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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에 빠진 권력과 싸울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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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에 빠진 권력과 싸울 '용기'가 필요하다

[강양구의 親book] <생활의 사상>

이런 얘기로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우리는 박근혜 대통령의 업무 능력이 결코 뛰어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습니다. 대선 당시 TV 토론회에서 그 허상은 적나라하게 깨졌죠. 당시 박근혜 후보자 측이 공개 토론을 기피한 건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시계를 더 이전으로 돌려도 상황은 같습니다. 우리는 이명박 대통령이 부패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BBK 수사는 그야말로 그의 실체를 낱낱이 밝혔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에게 기대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떤가요? 최근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까지 계속해서 후회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질문을 던져야 할 때입니다.우리는 왜 뻔히 알면서도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철학자 서동욱 서강대학교 교수는 <생활의 사상>(민음사 펴냄)에서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용기'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지성'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지성을 사용할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에 항상 공포에 짓눌려서 잘못된 선택을 해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 '용기'입니다.

'강양구의 親book'은 지난 7일 서교동 <시사통> 스튜디오에서 인문학, 예술, 사회, 삶, 네 가지 열쇳말로 세상살이의 이모저모를 근본적으로 돌아보는 에세이집 <생활의 사상>을 두고 서동욱 교수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철학적 글쓰기, 에세이

강양구 : 이번 주 강양구의 친북에서 여러분과 함께 읽어볼 책은 <생활의 사상>입니다.

사실 이 책을 고르면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영화나 소설보다도 더 다이내믹한 일들이 계속 뻥뻥 터지다 보니, 요즘 책이 안 나가서 출판사나 서점이 울상이라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강양구의 친북은 시사 이슈에 조금 거리를 두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몰입만 하다 보면 오히려 상황을 객관화시켜서 보는 감각이 사라질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골라본 책이 바로 서강대학교 철학과 서동욱 교수가 최근 펴낸 <생활의 사상>입니다. 사실 이 책을 읽다가 특히 시쳇말로 꽂힌 대목이 있었습니다. 그건 서동욱 교수를 직접 모시고 얘기하면서 여러분께 고백하겠습니다. 민음사에서 펴낸 <생활의 사상>의 저자 서동욱 교수님 나와 계십니다. 안녕하십니까?

서동욱 : 네, 안녕하십니까?

강양구 : 서동욱 교수께서는 들뢰즈 철학을 비롯한 서양 현대 철학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익명의 밤>(민음사 펴냄) 같은 비평집을 펴낸 문학 평론가이기도 하고, <곡면의 힘>(민음사 펴냄)을 비롯한 세 권의 시집도 펴낸 시인이기도 합니다. <신체 연구>나 <허파 주체> 같은 공연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고 <미술은 철학의 눈이다>(문학과지성사 펴냄) 같은 책을 엮어 미술 비평가의 안목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낸 책의 부제가 '서동욱 에세이'입니다.

프랑스어 '에세(essai)'가 원어인 에세이를 특별히 부각한 이유가 있습니까?

서동욱 : 지금까지 여러 종류의 글을 썼어요. 철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당연히 논문도 썼고, 문학 비평을 위한 평론도 썼어요. 공연을 위한 글, 그리고 언급하신 대로 시도 썼고요. 그런데 이번 책을 엮으면서 돌이켜 보니, 에세이야말로 늘 제 곁에 있었던 장르였습니다. 이번 책을 내면서 에세이라는 장르를 그 어느 때보다도 숙고하게 되었습니다.

'에세'의 뜻은 '시도하다', '시험하다(essayer)'는 의미로부터 유래합니다. 글쓰기 장르로서 에세이는 결정되지 않은, 확정되지 않은 터전으로 들어가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는 전위적인 성격을 갖고 있죠. 에세이는 무엇이든 해볼 수 있는 열려 있는 장르죠.

역사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교훈이나 격언을 답습하는 글쓰기가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16세기에 에세이라는 장르가 새롭게 나타나 기존 전승되어 온 성찰을 답습하고 전달하는 일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성찰의 요람이 되죠. 이후 에세이는 문학의 한 장르로서 빛나는 결실을 맺습니다. 몽테뉴부터 시작해 파스칼, 또 초기 낭만주의 시절 <아테네움(Athenaeum)>이라는 잡지를 통해서 단상적인 글을 쓴 슐레겔 형제까지요.

