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대통령 취임 초 ‘극비리’ 사북방문
1980년 4월 21일 강원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에서 발발한 ‘사북사건’이 4일 만인 24일 합의된 뒤 사건이 마무리 되자 국내 신문은 물론 일본과 미국 유수의 언론에서 중요 사건으로 보도했다.
당시 신군부의 서슬퍼런 총칼 앞에서 탄광촌 광부와 부녀자들의 대규모 궐기사건(광부폭동 보도지침)은 외국에서 관심이 그만큼 높았다.
<뉴욕타임즈>는 ‘남한에서 불안심화’라는 제목으로 사북사건에 대해 탄광촌 사북에서 광부들의 폭동이 일어났다고 보도했다.
또 일본의 <마이니치>와 <아사히>등은 ‘한국에서 노조원과 경관 충돌-약탈, 린치로 발전’이라는 제목으로 국내 언론이 소개한 사북사건을 비중 있게 다뤘다.
‘사북사건’관련자들에 대한 정선경찰서의 조사가 종료되고 원주 1군사령부 검찰부로 이관된 뒤 언론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 계엄사령부는 ‘사북사건’ 수사를 종결하고 1980년 6월 13일 주모자 이원갑씨 등 관련자 81명을 1군 계엄보통군법회의 감찰부에 계엄포고령법위반, 업무상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 송치했다고 밝혔다.
계엄사는 또 동원탄좌가 1971년 1월부터 1980년 4월까지 광부들의 채탄량을 검탄하는 과정에서 10여 억 원의 부당이득을 취한 사실을 밝혀내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이를 모두 광부들의 후생복지시설에 투입토록 조치했다고 밝혔다.
계엄사는 사북사태와 관련, 총 91명의 혐의자를 검거하고 이중 죄질이 가벼운 10명은 훈방조치했다고 밝혔다.(중앙일보 1980년 6월 17일)》
한편 사북사건 이후 전국의 대도시와 공단지역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확산되고 5월 17일 광주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하자 신군부는 5월 18일 이른바 ‘5.18 비상계엄확대’를 발표하면서 신군부는 집권시나리오를 진행했다.
마침내 1980년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은 하야를 발표했고 기다렸다는 듯 5일 뒤인 8월 21일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전국지휘관회의가 열렸다.
노태우 장군 등 신군부를 중심으로 한 전군지휘관회의에서는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장(국보위)을 대통령에 추대하기로 만장일치 결정했다.
이윽고 육군대장으로 군복을 벗은 전두환 국보위 위원장은 1980년 8월 27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개최된 제7차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대회에서 단독으로 대통령 후보에 출마했다.
이날 전체 대의원 2540명 가운데 2525명이 참석하고 2514명이 찬성해 전두환 후보는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됐고 9월 1일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군인출신 대통령이 탄생하자 정부는 전두환 대통령 취임축하우표 700만 장을 발행해 판매하며 축하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은 그해 4월 탄광촌 사북에서 발생한 ‘사북사건’에 대한 뇌리가 벗어나지 못해 사북을 방문해 광부들의 아픔을 치유할 구상을 하고 은밀하게 지시를 내린다.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은 9월 하순, 청와대 민정수석에게 10월 초순께 사북에서 체육대회를 열고 ‘사북사건’이후 지치고 힘들어하는 광부와 가족들을 위로하는 방안강구를 지시했다.
청와대 참모들은 노사화합을 다지는 형태의 노사체육대회를 열어 광부와 그 가족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한편, 광부들을 위한 복지대책(목욕탕 신축, 구판장 확장, 도로포장 등)을 대통령 방문 선물보따리로 풀어놓기로 했다.
이윽고 청와대는 극비리에 사북광업소와 날짜를 협의해 10월 첫 일요일인 3일을 노사화합 체육대회를 개최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대통령 방문 사실은 알리지 않았다.
당시 탄광의 휴무일은 공무원과 일반 직장에서 매주 일요일 마다 쉴 수 있었지만 ‘무연탄 증산’이 최대 목표인 탓에 대규모 탄광도 한 달에 하루정도만 쉴 수 있었다.
특히 청와대경호실은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곧장 탄광촌 사북에 대통령 방문일정이 비공식으로 결정됨에 따라 비상이 걸렸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청와대경호실은 1진 경호요원 10여 명을 10월 2일 늦은 밤 시간에 현장에 출동시켜 특별경호를 준비토록 했다.
이에 따라 이튿날 새벽 4시께 사북에 도착한 청와대경호요원들은 정선경찰서 사북지서에 도착해 꿈속을 헤매던 이기운 지서장을 불러냈다.
곤히 잠든 새벽에 깨어 난 지서장 이씨를 청와대경호원들은 납치하듯 경호실 차에 태워 사북광업소 소장실로 데려갔다.
“지서장님! 오늘 대통령이 사북광업소를 방문하는데 누구에게도 이러한 사실을 말하면 안 됩니다. 지금부터 경호상 지서장에게 도움을 받을 일이 있어 그러니 적극 협조 바랍니다.”
잠결에 갑작스런 청와대 경호실의 호출에 당황했던 이기운 서장은 곧장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 채고 차분하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제 도움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 모두 설명하고 안내하겠습니다.”
경호실 직원들은 사북지역 지도와 사북광업소 중요 갱구, 접근로 등에 대해 묻고 만일의 사태에 대피로 등을 확인했다.
당시 사북지서장 이기운 경위는 1933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평양 김일성대학에 들어간 엘리트로 대학 2학년 때 1.4후퇴를 맞아 월남한 인물이다.
