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이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출범 10년째다. 오로지 성장만 바라보던 이 나라에 복지국가 운동의 씨를 뿌린 단체가 복지국가소사이어티다. 이 단체를 만들기 위해 복지국가 전문가들이 모인 게 지난 2006년이다. 10년 간 벌인 활동, 그 중심에는 이상이 제주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있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그를 만났다.
지난 11일, 서울 마포구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꼬리 자르기'라는 표현을 여러 번 썼다.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과제는 그 너머에 있다는 이야기다. 박 대통령 및 그의 측근들은 '꼬리'에 불과하다고 했다. 몸통은 재벌과 지배 엘리트다. 재벌은 약점 많은 박 대통령을 포획해서 잇속을 챙겼다. 몸통을 바꾸는 개혁이 없다면, '박 대통령 하야'는 그저 '꼬리 자르기'일 뿐이라는 것.
요컨대 그는 '정권 교체' 그 자체만으론 부족하다고 본다. 정권이 바뀌어도 양극화의 현실이 그대로라면, 뜨거운 마음으로 촛불을 든 시민들은 다시 좌절에 빠진다. 이는 결국 '사회 문제에 관심 가져봐야 헛일'이라는 식의 냉소주의만 부추긴다. 일단 나부터 살아남자는 '각자도생' 논리가 판을 치면, 공공성 축소는 필연이다. 이는 재벌이 바라는 바다.
정권이 바뀐다면, 새로운 정권은 재벌이 아닌 시민에게 포획돼야 한다. 아울러 박근혜 정부와는 전혀 다른 정책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그럼, 무엇부터 해야 할까. 이상이 대표는 내년 6월에 '복지국가 정책 패키지 청구서'를 발표하겠다고 했다. 박근혜 정부와는 다른 전망을 지닌 대선 후보라면, 꼭 받아들여야 할 정책들을 추려내겠다는 게다.
이 대표는 최근 출간한 <이상이의 복지국가 강의>에서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행복할 권리'의 차이에 대해 설명했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만 보장되는 사회에선, 극소수 '개천의 용'만 행복하다. 이제껏 우리는 이런 사회에서 살았다. 진짜 중요한 건, '행복할 권리'다. '개천의 용'이 될 수 없는 보통 사람들에게도 '행복할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 그게 보편적 복지다. 한국 사회가 무상급식 논쟁을 거치면서 느슨하게나마 합의했던 방향이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줄푸세'(세금과 정부 규모를 '줄'이고, 불필요한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우자는 뜻) 구호를 내걸었던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012년 대선을 앞두고는 복지국가를 약속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 취임 이후 4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는 복지국가를 향해 품었던 꿈을 잊어버렸다. 그걸 다시 떠올릴 때가 됐다. 그렇지 않으면, '박근혜 하야'를 외치며 들었던 촛불은 깊은 냉소와 함께 꺼지기 십상이다. 이 대표와 나눈 복지국가 이야기를 간단히 정리했다.
차병원 사태, '나경원 1억 피부과 논란'처럼 끝내면 안 된다
프레시안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중요한 고리가 차병원 그룹이다. 최순실 씨와 그 주변 사람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이 차움병원(차움의원)을 이용했다. 차병원 그룹 계열 병원이다. 차병원 그룹은 의료 영리화에 적극적이었다. 박근혜 정부의 의료 정책이 차병원 그룹의 이해관계와 겹친다는 지적이 있다.
이상이 : 나경원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 2011년 서울시장 선거에 나섰을 때 '1억 피부과' 논란이 일었었다. 그때는 '가십'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이번에도 비슷한 것 같다. 그럼 안 된다.
차병원 그룹, 가천대학교 길병원 등은 공통점이 있다. 작은 병원에서 출발해서 입지전적인 성공을 했다. 이들은 모두 정권 실세에게 끈을 대는데 익숙하다. 그렇게 해서 성장했다. 현 정부 들어, 차병원 그룹은 최순실 씨를 정치적으로 매수해서 이권을 챙겼다.
의료계에는 크게 두 갈래 흐름이 있다. 하나는 공공성을 중시하는 것이고, 나머지는 시장주의적인 흐름인데, 차병원 그룹 등은 후자다. 정권을 포획해서 시장주의 정책을 끌어내는데 성공한 셈이다.
박근혜-최순실은 꼬리일 뿐…몸통은 재벌
프레시안 : 차병원 그룹 사례는 현 정권과 자본 사이의 관계를 축약해서 보여준다. 재벌은 최순실 씨에게 돈을 뜯겼다며, 피해자인 척 한다. 하지만 그게 아니지 않나. 차병원 그룹은 최순실 씨와 박 대통령에게 약간의 혜택을 준 대신 더 큰 규모의 특혜를 누렸다. 재벌도 마찬가지다. 피해자라기보다는 거래 당사자였다.