이들의 글쓰기가 모두 에세이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이후에는 니체의 글쓰기가 바로 이런 에세이 전통을 이어받고 있죠. 이들은 모두 공통점이 있습니다. 정해진 형식에 제약을 받지 않고, 단편적인 단상부터 시작해서 밀도 있는 내용을 성취했죠. 내면에서 치고 올라오는 생각을 그 밀도 그대로 담아내기에 가장 적합한 장르가 에세이입니다.

강양구 : 그간 서동욱 교수의 책을 여럿 읽었는데요, 이 책은 그 중 가장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글 가운데는 만만하게 보다 큰 코 다치겠다 싶은 글도 있었지만요. <프레시안>을 통해서 발표한 글도 있더군요. 어떻게 탄생하게 된 책입니까?

서동욱 : 정말 다양한 계기로 쓰인 글들이 묶였어요. 내가 가진 관심과 청탁받은 내용이 일치할 때 글쓰기는 시작하는데, 그런 글을 담았습니다. '꼭 쓰고 싶다'는 주제가 떠올라 쓴 글을 모았지만, 그런 생각 없이 풀이 자라듯 자연스럽게 출현한 글도 있습니다. 그렇게 한 편, 두 편 쓰다가 생활의 전모를 모자이크 하듯 다각도에서 그려 보이려는 구상을 했고, 그 결과가 이 책으로 탄생했죠.

강양구 : 이 책에서 내세운 네 가지 열쇳말이 인문학, 예술, 사회, 삶입니다. 특별히 이 네 가지를 열쇳말로 꼽은 이유가 있습니까?

서동욱 : <생활의 사상>이 우리 삶의 다양한 모습을 모두 포착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 화두로 삼는 주제가 바로 이 네 가지 열쇳말이라고 생각했어요. 이 책을 작은 집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집에 인문학, 예술, 사회, 삶이라는 네 방향으로 난 큰 창이 있다고 생각하셔도 좋을 듯합니다.

강양구 : 저자로서 특별히 더 애착이 간 창이 있나요? 저는 기자여서인지, 아무래도 사회, 삶으로 묶인 글에 더 눈길이 가더군요. 반면에 인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분이라면 인문학, 예술 분야의 글을 읽고서 생각이 더 깊어질 것도 같고요.

서동욱 : 다양한 주제의 글이 공존하는 게 에세이집의 장점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해요. 독자가 능동적으로 자기만의 그림을 그리면서 책을 읽을 수 있으니까요. 각자의 관심에 따라서 저마다 방점을 찍는 읽기가 가능하다면, 글쓴이로서는 더 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죠. 개인적으로는 예술 분야에 애착이 가는 글이 많습니다.

공포를 이기는 용기가 필요하다

강양구 : <생활의 사상>에서는 같은 주제가 여러 글에서 변주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를 꼽자면 '용기'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꼭 소개하자고 결심하게 된 계기가 '공포와 용기'라는 글을 읽고서였어요. 인문학과 용기가 어떤 관계가 있나요?

서동욱 : 저자가 이렇게 말하는 게 우스울 수도 있습니다만, '공포와 용기'는 저도 좋아하는 글입니다.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라는 칸트의 짧은 글이 있습니다. 칸트가 '계몽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답하는 글이죠. 칸트의 답변이 뭐였을까요? '오류 없이 사고하라', '지식을 쌓아라.' 이런 식의 답변이 아니었습니다.

칸트는 이런 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대신 칸트는 '너의 지성을 스스로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고 답합니다. 결코 똑똑해지라, 추론에서 오류를 범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지성이 아니라, 그 지성을 사용할 용기라는 것이죠.

강양구 : 칸트가 말한 용기가 대단한 뜻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용기' 맞죠?

서동욱 : 네, 맞습니다. 생각하는 능력은 우리 모두가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제대로 생각하기 위해 가져야 할 건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용기라는 게 칸트의 주장입니다. 누구보다도 이성과 생각을 중요하게 여겼던 철학자가 강조한 게 정서적 차원의 용기라는 게 굉장히 인상적이죠.