혈혈단신 월남한 그는 생존을 위해 1957년 경찰에 투신했고 정선경찰서에 배속 받아 근무하면서 업무가 당차고 야무진 탓에 상급자들에게 모범 경찰로 알려졌다.
그는 사북사건 당시 정선경찰서 북면지서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사북사건이 마무리된 24일 오후 어윤대 사북지서장 후임으로 경찰서 간부들의 추천을 받아 북면지서장으로 갑작스럽게 인사가 난 것이다.
그날 오후 정선경찰서장의 기습적인 사북지서장 인사명령을 받고 사북지서가 아닌 고한지서로 달려간 그는 내무부 차관과 유내형 도경국장에게 사북지서장 발령인사를 했다.
“충성! 사북지서장으로 발령 받은 이기운 경위입니다.”
그러나 사북지서장으로 신고하러온 이 경위를 본 유내형 도경국장은 할 말을 잊었다.
치안이 완전 마비된 상황인 사북지서장은 뛰어난 체력과 능력을 갖춘 젊은 경찰관이 올 줄 알았는데 50줄 나이에 1미터 60센티도 안 되는 적은 키에 안경까지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 경위가 한심하다고 생각하던 도경국장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어깨를 어루만지다가 “사북은 당분간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광부들의 격한 감정을 자극하지 말고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당신은 막중한 임무를 맡았으니 목숨을 걸고 사북지역 치안유지와 주민화합에 적극 노력해 달라”고 말했다.
당시 정선경찰서 간부들은 경찰서장과 지서장이 광부들에게 폭행당해 갈비뼈를 부러지거나 권 총을 잃어버린 심각했던 상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사북지서장 희망자가 없는 탓에 ‘혈혈단신’ 이기운 경위를 지서장으로 추천한 것이다.
한편 10월 3일 사북지서장 이기운 경위가 새벽에 행방불명 되자 사북지서는 비상이 걸렸다. 직원들은 지서장이 실종됐다며 경찰서에 보고하고 지서장을 찾으러 다닐 정도로 전두환 대통령의 사북방문은 극비리에 진행됐다.
드디어 10월 3일 오전 9시가 되자 사북광업소 지장산 사택단지의 중앙에 위치한 동원초등학교 운동장에 광부와 부녀자 광업소 관리자 등 7000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노사화합 체육대회가 열렸다.
당시 지장산 사택단지는 750가구가 밀집해 약 3000명에 달하는 광부와 가족들이 살던 국내 최대 사택단지였다. 또 노사화합 체육대회는 사북광업소 개광 이래 가장 많은 인파가 모였다.
청와대에 의해 극비리에 마련된 사북광업소 노사체육대회는 사실 광업소 입장에서는 꺼림칙한 행사였으나 청와대 입장에서는 사북사건의 앙금을 털어내는 행사로는 체육대회가 최고라는 인식이었다.
이윽고 오전 11시께 사북광업소 광장에 헬기편으로 도착한 전두환 대통령은 경호원과 광업소 소장의 안내를 받아 사북광업소 650갱구에 입갱해 생전처음 지하 탄광갱도를 밟았다.
대통령이 탄광촌을 순방했다가 체육대회 현장만 둘러보고 광부들이 석탄을 캐는 막장에 입갱하지 않으면 탄광을 방문한 의미가 반감된다는 청와대 참모들의 의견을 받아 들여 대통령이 막장을 방문한 것이다.
잠시 후 입갱을 마친 전두환 대통령은 노사체육대회가 열리고 있는 지장산 동원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이동했다.
운동장에 도착한 전두환 대통령은 흙먼지가 날리는 학교 운동장에서 응원을 펼치던 광부와 부녀자들과 악수를 나누며 배구경기가 한창인 배구장으로 향했다.
이 때 청와대 경호원들은 전두환 대통령이 수천 명의 광부들이 운집한 광부들의 무리에 들어가자 식은땀을 흘리며 경호를 했다.
당시 현장을 지켜본 이기운 사북지서장(정년퇴임 후 정선군노인회 사무국장 역임)은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사북과 사북광업소에 강한 인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통령에 취임하고 비공식으로 사북을 곧장 방문한 것은 그분의 깊은 뜻이 있었다. 탄가루와 흙먼지가 흩날리는 사북광업소 노사체육대회 행사장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광부들의 가슴을 쓸어안는데 분주한 모습을 보였다”고 회고했다.
또 “전두환 대통령 방문이 갑작스럽게 이뤄졌는지 당일 새벽 곤하게 잠자고 있는데 청와대 경호용원이 예고도 없이 깨워 사북광업소 소장실로 불려갔다. 소장실에서 경호원들은 대통령 경호에 필요한 갱구현황과 사북진입로 및 동원초등학교 운동장 등의 상황을 문의했다. 전두환 대통령의 사북방문은 갑작스럽고 비공식적으로 진행됐다.”고 전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사북광업소를 다녀가자 비포장이었던 사북시가지~지장산 사택단지가 포장을 실시했다. 또 사북광업소에 대형 목욕탕을 짓도록 했고 사택단지에 구판장을 세확장시키거나 추가로 설치토록 했다.
당시 지장산 사택단지는 물론 사북지역 모든 사택단지는 도로 포장이 안 되고 비가 조금만 내려도 발목까지 빠지는 바람에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 나왔다. 또 탄가루 때문에 빨래를 바깥에 제대로 내걸지 못할 정도로 주변환경이 열악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사북광업소를 다녀가자 정선군에서는 지장산 사택단지 입구(현 강원랜드 운암정)에 ‘대통령 다녀가신 마을’이라는 기념비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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