이상이 :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이 <프레시안>에 "재벌이 입금하자, 박근혜-최순실이 움직였다"라는 글을 기고했다. 나는 이 글을 출력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보여준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대로 담겨 있다.
종편이 주도하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보도는 피상적인 사안만 다룬다. 그런 식으로는 본질이 감춰진다. 박 대통령과 최순실 씨 일가는 꼬리일 뿐이다. 몸통이 그대로라면, 꼬리를 잘라내도 소용없다. 새 꼬리가 곧 나온다. 새로운 박근혜, 더 세련된 박근혜가 나타난다. 몸통은 재벌과 권력 엘리트 집단이다. 그들이 정권을 포획했다. 그들이 과연 박 대통령과 최순실 씨 사이에 대해 몰랐겠나. 절대로 그럴 리 없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 박 대통령을 활용한 것이다. 재벌과 권력 엘리트 집단이 꼬리 자르기에 성공하는 걸로 지금 상황이 마무리될까봐 두렵다.
'신뢰의 정치인'이 무표정하게 공약 깨도 놀라지 않은 까닭
프레시안 : 역동적 복지국가를 내세우고 활동한 지 10년째다. 비록 한계가 있지만 성과도 컸다. 무상급식 도입을 계기로, 보편적 복지에 대한 인식도 확대됐다. 지난 대선에선 모든 후보가 복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상이 :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약속을 깼다. 충격적인 건, 자신이 제시한 공약을 파기할 때의 모습이었다. 예컨대 노무현 대통령도 대선 공약을 파기했었다. 그때는 괴로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박 대통령은 경제 민주화,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 등에 대한 공약을 취임 첫 해에 파기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박 대통령뿐 아니라 정치권, 언론 등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게 충격적이었다.
결국 '어떤 가치에 뿌리를 뒀느냐'라는 문제다. 박 대통령 및 그와 손잡은 세력은 경제 민주화, 복지국가 등에 대한 철학 자체가 없었다. 그러니까 공약을 깨면서도 아무런 가책이 없었던 거다. 박 대통령은 '신뢰의 정치인'이라더니, 당선되자마자 공약을 저렇게 버리나. 이런 생각을 하면 놀랄 법도 한데, 다들 놀라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게다. 박 대통령의 공약은 그의 본질과 관계없었다는 걸 말이다.
2007년 경선과 2013년 취임 사이의 박근혜, 기만이었다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 2기일 뿐이다.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박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이 치열하게 경쟁했다. 당시 이 전 대통령은 성장지상주의를 내세웠고, 규제 완화와 민영화를 약속했다. 박 대통령은 '줄푸세' 구호를 내걸었다. 둘은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한 거다.
2년 뒤인 2009년 10월 26일, 박근혜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 추도식에서 "아버지의 궁극적인 꿈은 복지국가 건설이었다. 경제성장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대선 후보 경선 때와는 정반대 이야기를 한 것이다. 실제로 이듬해인 2010년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2012년 대선 당시 박 대통령은 '복지국가와 국민행복 시대'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 경제 민주화,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 등을 공약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대통령 취임 첫 해인 2013년, 이런 공약들을 모두 폐기했다.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말이다.
지금 돌아보면, 박 대통령의 본심은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당시 내걸었던 구호였다. 그때부터 대통령 취임 사이에 했던 말들은, 박 대통령의 생각과는 전혀 관계없던 것들이었다. 한마디로 국민을 기만했다.
결국 취임 이후에 박 대통령이 한 일은 뭐였나. 이명박 정부와 마찬가지로, 감세 기조였다. 민영화 정책을 계속 이어갔고, 규제를 풀었으며, 해고를 쉽게 했다. 재벌이 원하는 걸 그대로 한 것이다. 나는 몸통, 본질을 봐야 한다고 거듭 이야기했다. 몸통은 재벌이고, 그들이 원하는 건, 시장국가다. 의료 분야를 놓고 이야기하면, 현 정부는 삼성이 희망했던 원격의료 도입에 목을 맸다. 일차 의료 기관을 위축 시켰고, 공공 의료를 축소했다.
이런 사실을 보다 적극적으로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식코의 나라'가 되는 건 시간문제다.
박근혜 퇴진 이후 양극화는 그대로라면, 더 큰 절망 온다
지금 시민들이 거리에서 촛불을 들고 있다. 그들의 구호대로 박 대통령이 하야한다고 해서, 문제가 풀리는 건 아니다. 정권을 바꾸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들이 있다. 기존 꼬리 잘라내고, 새 꼬리가 돋아난다고 한들, 재벌과 소수 엘리트가 정권을 포획하는 구조가 그대로라면 소용없다.