강양구 : 지금 한국 사회가 아주 혼란합니다. '공포와 용기'를 읽으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게 바로 용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서동욱 : 맞습니다. 주변을 보세요. 지금보다 좀 더 자기 능력을 펼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 사회적 현실에 너무 큰 공포를 가져서 온전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때 필요한 게 무엇일까요? 바로 공포에 짓눌리지 않는 용기입니다.

박근혜는 미신이 낳은 대통령

강양구 : '공포와 용기'에는 칸트뿐만 아니라 스피노자 같은 철학자가 등장하죠. 이 자리가 시사 이슈를 놓고서 얘기를 나누는 자리는 아닙니다만, 정국이 정국이다 보니 그런 철학자가 최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본다면 어떻게 논평할지 궁금하더군요. 철학자로서 서동욱 교수님은 어떻습니까?

서동욱 : 현재 상황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서술어가 잘 떠오르지 않을 정도입니다. 지금 당장 인터넷에 접속하면, 신문을 펴면 정말로 많은 논평과 다양한 견해가 쏟아지니까요. 저는 이번 상황을 보면서 특히 정치와 미신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치라는 장에서 통치자나 시민 모두 빠져들기 쉬운 위험이 미신이거든요.

강양구 : 정치와 미신이요?

서동욱 : 그렇습니다. 우리는 언제 미신에 빠질까요? 결과는 있는데 합리적인 원인을 정확히 모를 때입니다.

'공포와 용기'라는 글에서도 공포가 나옵니다만, 우리를 홀리는 미신은 늘 공포를 수반합니다. 어떤 사람이 벼락 맞아 죽었어요. 이 사태의 합리적 원인은 특정한 기상 현상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기상 현상의 결과로 사망했다는 결론보다, 죽은 이가 천벌 받았다는 식으로 생각하죠. 두려움의 대상을 만드는 거예요.

통치자는 바로 이를 이용합니다. 자신을 신성화하는 경향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가령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이라는 놀라운 책에서 알렉산더 대왕을 예로 듭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이 신의 아들임을 주장합니다. 이런 식의 신성화는 역사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죠. (봉건 시대 동아시아 여러 국가의 통치자가 가지는 지위를 한번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신성한 다스림이 존재한다는 미신적 주장을 국민에게 퍼뜨림으로써 '파악되지 않는 전능한 존재의 통치' 아래로 사람들의 복종을 이끌어내죠. 이는 단지 전근대적 통치에서만 발견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근대 국가에서도 여러 방식으로 변형된 채 존재합니다. '누구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라거나, '어떤 가문을 이어받은 자'라는 식의 신성화가 대표적이죠.

강양구 : 박근혜 대통령이 바로 그런 사례 아닙니까. 많은 사람이 우상화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이유로 대통령까지 됐으니까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더 흥미롭게 읽은 건, 통치자도 미신에 빠질 수 있다는 대목이었습니다. 왜 통치자도 미신의 함정에 빠집니까?

서동욱 : 통치자 역시 인간이라는 제한성으로 인해 초현실적인 힘에 의탁하기가 쉽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또 다른 좋은 예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앞두고 공포에 빠져 점성술사를 불렀습니다. 통치자가 미신에 의존하는 통치의 한 보기를 보여줬죠.

여기서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도 언급하고 싶군요. 통치자가 미신을 사탕처럼 삼켜버리면 어떻게 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작품이 바로 <맥베스>입니다. 이 작품에 마녀들이 나타나는데, 그들이 바로 비선 실세죠. 맥베스에게 어떻게 정치해야 할지를 얘기해 줍니다. 그러다 맥베스는 어떻게 됩니까? 결국 그 마녀 때문에 파멸하죠.

맥베스가 마지막에 파멸을 앞두고 한탄하는 내용이 인상적입니다. 읽어보겠습니다.

두 가지 뜻을 가진 애매한 말로 사람을 속인다.
귀에는 약속을 지키는 듯 속삭이고, 실제로는 그 희망을 깨트려버리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셰익스피어는 통치자를 파멸로 이끄는 미신의 속성이 무엇인지 너무도 정확히 통찰합니다. 처음에는 미신의 달콤한 말에 의존해 상승하는 듯하지만, 결국 바로 그 미신에의 의존 때문에 곤두박질합니다. 이 비극적 결과는 사과 속에 들어있던 벌레처럼, 통치자를 띄우던 미신 안에 애초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죠.

