에 근무하다가 서울로 옮겨 역시 지하철 공사장 기사로 근무했다.

결국 탄광에서 17년간 열심히 일했던 박씨는 지난 1998년 8월 진폐장해 11급 판정, 2006년 7급, 2012년 3급, 지난 5월 진폐증으로는 가장 심한 고도1급 장해판정을 받았다.

사북사건의 주모자와 사북사건 유혈사태를 막은 일등 공신이라는 상반된 입장으로 바뀐 그는 진폐환자로서는 가장 최악의 장해상태로 근로복지공단 태백병원 진폐병동에서 오늘도 어렵게 요양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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