정권이 바뀌었는데, 양극화는 여전하다면, 사회 안전망은 계속 부실하다면, 시민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또 기만당했다고 느낄 게다. 거리에 나서봤자, 결국 소용없는 거구나 싶어진다. 기대와 열정을 품어봤자, 부질없다 싶어진다. 그럼 어떻게 되나. 일단 나만 살아남자는 생각이 팽배한다. 각자도생이다. 그나마 있는 공공성마저 무너진다. 결국 재벌과 소수 엘리트만 이롭다.
그러자고 촛불 드는 건 아니지 않는가. 정권 교체를 넘어서는 과제가 있다. 재벌이 아닌, 시민이 정권을 포획하는 것이다. 소수 엘리트와 재벌에게 맞춰진 정책의 방향타를 시민의 힘으로 돌리는 것이다. 예컨대 의료 부문이라면, 재벌만 살찌우는 민간 의료 보험 대신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을 확대해야 한다.
'어떤 정권 교체'인가?
프레시안 : 각자도생 사회, 시장국가를 넘어 역동적 복지국가로 나가자는 평소 지론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게 참 어렵다. 역동적 복지국가는 한 가지 정책으로 이룰 수 없다. 조세, 재정, 노동, 복지, 교육, 금융, 산업 정책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에 대한 합의도 필요하다.
이상이 : 깨어 있는 시민 백만 명이 나서면 가능하다. 그저 정권 교체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어떤 정권 교체'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민들이 있다면 가능하다. 스웨덴 등 북유럽 복지국가가 앞서 갔던 길이다. 깨어 있는 시민들이 공부하고 토론하는 자리가 많아져야 한다.
전문가들은 자기 전공에만 갇히지 말고, '복지국가학'을 만들어 내야 한다. 역동적 복지국가가 가능하려면 다양한 정책들이 어떻게 맞물려야 하는지에 대해 연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최근 <이상이의 복지국가 강의>(밈 펴냄)을 출간한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복지국가 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사회과학 연구자들을 만나면 답답할 때가 많다. 역동적 복지국가를 만들려면, 경제학도, 사회복지학도 모두 필요하다. 그런데 이들 학문 사이에 교류가 없다. 한쪽이 다른 쪽을 무시하거나, 미워한다. 담론을 다루는 쪽과 정책을 설계하는 쪽 역시 등을 돌리고 있다. 이래서는 '복지국가학'이 불가능하다. 그 점에선 내가 다행스럽다. 나는 학부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공부의 출발점이 사회과학이 아니다보니, 오히려 기존 사회과학 분과 체계에 얽매이지 않고 정책 연구를 할 수 있었다.
아울러 언론과 학교의 역할도 중요하다. 복지국가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하는 기반이 필요하다. 그러자면, 아무래도 길고 자세한 글을 읽어야 할 텐데, 최근 들어 언론이 단편적인 정보만 전달하는 경향이 더 심해졌다. 또 학생들도 취업이나 전공 공부에 도움이 안 되는 책은 읽을 여유를 내지 못한다. 이 점은 걱정스럽다. 어떤 식으로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본다.
증세 반발, 복지국가 설득으로 돌파할 수 있다
프레시안 : 내년이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창립 10주년이 된다.
이상이 : 내년 6월에 복지국가 정책 패키지 청구서를 발표할 계획이다. 그걸 주요 대선 후보들에게 전달할 것이다. 말 그대로 시민이 정치인에게 정책을 청구하는 것이다. 주권자인 시민은 그럴 권리가 있다. 이런 활동을 통해, 어떤 후보가 당선되건 다양한 복지국가 정책이 국정에 스며들게끔 하는 게 목표다.
시장국가를 복지국가로 전환하는 과제, 그걸 해내려면 집권 초기가 대단히 중요하다. 그때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리해서 대선을 앞두고 발표하겠다는 게다. 그리고 시민은 이런 청구서를 대하는 후보들을 보고, 누가 복지국가에게 어울리는 대통령감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역동적 복지국가 만들기, 결국 세금을 더 내야 한다. 반발이 있다. 그건 돌파해야 한다. 세금을 좀 더 내고, 복지국가를 만드는 게 다수 시민에게 훨씬 좋은 일이라는 걸 설득해야 한다. 그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1970~80년대엔 자본 투자를 늘리자는 식의 성장 우선주의가 나름의 설득력이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복지를 늘리지 않고서는 성장도 불가능하다. 성장과 분배는 같은 길을 함께 걷는 친구 같은 사이다. 깨어 있는 시민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다만 주변 시민들을 설득하는 무기가 필요할 뿐이다. 내년 6월에 발표할 복지국가 정책 패키지 청구서가 그 역할을 하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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