▲ 우리는 박정희라는 미신에 짓눌려 박근혜 대통령을 뽑았다. ⓒ뉴스타파

국가가 부재할 때, 개인이 나선다

강양구 : 강풀 작가의 웹툰 <26년>을 소재로 쓴 '<26년>과 그리스 비극'이라는 글도 인상 깊습니다. 애초 <프레시안>에 기고하신 글이죠. (☞관련 기사 : <26년>은 참 나쁜 영화다!)

<26년>은 1980년 광주 5.18 민주화 운동 희생자의 후손이 가해자를 직접 처단하는 복수극입니다. 그런데 서동욱 교수께서는 그리스 비극을 환기하면서 복수의 정당성을 논하셨어요.

서동욱 : <26년>은 참으로 좋은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보면서 그리스 비극 작가인 아이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떠올렸습니다. 이 작품 역시 <26년>과 마찬가지로 대를 이은 복수극입니다. 그런데 <오레스테이아> 3부작의 결말은 <26년>과 다릅니다.

복수를 통해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오레스테스는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기게 됩니다. 그런데 아테네 여신의 주선으로 오레스테스를 심판하는 재판이 열리고, 여기서 그의 복수 행위는 무죄 판결을 받습니다. 또 복수의 여신은 국가 안에서 복수를 근절하는 자비로운 여신의 지위를 부여 받죠. 다음과 같은 노래가 울려 퍼지며 비극은 막을 내립니다.

"이 도시의 흙먼지가 시민들의 검은 피를 마시고는 복수심에 불타 보복 살인에 의한 재앙을 반기는 일이 없기를!" ('자비로운 여신들',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아이스퀼로스지음, 천병희 옮김, 숲 펴냄))

바로 정의에 입각한 판결로 국가가 보복을 근절하고 보복의 힘을 자비로운 여신의 힘으로 바꿔 사회 통합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리스인은 가졌으나 우리는 가지지 못한 것, <오레스테이아> 3부작의 주인공은 마침내 얻었으나, <26년>의 주인공은 얻지 못한 것은 바로 정의를 구현하는 국가입니다.

<26년>은 '국가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국가를 대신해서 개인이 보복을 수행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개인이 국가 대신 정의의 문제를 짊어진다는 것은 국가 기능이 정지했다는 것, 국가가 무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개인이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개인의 권리를 국가에 양도하는 계약이 영구적이지 않으며, 파기될지 유지될지 실시간으로 검증받는다는 것을 뜻하죠.

강양구 : 국가가 제 역할을 못하면, 복수가 정당할 수 있다?

서동욱 : 어떤 경우든 자신의 생명을 비롯한 권리를 지키고, 나아가 그것이 침해받을 때 저항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하는 '자연권이 정당하다'는 것이죠.

예술은 기존 권력 관계를 전복해야

강양구 : 최근 정치적으로 엄중한 상황에서 '예술은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의문이 제기되는데요. 책을 읽다 보면, 예술은 어떻게 정치적이 되느냐는 의문을 품으신 것 같습니다. 참여 문학, 혹은 참여 예술에 관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생활의 사상>에도 담겨 있지만, <프레시안>에도 문학의 정치적 참여에 대한 글을 쓰신 적이 있습니다. (☞관련 기사 : 시는, 소설은 어떻게 혁명이 되는가?)

서동욱 : 제가 오랫동안 천착한 작업은 '예술이 지닌 정치적 힘'을 안전한 이론적 지반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어요. 이런 작업이 참여 문학, 참여 예술의 반대편에 섰다는 식으로 오해되는 경우를 본 적도 있는데, 제대로 읽지 않는 게으른 비평가에 의한 어처구니없는 오독이었지요.

강양구 : 지금 참여 문학의 이론적 토대가 빈약하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서동욱 : 참여 문학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런데 어느 지점에서 일종의 딜레마에 빠집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다음 문장을 먼저 읽어보죠.

