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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촛불'에서 MB의 그림자를 보다

[양지훈의 법과 밥] 폭력 시위는 '자발적으로' 사라졌나?

지난 11월 12일 광화문 집회는 '정태춘'을 다시 만난 집회였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시청까지, 광화문 앞에서 종로, 안국동, 경복궁에 이르는 100만 군중 앞에서, 은둔하다 드디어 우리 앞에 나타난 정태춘은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고,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 흘리지 말자"고 노래했다. 전인권이나 김광석 정도로 만족하고 살아가던 우리들은 불현듯 광화문 앞에서 정태춘을 만나곤 그의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숨죽여 들었다.

정태춘과 이승환 사이

정태춘의 비장한 미학과 상대적으로 조용했던 분위기와 달리, 가수 이승환이 등장하자 군중들은 열광했고 그에 보답하듯 '하야하라' 개작 송으로 응답했다. 흥겨웠다, 집회에서 꼭 운동가를 군가처럼 합창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광화문과 종로 일대 골목 곳곳에서는 작은 퍼포먼스를 펼치는 예술가들의 춤과 노래가 시위대와 어우러져 광화문 거리는 시민 축제의 한복판이 되었다.

평화롭게 치러진 문화제와 같았던 광화문 집회에서, 일탈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차벽이 설치되었던 거리에서 일부 시민이 차에 기어오르자 시민들이 '내려와'를 연호했고, 잠시 흥분했던 시민 일부가 얌전히 차를 내려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처음부터 줄곧 평화로웠던 100만 군중은 집회가 공식적으로 마무리된 후 자발적으로 쓰레기를 치우고 줄 맞춰 지하철 역 입구로 뿔뿔이 흩어졌다. 혹자들은 지나치게 평화로웠던 100만 시위대와 그들의 도덕적 결벽성을 성토하기도 했다.

모든 집회에는 구경꾼부터 단순 참가자, 적극-극렬 참가자가 뒤섞여 있다. 전체 참가자 가운데 소수에 해당하는 극렬 참가자는 보통 집회 지도부나 주최 측의 지시를 무시하곤 했고, 그들 자신의 성정 때문에 혹은 집회 현장에서의 흥분 때문에 즉자적인 행동을 조직하기도 하고 폭력 행위를 일삼기도 한다. 과거 그들의 행위가 현행법을 위반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극렬·폭력 시위대는 왜 사라졌나

흥미로운 사실은, 이번 집회에서 그런 극렬 참가자들이 좀처럼 눈에 띄지조차 않았다는 것이다(청와대 부근 통행로 진입을 시도하던 스물세 명 정도가 연행되었을 뿐이다). 모든 집회에는 일정 비율로 위법 행위자가 등장하기 마련인데, 이들이 갑자기 사라졌다. 혹은 이들이 얌전해졌다. 무엇 때문인가? 이 질문은 법학의 영역이 아니라, 다분히 사회학적 분석이 필요한 의문일 것이다. 나는 얌전해진 시위대를 가능하게 한 배경으로 지난 몇 년간 검찰과 경찰의 집회참가자에 대한 끈질긴 법집행을 지적하고 싶다.

한국의 대규모 군중 동원 집회는 멀리 1987년 6월, 1991년 5월, 1997년 12월 등 다양한 시기에 존재했다. 하지만, 조직되지 않은 대중의 참여가 시작된 '촛불 집회'는 2002년 미선이-효순이 추모 집회, 2004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 2008년 쇠고기 광우병 집회가 그 시작이었다.

수사 기관의 법집행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는 2008년 촛불 집회 이후에 벌어졌다. 경찰과 검찰은 화염병이나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폭력 시위자만이 아니라, 집회 참가자 가운데 얌전하게 도로를 행진했던 시민 단체 간사나 학생회 간부도 형법 제185조의 일반 교통 방해죄로 처벌하기 시작했다. 신고 집회일지라도 예정되지 않은 육로 등을 행진하는 행위는 '기타 방법'으로 교통을 방해한 자에 해당한다는 이유였다.