"자율적인 작품은 사회적으로 무관하고 궁극적으로는 모독적인 반동적 작품이라는 판결을 유발하며, 반면에 사회적으로 일의적이고 논증적인 판단을 행하는 작품들은 그로써 예술을 부정한다." (<미학 이론>(테오도르 아도르노 지음, 홍승용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강양구 : 아도르노의 언급은 한국 문학사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났던 순수(?) 문학과 참여 문학 사이의 갈등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서동욱 : 저는 이런 식의 양분된 입장을 종합해 예술의 사회적, 정치적 성격을 어떻게 자리매김하느냐가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작품의 자율성이 어떻게 사회적 성격을 가지느냐를 보여주는 작업이 필요하죠. 작품이 우리의 감성 체험을 종래와 다르게 바꾼다면, 이 이질적 감성 체험 하에서 어떻게 사회의 변화 가능성이 나타날 수 있는지를 비약 없이 설명하는 게 예술과 정치의 관계에서 중요한 문제입니다.

강양구 : 시를 지을 때 박근혜 대통령이나 촛불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서도, 읽는 이로 하여금 특별한 감성 체험을 유발하고, 감성 체험의 결과로서 현재의 정치 상황을 다시 성찰하게 하는 것. 이런 예술 작업이 가능하다면, 그야말로 미학적으로, 사회적으로 완성된 예술 활동일까요?

서동욱 : 예를 든 것처럼, 정치적 사안에 관한 명제를 담는 것은 예술 작품에 프로파간다 성격을 부여하는 활동이죠. 효과의 측면에서 일정 정도 얻는 게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런데 한 걸음 나가서 생각한다면, 그 역할을 수행하는 다른 정치적 기재들과 비교해 과연 작품이 프로파간다를 위한 최상의 도구냐는 질문을 던져 볼 수 있겠죠. 혹시 작품이 프로파간다가 되는 성취를 할 때, 작품은 그 대가로 자신의 진정 고유한 정치적 가능성은 닫아버리는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합니다.

예술의 정치성과 관련해 무엇을 정치로 이해해야 하는 걸까요? 들뢰즈의 얘기를 예로 삼아 실마리를 풀어 보죠. 전통적으로 정치에서 기준이 되어 온 다수자들로 들뢰즈는 '첫째 남성, 둘째 성인, 셋째 이성애자, 넷째 도시 거주자'를 꼽습니다. 정치의 장에서 사람들은 이 기준 안에 들기 위해 노력하든지, 이 기준에 의해 소수자로 분류되는 일을 감내하든지 해야죠. 둘 가운데 어느 길이건 결국 미리 짜인 기준의 폭력 아래 놓이는 방식이죠.

그렇다면, 예술이 이런 판 안에서 한계 지어진 절차를 감시하는 데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정치의 근간을 이루는 이 기준 자체를 파괴하는, 즉 판 자체를 와해하는 새로운 힘이 되어주기를 기대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런 점에서 예술이 '저런 기준을 위협하는 힘'이 될 수 있는 길을 숙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여 예술도 그런 관점에서 접근되어야겠죠.

강양구 : 이 문제와 관련해 <생활의 사상>의 다음 구절을 읽어보면 좀 더 명확해 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학 또는 예술의 정치성과 관련된 이런 딜레마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관건은 정치를 무엇으로 이해해야 하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술이 관여해야 하는 정치가 특정 후보에 대한 투표를 독려하는 일이라면, 즉 사람들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프로파간다라는 수단을 만족시켜야하는 일이라면, 예술은 예술 자체의 자율성 또는 정체성을 상실할 뿐 아니라, 정치를 위한 최고의 역할 역시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프로파간다를 위한 전문적 기재들에 비하면 예술은 전적으로 부수적인 까닭이다.

그러니 현행의 정치적 절차가 아닌 '정치 자체'가 관건이 되는 맥락을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들뢰즈는 영상 대담 <질 들뢰즈의 A to Z>에서 전통적으로 정치에서 기준이 되어온 다수적인 자들로 '첫째 남성, 둘째 성인, 셋째 이성애자, 넷째 도시 거주자'를 꼽는다. 정치의 장에서 사람들은 이 기준 안에 들기 위해 노력하든지, 이 기준에 의해 소수자로 분류되는 일을 감내하든지 한다. 둘 가운데 어느 길이건 결국 주도적 기준의 폭력 아래 놓이는 방식이다.

문학의 정치란, 이런 기준에 근거해 꾸며진 정치적 절차의 일부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정치의 근간을 이루는 이 기준 자체를 파괴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예술이 문화 안에 마련된 안전한 캡슐 같은 놀이터 안에 머물며 정치에 해가 없는 막무가내의 객기가 될 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문학의 정치, 나아가 예술의 정치는, 예술이 현금의 정치가 기반하고 있는 '저런 기준에 대해' 이질적일 뿐 아니라 위협적인 요소가 될 때 가능할 것이다."

▲ 지금 필요한 건 익명의 힘이며, 진실을 사고할 용기다. ⓒ프레시안(최형락)

지금 필요한 건 익명의 힘

강양구 : 말씀을 듣다 보니, 책에서 몇 차례 언급된 '소통'에 관해서도 한 번 언급을 해보고 싶습니다. 마치 소통이 절대선인 것처럼 얘기되는 상황에서, 교수께서는 소통 자체가 절대선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흔히 사회적 소통을 중요한 역할로 자임하는 저널리스트로서 인상 깊은 통찰이었습니다.

서동욱 : 소통이 의회 민주주의의 기반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겠죠. 그런데 정말로 소통이 우리에게 진리를 건네주고, 민주주의의 이상을 구현할까요? 예를 들어, 의회 같은 공간에서 소통이 도달할 수 있는 이상적 지점이라곤 기껏해야 '합의된 의견'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이견도 없이 합의된 의견이 진리와 동일하다는 걸 어떻게 보증할까요?

또 우리가 수행하는 대화란 정말로 평등을 전제로 하고 있을까요? 오히려 대화는 그 자체가 주제로 삼을 수 없는 전제들을 바탕으로 하며, 그 전제는 흔히 소통을 주관하는 자의 힘의 논리에 의해서 마련되곤 합니다. 그렇다면, 소통이 시작되는 공간은 이미 불평등한 공간이기 마련이죠.

강양구 : 불평등한 소통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언론이죠.

서동욱 : 결국 진정한 소통은 역설적으로 소통하지 못하는 자, 말하지 못하는 자를 위해 존재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 이 책에서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입니다. 자신을 대변할 수 없는 자, 곧 외국인, 소수자, 미성년자 등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은 수많은 자는 기존 소통의 장 바깥에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소통이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이죠.

강양구 : '익명의 힘'이라는 글도 떠오릅니다. 보통 인터넷 게시판에서 익명이 보장되는 게시판을 보면, 속된 말로 난장판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에게 익명은 보통 조금 부정적으로 다가오는데, 교수께서는 익명을 긍정적으로 사유하셨습니다. 이 책 이전에 내신 비평집도 <익명의 밤>(민음사 펴냄)이죠?

서동욱 : 우리가 일견 익명에 관해서 부정적인 인상을 가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익명성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삶의 근본적인 양식입니다. 들뢰즈가 얘기하는 'n개의 욕망'과 같은 개념은 모두 고정된 사회적 정체성을 가지지 않는 익명적 욕망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익명성이 좋은 힘이 될 수 있을까요? 익명성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와 같은 고정된 정체성 정립 요구를 빗겨 갑니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면, 자기가 있는 자리를 소중한 천직으로 아는 것, 그러나 이것은 자기 책상 앞에 주어진 일 외에는 알지 못해 변화무쌍하게 대처해야 하는 상황 앞에서 속수무책에 빠지게 하죠.

가령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후, 관리들이 자기 직분의 정해진 매뉴얼을 벗어나서 비상사태에 걸맞은 유연한 대처를 해 주었더라면 하는 탄식이 많았습니다. 자기 직분의 형식적 정체성에 얽매이느라 익명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 일화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들뢰즈는 <천 개의 고원>에서 장기와 바둑의 차이를 재미있게 비교한 적이 있습니다.

"장기의 말들은 모두 코드화되어 있다. (…) 말끼리의 적대 관계를 규정하는 내적 본성 또는 내적 특성을 구비하고 있다. (…) 마(馬)는 마이고, 졸은 졸이며, 포(包)는 포이다." "이에 비해 바둑은 작은 낱알 아니면 알약이라고 할까, 아무튼 단순한 산술적 단위에 지나지 않으며, 익명 또는 집합적인 또는 3인칭적인 기능밖에 하지 못한다." (<천 개의 고원>(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지음, 김재인 옮김, 새물결 펴냄))

들뢰즈의 비유를 들어 이야기 하자면, 장기가 정체성을 갖고 움직이는 자들의 게임인 반면에 바둑이야말로 익명의 힘으로 움직이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자들의 게임이죠. 지금 시청 앞에 촛불을 들고 모인 시민이야말로 바로 익명의 힘이 얼마나 큰 가를 보여주는 증거 아닌가요?