단순 집회 참여자에 대한 일반 교통 방해죄 적용의 문제점

원래 집회란 그 본질상 당연히 다수의 위력을 수반하고 도로 교통의 방해가 일부 뒤따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헌법이 집회의 자유를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는 것은, 집회의 자유를 통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민주주의의 가치를 수호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에 다름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 집회로 인한 도로 교통의 일시적 제약은 용인해야 한다는 것이 헌법적 가치에 충실한 해석이 될 것이고, 헌법에 부합하도록 법률의 해석과 집행을 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검찰은 2008년 촛불 집회 이후 일부 집회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경찰로 하여금 집요하게 채증하게 하고(집회 현장에서 일부 경찰은 광각 카메라를 이용하여 참가자 가운데 간부급의 얼굴을 촬영한다), 이들을 대상으로 기소를 남발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교통 방해죄로 검거된 범죄자 수는 2006년 불과 806명에서 2014년 1654명으로 2배 이상 늘었다.

수사 기관의 법 집행이 불공정했던 것은, 동일한 육로를 이용한 참가자 중 일부 간부급만을 선별 기소한 것에서 나아가, 집회 참가자들에게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 아닌 일반 형법을 적용하여 처벌을 중하게 했던 점도 있었다. 형법상 일반 교통 방해 죄는 그 법정형이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의 벌금으로써, 집시법의 단순 집회 참가자에 대한 법정형 50만 원의 벌금에 비해 가중 처벌하기 때문이다.

일반 교통 방해죄 적용의 결과

검찰의 기소에 따라 단순히 도로를 행진했던 이들이 형사 재판에 피고인으로 소환되면, 이후 재판이 진행되는 수개월 동안 회사에 연달아 연차를 내거나 수업을 결석해야 한다. 몇 건의 형사 재판에 연루되면 지방 법원 곳곳에서 소환되는 통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을 정도다.

실제로 내가 변호했던 시민 단체 간사와 학생회 간부 등이 그런 피로감을 호소했다. 단순히 행진을 했던 집회 참여 사실에 따라 벌금 수십만 원부터 수백만 원에 이르는 선고를 받고 벌금을 납부하고 나면, 이들이 집회 적극 참가자에서 '순한 양'이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개인적으로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에 해당하고, 사회적으로는 형벌의 목적인 특별 예방주의가 달성되는 것이다(형법 교과서는 형벌이 사회 일반인의 범죄를 방지하려는 일반 예방주의와 범죄인 개인에 대한 범죄 예방 효과를 위한 특별 예방주의로 기능한다고 설명한다).

수년간 지속된 집단적이고 누적적인 법 집행의 효과는 적극 참가자들의 규모를 줄어들게 했을 것이다. 적극 참가자들의 감소 현상은, 그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는 폭력 시위대의 수를 축소시켰고, 이들이 집회 현장에서 점점 더 보기 힘들어졌을지도 모른다.

외신들도 놀랐던 광화문 집회의 질서정연한 100만 군중의 모습에는, 우리 집회 참가자들의 정치적 결벽성뿐만 아니라 지난 수년간 집요했던 수사 기관의 법 집행이 자리하고 있는 것 아닐까?

나는 변호사로서 폭력이 난무하는 집회를 기대하거나 그것을 결코 장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무익하고 개인적으로 지루한 일반 교통 방해 피고인의 형사 사건이 내 주변에서 발생하지 않기를 소망한다. 다만, 100만 군중에서 단 스물세 명의 연행자가 발생한 이 '사건'을 설명하는 데 검찰과 경찰의 저 끈질기게 지속된 수년의 노력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뿐이다.

나의 미흡한 가설은 보다 정확한 연구와 조사에 따라 수정되거나 보충되어야 할 것이다. 프랑스 사회학자들은 대규모 항의가 조직되는 집회 현장에 나가, 현장에서 100여 명의 학자들이 직접 투입되어 시위 참가자들을 면접하고 분석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도대체 논자들의 인상 비평 말고는 우리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2016년 인구 1000만의 수도 서울에서 100만 명이 넘게 참여한 대규모 얌전한 군중집회가 '발생'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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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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