문학의 위대한 무용성

강양구 : 이 책을 치밀하게 읽지 않으면,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오해할 만한 대목도 있는 듯합니다. '문학을 읽는 것이 왜 중요한가?'라는 글이 대표적입니다. 책에서는 '문학을 읽는 것이 왜 중요한가'라는 질문이 우문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문학을 읽는 행위의 본질에는 무용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죠.

이 책 1부의 열쇳말이 인문학입니다. 그런데 인문학의 앞에 "사람을 치료하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문학의 목적이 치유인가요? 사실 철학과 같은 인문학의 목적이 치유라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하는 알랭 드 보통 같은 대중 철학자도 있습니다. 더구나 이 책에는 교수께서 직접 문학이나 철학으로 치유 받은 개인적 경험도 언급되고요.

얼핏 보면 인문학은 무용하다는 이야기와 사람을 치료한다는 이야기가 충돌하는 듯 보입니다.

서동욱 : 재미있습니다. 여러 편의 에세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 책의 고유한 구성 원리가 지금 이 질문을 통해 드러나는 듯합니다. 읽는 이를 통해 모래알들이 이어져 별자리가 되는 구성 방식 말입니다.

맞습니다. 인문학에는 용도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여줄까요? 우리는 대개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다른 이와 함께 있습니다. 가령 돈을 벌기 위해 회사에서 다른 동료와 협력합니다. 이렇게 어떤 목적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형성하는 우리의 일반적인 삶에서 사람 사이의 본래적인 관계는 증발해 버리죠.

문학을 비롯한 인문학은 바로 이 상실한 본래적인 관계를 일깨워주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목적을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유용성과는 무관한, 존재 자체만으로 의미가 충만한 우리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이야말로 문학, 인문학의 무용성이죠.

강양구 : 인문학의 쓸모없음을 통해서 우리가 상실한 삶의 본질, 그리고 본래적인 관계를 깨닫게 되는 것이야말로 치유와 연결되나요?

서동욱 : 그렇습니다. 쓸모없다는 건 유용성으로부터, 목적을 가진 조직으로부터, 목적을 수행하는 특정한 기능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타인을 해방하는 기능을 수행하려면 인문학은 어떤 위치에 서야 할까요? 바로 환자의 위치입니다. 사회가 강요하는 특정한 기능을 위한 부속품의 자리에서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사유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치료하는 인문학'이라는 글에 인용한 니체의 말을 살펴보죠.

"힘들게 위액을 토하게 하는 사흘 동안 지속되던 편두통의 고문에 시달리는 와중에 (…) 사물에 대해 아주 냉정하게 숙고했다. 그보다 양호한 상태였더라면 나는 그렇게 숙고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예리하지도 '냉정'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 송가, 니체 대 바그너>(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백승영 옮김, 책세상 펴냄))

우리의 생각이 언제 시작되는지 보죠. 인문학을 한다, 예술을 한다, 과학을 한다고 할 때, 생각은 언제 시작될까요? 결코 임의적인 지점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무엇인가와 맞닥뜨려 심각하게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필연적 사유'는 늘 환자의 위치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환자의 사유를 통해 우리를 아프게 하는 목적이 전제된 기능적 관계, 또는 기존의 정체성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우리는 치유될 수 있습니다.

인문학이나 예술이 우리의 쓸모없음을 알게 해준다는 건, 우리가 다른 무엇을 위한 존재가 아닌 독자적인 존재임을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독자성을 회복하는 건 결국 치유의 문제라고 할 수 있죠.

강양구 : 이 책에는 사랑이나 우정처럼 목적이 없어야만 그 가치대로 유지되는 관계에 관한 성찰이 몇 대목에 걸쳐 소개됩니다. 인문학의 쓸모없음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도 되나요?

서동욱 : 맞습니다. 기능적으로 우정에, 사랑에 접근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저 사람과 친해지면 도움이 될까하는 생각이 사실 오늘날의 여러 사회 문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교실에서도 이런 문제가 드러납니다. "걔 공부 잘하니?" 하는 엄마의 질문이 우정을 기능적으로 만듭니다. 이런 문제로부터 우정이 상실한 본성을 되찾도록 치유하는 게 오늘날 우리의 관건이죠.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용기

강양구 : 이 에세이집의 장점 가운데 하나가 여러 철학자나 작가의 고전이 적시적소에 인용된다는 겁니다. 은연중에 책에 소개된 고전을 읽어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저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그랬습니다. 사실 다이제스트만 읽었지, 원전에는 도전해 본 적이 없거든요. 인용문을 보니 할리우드 영화 뺨치게 다이내믹하더군요.

우리는 고전에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까요?

서동욱 : 방금 <일리아스>를 언급하셨죠. 고대 그리스인이 현대 할리우드 수준의 기술을 갖고 있어서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그들에겐 블록버스터 영화가 필요 없었을 겁니다. <일리아스>와 같은 서사시가 영화가 보여주는 것 이상의 장면을 정신의 영사막에 투사하니까요.

▲ <생활의 사상>(서동욱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작품은 먼저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건 고전이니 읽어야 된다는 목적의 기능으로 고전을 받아들이지 말고, 즐거움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근본적인 삶의 국면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고전을 억지로 시작해서는 안 되는데, 단지 논술 시험 준비 등을 이유로 요즘은 억지로 읽는 듯합니다. 그래서는 고전을 결코 즐길 수 없죠.

고전을 접하는 건, 우리 삶의 양식을 책 읽기를 통해서 얻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수분 공급을 위해 음료수를 마신다, 양분 공급을 위해 음식을 먹는다? 우리는 결코 이렇게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을 위해 연료를 공급받는 기계가 아닌 까닭입니다. 그야말로 음식을 먹고 마시는 일이 즐거워 그렇게 하죠. 건강을 위해 산책한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공기를 마시며 걷는 게 즐거워 산책합니다.

이런 삶의 근본적 양식을 독서에서 찾는다면, 즐거움을 쫓아다니는 독서입니다. 그러다가 <일리아스>의 잔혹한 장면과 마주치겠죠. 왜 저들은 저토록 처참하게 죽는가. 마침내 이런 대목과 마주하게 됩니다.

"신들은 비참한 인간의 운명을 정하셨소. 괴로워하면서 살아가도록 말이요."(<일리아스>(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숲 펴냄))

<일리아스>의 잔혹한 묘사에 모종의 쾌감과 함께 몰입하다가, 우리는 자연스럽게 전쟁의 참혹함에 숨겨진 인간의 근본적인 운명에 관한 깨달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가장 자연스러운 고전 읽기 아닌가 합니다.

강양구 : 마지막 질문입니다. 저자 입장에서 어떤 독자가 이 책을 읽어주기를 바라십니까?

서동욱 : 환자의 자리에 있는 분, 정체 모를 무엇으로 인해 마음이 괴로운 분과 이 책을 통해 만나길 바랍니다.

강양구 : 오늘은 <생활의 사상>의 저자 서동욱 교수와 이야기했습니다. 이 책의 한 구절을 읽으며 마치겠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야말로 칸트가 말한 용기가 아닌가 합니다.

"미신적 대상 및 그것에 대한 공포에 맞서기 위해 필요한 것은 똑똑한 머리이기에 앞서 바로 '용기'이다. 바로 이런 뜻에서 칸트는 미성숙의 원인이란 지성의 부족이 아니라, 이 지성을 사용할 용기의 결핍이라고 했던 것이다. 용기가 없는 지성은 미신적 대상에 복종해서 왜 이 미신에 복종해야 하는지를 자신과 사람들에게 보다 잘 설명하려고 노력하며 순종의 한평생을 보낼 것이다. 용기를 갖춘 지성만이 우리를 지배하는 미신적 대상의 힘이 실은 아무런 근거도 가지지 않음을 밝혀 줄 것이다. 그리하여 미신적 대상은 더 이상 우리에게 공포를 주지 못하며, 공포 속에서 겁을 먹은 우리의 상태, 바로 예속의 상태도 사라지리라."

예속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온갖 불확실성의 공포에서 벗어나서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익명의 힘'이 이번 주 토요일 광화문에서 어떤 용기를 보여줄지 기대하면서 강양구의 친북은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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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기자
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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